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리스본행 야간열차(Night Train to Lisbon)

Led Zepplin 2019. 12. 2. 01:22


  

  12장으로 두툼했던 달력은 마침내 단 한 장만을 남긴 채 드나드는 도어의 바람에도 부르르 떨고 있습니다. 가을의 마지막, 그 심추(深秋)에 떠나는 밤기차는 낭만적이기 보다도 밤공기의 탓인지 무척 서늘합니다. 그러나, 서늘하지만은 않은 소설로 읽은 글을 영상으로 만나게 된 깊은 감동의 또 다른 열차가 있습니다. 고전문헌학을 강의하는 교사 ‘그레고리우스(제레미 아이언스 )’는 자리를 옮겨 앉으며 혼자 1인 2역의 체스를 두고 한 번 사용하고 버렸던 티백을 다시 재활용하여 뜨거운 차를 마시는 외롭고도 단조로운 사람입니다. 늘 그 옷이 그 옷인 헝클어진 머리칼의 아직 설익은 노년인 그의 생활은 비록 지루하지만 안온합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는 있으나, 학년이 바뀜에 따라 가르치는 학생들이 매년 바뀐다는 이유로 학생들과는 정을 나누려고 까지는 하지 않습니다.

 

학교에 출근하는 비 오고 바람 부는 일진 사나운 어느 날, ‘그레고리우스’ 교사는 다리 위에서 자살하려는 여인을 달려가 붙잡아 내려 말리므로 자살이 미수에 그치도록 합니다. 여인이 걱정되어 학교의 교실 안까지 데리고 들어가지만, 그녀는 조그마한 책자 한 권과 비에 젖은 붉은 가죽코트 그리고 ‘리스본’행 열차 티켓 한 장을 남긴 채 사라집니다. 혹시나 그녀를 만날까 싶어 나갔던 기차역 플랫폼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알 수 없는 열정에 휩싸여 충동적으로 ‘리스본’행 열차에 올라탑니다. 그러한 우연으로, ‘스위스’의 ‘베른’에서 부터 출발하여 ‘포르투갈’의 ‘리스본’까지의 여행이 시작됩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안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여인이 남기고 간 책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책을 읽습니다. 단행본처럼 보이는 작은 책은 ‘그레고리우스’의 단조로운 삶에 충격을 주어 그를 감탄하도록 합니다. 그런 연유로, 그는 ‘리스본’에 도착하여 호텔에 방을 잡고 즉시 책의 저자인 ‘아마데우 드 프라두(잭 휴스턴)’를 찾아 나섭니다. 하지만 저자인 ‘아마데우’는 오래 전에 이미 죽었으며, 대신 노파가 되어버린 ‘아마데우’의 여동생 ‘아드리아나(샬롯 램플링)’가 그를 맞이합니다. 그 여동생 또한 ‘아마데우’라는 사나이의 삶의 궤적에 대한 추적에 일조하게 됩니다. ‘아마데우’는 포르투갈의 상류층 자제이며 아버지는 판사였고 ‘아마데우’는 지성/ 가문/ 외모/ 인품까지도 두루 갖춘 인텔리였던 겁니다.

 

‘아마데우’의 궤적을 추적하던 중 갑작스러운 자전거와의 충돌 사고, 쓰고 있던 안경이 깨진 ‘그레고리우스’는, 새로운 안경을 맞추기 위해 안경점을 찾는데 안경점에서 만난 안경사 ‘마리아나(마르티나 게덱)’에게 자신이 ‘리스본’에 온 이유를 말하던 중.. 그녀의 삼촌 ‘주앙(톰 커트니)’이 예전에 ‘아마데우’가 활동한 반독재 결사조직의 동지이자 친구였음을 알게 됩니다. ‘주앙’을 통하여 ‘그레고리우스’는 ‘아마데우’의 삶의 궤적을 쉽게 추적해 나갑니다. ‘그레고리우스’의 안경을 통하여 감독은 우연(偶然)이 우리의 삶을 이끈다는 영화의 주제와 직결되는 중요한 포인트를 집요하게 보여주게 됩니다.

 

다시 말해 본다면, ‘그레고리우스’의 안경이 깨지지 않았더라면 ‘그레고리우스’는 ‘마리아나’와 양로원에 갇혀(?)있는 그녀의 삼촌 ‘주앙’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레고리우스’의 깨져버린 두꺼운 누런색 뿔테 안경은, 지루했던 그리고 정체된 그의 삶을 대변합니다. 반면에, ‘마리아나’가 맞춰준 새 안경은 고급스럽진 않지만 얍씰한 안경으로 전에 사용하던 투박한 안경과는 대별됩니다. 이 새로운 안경은 그의 삶의 변화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안경사 ‘마리아나’는 완성된 안경을 건네주며 말합니다. “당분간은 좀 어색할 거예요.” ‘그레고리우스’는 새로 맞춰 어색한 안경을 매만지고 고쳐 쓰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한참 바라봅니다. 하나 더, 그를 ‘베른’에서 ‘리스본’으로 다시 ‘리스본’에서 ‘베른’으로 이끄는 야간열차 또한 인생이라는 여정을 상징하는 메타포라고 보입니다.

