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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랩소디

Led Zepplin 2016. 5. 29. 22:53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  


  양인(洋人)들에게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에겐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이 있는 바, 《반가사유상》은 《보살사유상》이라고도 하며 6세기에 제작되어 졌다는 거다. 일반적으로 의자에 걸터앉아 왼발은 내리고 오른발은 그 무릎 위에 얹는 일종의 반가좌법(半跏坐法)으로서, 대좌 위에 걸터앉아 바른 팔꿈치로 무릎을 짚고 그 손가락으로 바른 뺨을 고이며 심사(沈思)하는 자세의 보살상(菩薩像)을 말한다.

일본의 교토 고류지(廣隆寺)에 있는 목조 《미륵보살반가상》은 7세기에 제작되어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이 틀림없지만, 일본의 국보 제1호다. 이 불상을 직접 본 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는 ‘최고의 미소’라고 극찬했다.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말로’는 한 발 더 나아갔다. “일본이 만약 침몰하여 나에게 하나를 고르게 한다면 이 불상을 선택하겠다”라고.

《반가사유상》은 깊은 고뇌에 잠긴 젊은 싯다르타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 하는데, 싯다르타 태자는 벌레가 새에게 쪼아 먹히고, 새는 다시 맹금류에 잡아먹히는 모습을 보면서 삶의 비참함에 절망하였으며 사람이 늙고 병들어 죽어 가는 모습에서는 더욱 고뇌하였고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깊이 사유하게 되었다는 거다.

 

천년의 미소로 일컬어지는 《반가사유상》의 신비스러운 미소를 두고 참선의 표정이라느니 삶의 고통을 관조하는 모습이라느니 인간의 가장 평화스러운 미소라느니 등등의 설이 있지만, 한국불교미술 최고의 표정으로는 나는 단연코 충남 서산 용현리의 《마애여래삼존불》의 표정을 꼽는다.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은 반가사유상이 집중 조성된 6세기 말 7세기 초기의 마애불로서, 이 땅이 죽음도 없이 평화로우며 풍요롭고 너그러운 도솔천을 구현하려는 싯다르타의 고뇌를 극복한 표정이 바로 이런 표정일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

늦은 오후 해질 무렵 변방의 어느 계곡 속에 자리한 《마애여래삼존불》 앞 백제의 그 따뜻한 미소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따스한 가슴으로 마주 웃으며 오랜 시간을 서성이다가 해가 지려고 어둑어둑해지는 시간에 마지못해 자리를 뜬 시간들이 떠오른다.

무식의 소치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다빈치’의 《모나리자》 미소 앞에서 그렇게 길게 들여다 본 적이 없다. 아니, 전혀 그럴 마음조차도 떠오르지 않았다. 인간이 이루고저 하는 진정한 마음의 평화. 그 마음의 평화가 강같이 흐르는 순간을 누가 마다하겠는가. 싯달타가 이룬 그 평화와 예수께서 간절히 갈구하던 대중의 사랑 또한 큰 뜻으로 본다면, 같은 의미일 것이다.

 

또 하나의 위대한 미소가 있다. “세존(世尊: 석가모니를 의미함)께서 영산의 법상에 오르시니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 아무 말씀도 않고, 꽃잎 하나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자 다들 의아하게 좌우를 둘러보는데 오직 한 사람 가섭(迦葉)존자만이 혼자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염화시중의 미소’라고 알려진 이 설법은 불교 선종(禪宗)의 최초 설법이다. 내용을 요약하면 (세존께서는) 말을 통하지 않고 마음으로 전했으며, (가섭 존자는) 이를 미소로서 받았다는 것이다. 즉, ‘가섭존자’만이 ‘말로서 세울 수 없는(不立文字)’ 불가의 미묘한 법문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진리란 언어를 초월하고 있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세존’의 마음에서 ‘가섭존자’의 마음에 인생의 진실이 전해진 것이다. 그렇다고 그 꽃에 어떤 신비로운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세존’께서는 우연히 손에 꽃을 갖게 되어 그것을 대중들에게 보여 주었을 뿐이다.

