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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속의 짱깨집

Led Zepplin 2012. 8. 24. 12:08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인사동의 우리집 근처 종로2가 보신각 사거리에는 보신각 맞은편에 화신백화점이라고 있었다. 그 화신백화점 바로 옆 좁은 골목 백화점 담벼락을 끼고 들어가면, 50여미터 쯤에 2층으로 된 좁은 계단이 있는 중국집이 있다. 아버지께서 물만두를 좋아하셔서 우리 둘은 그 집엘 가끔 들려 물만두를 먹었다. 대개는 집에서 시켜 먹었는데, 가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물만두를 먹으러 그 집엘 들렀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를 알아 본 주인이 안쪽의 조용한 방으로 우리를 안내했으며 연신 허리를 굽혀 각별한 예의를 표했던 것으로 미루어 아버지는 그 집의 고급 손님이셨던 것 같다.

 

입구의 대나무발을 옆으로 밀치고 들어서면, 주방에 대고 “ 으어~ , 홀에 짜장면 두 개 하고.. 우동 하나 이쓰으어~~ ”하며 목을 길게 늘여 빼고 주문을 소리치는 왕서방의 구성진 목소리와 주방쪽에서 탕탕거리며 면을 뽑는 소리는 나의 목젖속으로 침이 꼴까닥 넘어가도록 식욕을 자극했다.

나무젓가락을 양쪽으로 반듯하게 쪼개야만 하는 것도 아닌데도 항상 반듯하게 쪼개려고 노력하며 쪼갰으며 양 손바닥 사이에 넣고 비비면서 나무젓가락의 부스러기를 털어내고 기다리는 그 시간은 내 유소년기 삶의 보람이자 의미였다.

집에서 가끔 해먹던 아버지의 고향 충청도식 김치왕만두와 달리 중국집 물만두는 작아서 내가 먹기에 안성맞춤이었으며 더구나 물에 적셔서 나오기 때문에 촉촉하여 목이 막히지 않았고 간장과 식초를 섞은 소스에 찍어먹으면 그 맛이 달콤새콤하고 쫄깃거리는 것이 아주 별미였다. 물만두로 목을 적신 다음에는 잠시 기다리면 탕수육이 나온다. 유난히 바삭거리고 쫄깃거리며 소스를 적시면 새콤하고도 달짝지근한 그 맛은 지금도 탕수육을 가끔 먹는 이유중 하나이다.

 

중학교 3학년 여름 방학 때였다. 종로에서 한강까지 버스를 타고 수영을 하러가서 돌아오는 길은 이미 주머니에 돈이 없었다. 그 시절 주머니에 돈이 없는 것은 대부분 아주 당연한 모두의 형편이었다. 나를 포함한 친구 5명은 배가 출출한 채로 묵묵히 집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길가 어느 중국집에서 풍겨오는 짜장면 냄새가 아주 그야말로 죽여주는 것이었다. 친구들은 모두 갑자기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서 동시에 내 얼굴을 쳐다봤다. 옷 소매이던가 바지 아랫단이던가 어디에 꼬불치건 숨겨두건 대체로 비상금이 없었던 적이 없는 나에게 기대하고 있음이 틀림없는 표정들이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나는 모종의 결심을 하고 친구들과 함께 중국집엘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가려는 친구들을 붙잡고 문에서 가까운 세 번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물론, 문에서 가장 가까운 의자에는 내가 앉았다.

 

나는 큰소리로 당당하게 짜장면 곱빼기 5그릇을 시켰다. 짜장면이 나오자 우리들은 누가 뺏어먹기라도 하는 것처럼 우악스럽게 입으로 몰아넣기에 바빴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이란 이런 경우일 것이다. 그 중에 가장 빠르고 우아하게 나는 식사를 마쳤다. 나만큼 먹는 속도가 빠른 윤경이가 아쉬운 듯 쩝쩝거리며 마지막 젓가락질을 끝내자 나는 낮고 조용하며 단호하게 소리쳤다.