 

화자(話者) ‘그레고리우스’는, 일련의 이러한 우연한 사건들을 통하여 영화의 '이야기 속 이야기'라 할 수 있는 ‘아마데우’라는 한 사나이의 삶의 궤적을 추적하면서(마치,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을 연상하게 만드는) 자신의 삶도 변화하는 계기를 맞게 됩니다. 영화 속 ‘리스본’의 풍광과 고색창연한 건물들을 보여주는 구도는 아름다우며 아프고 슬픈 장면조차도 아름다워서 감동적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아주 오래 전, ‘리스본’의 중심에 있는 ‘로시우광장’의 분수대 앞에서 사진을 찍어 준 이름이 잊혀진 여대생에게 광장 앞 꽃집에서 파는 꽃을 선물하였던 로맨틱한 기억도 떠오릅니다. 영화의 포스터에는 ‘알칸타라 전망대’의 벤치에서 ‘그레고리우스’가 앉아있는 모습이 나오는데, ‘리스본’이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도시이지만 ‘알칸타라 전망대’에서 해질 무렵 ‘리스본’ 시가지를 내려다보면 감동적으로 아름답습니다.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인간의 삶을 이끄는 우연(혹은 운명)에 관한 실존적이고 철학적인 영화이며 불교론적인 영화로 보입니다. 누구나 돌아보면, 운명같은 우연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대개는 그 때 그 우연이 운명으로 연결되어 지리라고는 알지 못합니다. 영화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풍경을 보여주며, ‘아마데우’와 ‘그레고리우스’의 삶을 연결하여 보여줍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관객으로서 그들과 함께 대화하게 됩니다. ‘아마데우’는 기쁨/ 열망/ 안정의 삶을 추구하였으며.. 이성적이지만 다소 루즈한 ‘그레고리우스’는 ‘아마데우’의 삶이 활력적이고 드라마틱하며 열정적이란 점에 이끌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우리의 삶에 이끌릴 것인가요...

 

“어느 장소로 여행을 간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으로 여행을 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 기간이 얼마나 짧을지는 상관없다. 하지만 여행을 통해 스스로를 마주하는 것은 매우 고독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이 고독의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한 것이 아니던가. 그것이 우리가 인생의 마지막, 후회하는 모든 것들을 포기하는 이유가 아닐까.” --- 아마데우의 책 〈언어의 연금술사〉에서

 

“드라마틱한 삶은 가끔씩 믿을 수 없을 만큼 이목을 끌지 않는다.” --- ‘그레고리우스’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 잔인함, 연민, 매력이 가득한 감독!” --- ‘그레고리우스’

 

“인생이란 우리 자신을 향한 여행이다.” --- ‘아마데우’

 

“우리의 삶은 죽음이라는 저 바다로 흘러드는 강과 같다.” --- ‘호르헤 만리케’(스페인의 시인)

 

“여행은 길다. 이 여행이 끝나지 않기를 바랄 때도 있다. 아주 드물게 있는, 소중한 날들이다. 다른 날에는, 기차가 영원히 멈추어 설 마지막 터널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 ‘그레고리우스’

 

‘베를린자유대학’의 철학과 교수이자 작가인 ‘파스칼 메르시어’가 쓴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철학을 문학으로 바꾼 역작으로 독일에서 200만부가 출간되었고(우리나라에선 한양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튀빙엔대학교에서 고전문헌학을 수학한 독어전문 번역가인 전은경이 번역하고 들녘출판사가 출간).. 30개국이 출간한 베스트셀러이며, 스토리를 통하여 한 남자의 인생을 바꾼 기적 같은 이야기입니다. 무관심으로 타인과 단절한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매혹적인 문체와 여러 사람들이 엮여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삶을 섬세하고 철학적인 고찰로 돋보이도록 만든 유럽문학의 현대 고전이라 불립니다. 베스트셀러를 영상으로 옮긴 이 영화는 ‘황금종려상’ 2회 수상에 빛나는 세계적인 거장 ‘빌 어거스트’ 감독의 작품(2013년작).

 

〈독시아데스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아마 별 일 아닐 겁니다. 그리고 이미 말했다시피 그 의사는 최고입니다.” 그레고리우스는 병원 출입구에서 독시아데스를 돌아보고 손을 흔든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등 뒤에서 문이 닫히고 서서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이렇게 원작인 소설은 마지막을 장식하지만, 영화는 ‘리스본’의 기차역 플랫폼에서 ‘베른’으로 출발하려는 기차 앞에서 안경사 ‘마리아나’와 나눈 대사는 의미심장하며 철학적입니다. “생각해 보면, ‘아마데우’와 ‘스테파니아’... 그들 인생에는 활력과 강렬함이 가득했던 것 같아요.” “너무 강렬해서 결국 부셔졌쟈나요.” “하지만, 충만한 삶이었죠.” “내 인생은 뭐죠? 지난 며칠을 제외하고는... ” “그런데도 다시 돌아가려 하는군요. 여기 머무시는 건 어때요? 여기 계시면 안되나요?” 마리아나가 그레고리우스를 붙잡는 듯한 대사와 동시에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포르투갈의 ‘파두’를 바탕으로 한 ‘앙떼 포크’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주제음악이 잔잔하게 밀려옵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내가 눈물을 참은 것은 나이듦을 감추기 위함이었을까요 아니라면 만용이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