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무더위가 어느새 갈앉고 조석으로는 제법 선선한 가을의 문턱에 왔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마따나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위에 얹어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시옵소서~ ” 그 ‘바람’이 이렇게 선선하게 불기 시작하였다. 젊은 날, 여름 대청에 엎드려 책을 읽다가 더위와 매미소리를 자장가 삼아 살풋 잠이 들어 달게 자다가 서늘한 바람에 잠이 깨어 다시 책을 읽으면 그 청명한 기운이 얼마나 즐겁고 가슴 벅찼던가...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이 있는데,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기보다는 놀러 다니기에 딱 좋은 여행의 계절인 거다. 놀러 다니는 것도 지겨울 쯤 해서 책을 붙잡아 다잡고 앉으면 가을이야말로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이 실감나도록 책이 머릿속에 쏙쏙 들어온다. 문자향 서권기란, 말 그대로 글자에서 나오는 향기와 책에서 나오는 기운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은은하게 풍기는 묵향(墨香)이나 서가에 꽂힌 서책의 권위(權威)를 이르는 말이 결코 아닐 것이다. 혹자는 모름지기 만 권의 독서량이 있어야 문자향이 피어나고 서권기가 느껴진다고 한다. 하지만 많이 읽는다고 하여 문자향과 서권기가 배어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사람에게서 문자향과 서권기가 배어나려면 먼저 그 사람됨에서 부터 진솔하게 우러나와야만 할 것이라고 본다.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를 말하려면 책 말고도 또 빼놓을 수 없는 그림이 있는데, 바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이다. 조선 말기의 문인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일생에 두 차례 유배를 가는 바, 그 유배지가 55세 되던 조선 헌종 6년(1840년)부터 헌종 14년(1848년)까지 9년 동안 머문 제주도이다. 제주로 유배 간 추사는 더는 권력을 회복하기 어려운 쇠락한 늙은이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귀양 간 이듬해 절친이자 든든한 후원자였던 친구 김유근의 부음을 들었으며 이듬해는 부인의 부음까지 듣는다. 유배지에서의 절망같은 슬픔과 고독을 추사는 술이 아닌 독서로 견뎌 나가는데 그러한 고통의 나날속에 한줄기 희망이라면, 제자 우선 이상적(藕船 李尙迪·1804~1865)이 역관으로 중국을 드나들면서 구하기 어려운 책을 구하여 변함없이 꾸준히 보내 주는 것이었다.
제자 이상적은 여러 차례 구하기도 어렵거니와 값도 엄청나게 비싼 중국의 신간 서책을 구해 제주도의 스승에게 보내주는 성의를 다한 것이다. 그 중 특히 귀하다고 소문난 4권으로 된 ‘대운산방문고(大雲山房文藁)’ 초간본과 2집본, 120권 79책의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을 보내준 제자 이상적에게 추사는 스승으로써의 고마운 마음을 표하고저 그림과 글씨를 세로 23㎝, 가로 108㎝의 종이에 담아 전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절세의 그림 ‘세한도(歲寒圖)’인 거다. 텅 빈 오두막집을 중심으로 바로 오른편에 소나무 두 그루가 서고 그 반대편에 잣나무로 보이는 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 황량하고 깡마른 분위기의 갈필(渴筆) 그림, 그리고 그 오른편에 우선 이상적에게 주는 ‘세한도’라 밝힌 글씨, 그 왼쪽에 논어(論語)에서 따온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 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也)’라는 편지 형식의 글과 완당(阮堂) 정희(正喜) 추사(秋史)라는 이름을 새긴 인영(印影) 등으로 구성된 단순하게 보이는 그림이다.