어째서 ‘가섭존자’만이 미소로 화답하였을까? ‘가섭’은 ‘세존’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이며, 두타제일(頭陀第一)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두타(頭陀)란, 산스크리트어의 ‘두우타’를 음사한 것으로서 의/ 식/ 주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자아(自我)에도 얽매이지 않는 그 어떤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다. 이 텅 빈 무아(無我)의 마음이 가섭으로 하여금 삶의 진수를 꿰뚫는 은은한 미소를 짓게 했던 거다.

 

나는 가수 '조영남'을 아니 그의 노래를 좋아한다. 그러나, 최근 그가 그린 그림들 상당수가 그를 대신한 어느 화가의 것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적대적인 여론에 대하여 미술계의 ‘관행’이라고 변명했지만 그를 향한 비난이 더욱 들끓는다.

그의 항변은, 그림의 아이디어와 독창성은 화가의 것이므로 작품의 소유권은 전적으로 자신의 것이라는 논리이다. 아마도 그는 미국의 팝아트 작가' 앤디 워홀'을 떠올리며 ‘관행’을 들먹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와 ‘앤디 워홀’은 예술적 기법과 철학의 차이뿐 아니라, 그는 대작 사실을 숨겼지만 앤디는 만천하에 혼자 그린 그림이 아님을 말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다.

그림 한 점당 대가로 지급한 단돈 10만 원 정도의 값싸게 얻은 그림이 그의 사인이 들어가자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 호가(呼價)하는 ‘작품’으로 둔갑했다. 사람들은 그가 가난한 자에게 노동 착취를 했다는 점에서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말한다. 그는 가진 자가 처신해야할 배려와 나눔에 인색하고도 관행이라고 둘러댔다는 거다.

어차피 돈에 만족이란 없다. 살아봤으니 알지않나? 없어도 조금은 부족해도 툴툴 털고 웃으며 그나마 다행이라고 자족하면서 가볍게 살 줄 아는 사람이 너무 없다. 참으로 아쉬움이다. 그가 해마다 노래와 토크쇼로 벌어들이는 돈은 소시민들에게는 상상조차 어려운 거액이다. 수십 억 원이 넘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호화저택에서 잘 먹고 살고 있으며 예술과 철학 전반에 대한 풍부한 소양을 갖춘 우리 시대 또 한 명의 로맨티스트인줄 알았던 그가 어느 순간 황금의 노예가 되어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카지노 자본주의’의 마법에 빠져있었다는 점이 대단히 아쉽고도 아쉽다.

 

“Don't hang on/ Nothing lasts forever but the earth and sky/ It slips away.

(매달리지 말라. 땅과 하늘 외에는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다. 그것은 사라진다.)

All your money wouldn't another minute buy./ All we are is dust in the wind.

(네 돈 전부가 시간을 살수는 없다. 우리 모두는 바람 속의 먼지이다.)

Everything is dust in the wind.

(모든 것은 바람 속의 먼지이다).” --- Dust In The Wind(Kansas)

돌이켜보건대, 삶은 참으로 공허하다. 어느 날 문득 왔다가 어느 날 문득 가는 거다. 중/ 고등학생 시절 우리가 즐겨 부르던 노래가 있다. 주로 춤과 괴성으로 즐겼지만 말이다. 바로 열혈청춘 ‘Tom Jones’의 명곡 그 시절 우리들의 주제곡 《Proud Mary》이다.

“Big wheel keep on turning/ Proud Mary keep on burning/ rolling, rolling, rolling on the river~!!!” 그렇다. 커다란 바퀴가 멈추지 않고 돌아가서 프라우드 메리는 항해를 계속한다, 돌고 돌고 또 돌면서 강위를 내달린다. “rolling, rolling, rolling on the river~!!” 오늘도 그 수레바퀴를 돌리면서 우리들의 프라우드 메리호는 우리들을 싣고 운명의 강을 질주하고 있음이다.

5월, 계절의 여왕이 우리를 향하여 미소짓고 있다. 열정의 꽃 장미의 향기와 흠향의 순간 가슴이 멎을 것만 같은 아카시아의 꽃보라가 넘치는 이 아름다운 계절에 꽃보라의 향기 속 우리들의 운명은 또 어디로 그 어디로 이처럼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