“튀어!~ .” 외침과 동시에 나와 윤경이는 의자를 박차고 현관입구를 뛰쳐나왔으며 뒤를 따라 현철이와 철수가 입안의 면발을 으적거리고 씹으며 달려 나왔다. 문을 벗어나자 우리는 동네 방향으로 쏜살같이 질주하였는데... 뛰면서 뒤를 돌아보니 곰이 안 보이는 거였다. 얼마를 뛰다가 커브길 모퉁이에 서서 뒤를 지켜보니 정말 곰이 보이지 않았다. 홀에서 운동화 두 짝을 머리위에 쳐들고 무릎 꿇고 세시간 동안 벌을 선 후 학생증을 빼앗긴 곰은 삼일간 그 집에서 짱께 배달을 하며 장렬하게 짜장면값을 갚고 보무도 당당히 우리들 곁으로 돌아왔는데, 곰은 끝까지 우리 동지들의 이름을 불지 않았던 거다.

 

마지막 무시험으로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롤 진학한 우리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그날도 우리는 무쟈게 배는 고픈데 주머니에 돈은 없었다. 대체로 나를 믿고 있었던 녀석들은 그 날도 입맛을 다시며 희죽거리면서 나를 따라 중국집 2층 방으로 안내되었다. 나는 짜장면 곱빼기 5개와 탕수육을 호기롭게 시켰다. 우리는 웃고 떠들며 음식을 먹었고 일자로 길게 늘어선 방들의 앞에는 나이는 우리보다 많은데 좀 어벙하게 생긴 녀석이 통로를 오락가락하며 당번을 서고 있었다. 음식을 대부분 먹어가자(어느 시간쯤 되어야 손님들이 음식을 다 먹는 지는 밖에 있는 종업원들이 귀신같이 안다), 나는 주전자의 물을 음식이 남은 그릇에 모두 버리고 밖에 있는 녀석에게 소리쳐 뜨거운 보리차를 부탁하며 주전자를 건네고는 방문을 소리나게 닫았다. 녀석이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를 들은 나는 조용히 미닫이문을 열고 책가방 속과 품안에 신발을 모두 거두어 방안으로 들어서며 “ 야, 창문 열어!~ .”하고 은밀하고도 준엄하게 말했다. 녀석들은 이내 아쉬운 마지막 탕수육 건더기를 우적거리고 씹으며 교모를 눌러쓰면서 "아, 쓰바.. 내 이럴 것 같더라~ " 라는 둥 "언능 뛰어, 시꺄~ "등을 징징거리며 2층 창문을 통하여 튀었던 바 곰이 다리를 약간 삐끗했을 뿐 우리 모두 무사히 탈출에 성공했음은 물론이다. 그 날 이후, 우리나라 전국의 중국집 2층 창문에는 창살이 설치되었다는 후문이 들려왔다^^...

 

도시를 고향으로 둔 나의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추억으로 기억됐던 중국집의 푸근한 고향의 냄새로 기억되는 즐거운 설레임은 이제 그 막을 내렸다. 중국집의 단골메뉴중 하나였던 우동이라는 메뉴는 유명무실하여 졌으며 짜장면은 가장 가볍게 식사를 해결하는 단순한 음식에 불과하게 되었다. 청춘시절에 조그만 하얀 도자기로 된 배갈잔을 홀짝거리며 중국집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내려치며 철학과 문학과 유신을 난도질했던 우리는 이제 반백의 노친네가 되어 '백세장수'를 우려하고 있음이다.

양식은 비싸서 꿈에 떡 얻어먹기였으며 일식집은 아주 드물었고, 가장 친근하고 만만했던 짱깨집의 정겨움은 이제 흑백사진과 함께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지만, 습관은 무서운 것이다. 지금도 나는 가끔 지방으로 난 국도를 지나가다가도 중국집 간판이 나타나면 유심히 바라보며 음식맛을 가늠해 보면서 입맛을 쩝쩝거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근자에 가장 맛있었던 중국집은 용인 이동면사무소 주변에 있는 ‘씽차이’이다. 홀의 벽면에 워커힐인가 어딘가에서 총주방장을 했다는 조그만 안내판을 본 기억이 있는데, “구래서? ”하며 주문을 했지만 먹어보곤 “오잉?~ ”하며 즐거워했다.

짬뽕도 기통차다. 주차장에는 외제차들도 흔하게 보인다.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2층이 없다. 이번 주말엔 그 집엘 가서 짜장면과 짬뽕을 맛보고, 인근의 송전호에서 호수를 내려다보며 뜨거운 원두커피 한 잔을 맛있게 마시고 와야겠다. 물론, 커피집은 2층이 있는 집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