보잘 것 없고 쓸쓸한 느낌 물씬한 스승의 간결한 그림을 보고 한 눈에 탄복한 제자 이상적은 그 그림이 사실적 형상의 그림이 아니라 스승의 인생을 통하여 발현된 그의 인품과 학식/ 인생의 역경이 처절하게 녹아있는 훌륭한 그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이상적은 스승에게 받은, 어쩌면 당시 그림 유형으로는 대단치 않아 보일 수도 있는 그 그림에 대단히 감격하였으며 그는 그것을 중국으로 가져가서 청나라 학자들에게 보여 주면서 스승의 고단한 소식을 전했다. 당시 추사는, 24세 때 연경에 가서 만나 스승으로 모신 노학자 옹방강(翁方綱) 등을 통해 중국 강호에 잘 알려져 있는 조선의 문인이었던 거다. 중국의 문인들은 우선이 가져간 ‘세한도’를 들여다보고 그 뜻에 감동하여 서로 다투어 제영(題詠)을 달았는데 나중에 이 제영은 총 16개까지 붙게 되었으며, 그럴 때마다 ‘세한도’의 가치는 높아져 갔는데 그야말로 문자향 서권기가 우러나오는 대단한 그림과 글씨의 집대성인 거다.
추사선생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초의선사(艸衣禪師)이다. 선사는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침체되었던 조선의 불교계에 일대 선풍을 일으킨 선승이며, 한편으로는 우리 차 문화를 중흥시켜 다성(茶聖)으로 불리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15세 때 강변에서 놀다가 물에 빠져 위험에 처했을 때 목숨을 구하여준 승려가 그에게 출가를 권하였는데, 그가 이를 받아들여 16세 때 벽봉스님을 은사로 삼아 승려로서의 삶을 시작하였다. 초의선사는 불교학(佛敎學) 이외에도 유학(儒學), 도교(道敎) 등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졌고 범서(梵書)에도 능통했다. 해남의 대흥사에 머무를 때 주변으로 유배 온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의 선비들과 각별한 교분을 쌓게 되었다. 이후, 그는 학승으로서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대흥사의 동쪽 계곡으로 들어가 일지암을 짓고 40여 년 동안 정진하면서 책과 다선삼매(茶禪三昧)에 빠져들었다. 초의선사는 드물게 보는 선승일 뿐만 아니라,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에 능한 예술가라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니다.
추사 김정희는 금석학자이자 실학자이며, 그야말로 문자향 서권기를 대표할 수 있는 우리나라 제일의 문장가인 동시에 최고의 명필로 추사체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일찍이 초의선사께서 추사의 아우에게 ‘예부터 성현들은 모두 차를 좋아했으니 차란 군자와 같아서 사특함이 없다 (古來賢聖俱愛茶 茶如君子性無邪)’라고 하였는데, 추사는 ‘조용한 가운데 혼자 앉아 차를 마심에 그 향기는 처음과 같고 물은 저절로 흐르고 꽃은 저만치 홀로 피니 (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水流花開)’라고 화답하였다. 두 사람이 말하는 이 경지들이 모두 다선삼매가 아닐 수 없으며 문자향 그윽한 필담이 아닐 수 없다. 아래 추사(秋史)선생의 시는 참으로 가을밤에 음미할 만하다. 어느 봄날 절친한 친구였던 황산(黃山) 김유근이 집으로 찾아오자 그와 함께 시를 지었다는 거다.
芳辰對酒每咨嗟(방신대주매자차)/ 꽃피는 철에 술을 보면 탄식이 절로 나니
難把酒錢歲月覗(난파주전세월사)/ 돈으로도 술로도 세월은 잡지 못하네.
愧我塡腸同麥飯(괴아전장동맥반)/ 부끄러워라! 나는 주린 배나 채우는 보리밥인데
如君稀世是菖花(여군희세시창화)/ 그대는 세상에 드문 창포꽃 같은 사람.
蠅蚊應少拈茶處(승문응소염다처)/ 차 달이는 곳에는 파리와 모기가 적은 법
蜂蝶爭喧嫁棗家(봉접쟁훤가조가)/ 대추나무 시집보내는 집에는 벌과 나비떼 몰려들리라.
滿眼石榴開似火(만안석류개사화)/ 석류꽃이 눈에 가득 불꽃처럼 피는 때에
門前轢轢到詩車(문전역력도시차)/ 문 앞에는 삐걱삐걱 시인의 수레 도착했네
----- 次黃山韻(차황산운)/ 황산과 함께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