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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꾸는 〈호접몽〉

Led Zepplin 2021. 5. 7. 22:50

(고창 선운사 입구의 단풍숲에서)

  

   베란다의 천장에 빨래대를 설치하려 하자 필요한 공구가 생겨서 친구에게 빌려줄 것을 요청하였더니, 친구는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잠시 나와 내게 전달하고는 쏜살같이 일터로 돌아갔습니다. 그 친구는 절친 동창으로 현재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현직을 떠나고 난 후 평안하고 한가로운 일상, 요즘 백수들은 과로사한다던데 나는 그야말로 있는 것은 시간뿐 입니다. 시간에 쫓기고 일에 쫓기며 살아 온 날들이 현실이 아니었던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대체로 학업을 마친 후 더러는 휴직의 기간도 있지만(그 휴직의 기간에도 마음은 항상 쫓기는 것이 현실이죠) 일을 하여 생계도 해결하지만, 항상 내일이라는 알 수 없는 미래에 대비하여 일을 하며 살아갑니다.

 

나이가 들어 현직을 떠나 곰곰히 생각을 해보니, 우리 시대에 직장에 출근하여 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은 일 자체가 이미 존엄한 신앙의 대상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일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현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소속감과 함께 본인의 정체성을 부여합니다. 〈생계〉의 수단으로 부터 출발한 일에 대한 정의는 〈직업〉으로 시작하여 〈소명〉으로까지의 대변환을 이룸으로써 일의 신앙화는 완성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이 존엄한 변신을 통하여 우리들의 일(Job)은 마침내 현대인의 삶의 의미 그 자체가 되고야 말았습니다.

 

오래 전 사귄 내 친구중에는 지리산에 사는 사람이 둘 있습니다. 그 중 한 친구는 지리산 산촌 농가의 허름한 슬레이트집을 보증금 백만원 월세 십만원에 살고 있습니다. 그의 방안에는 가재도구라고 할만한 것들이 거의 없습니다. 가로 세로 1m 정도의 장롱이 전부이죠. 옷은 불과 서너벌로 일년 사철을 보냅니다. 그 외의 재산이라고는 주저앉기 일보 직전의 탱크 굴러가는 소리가 나는 50cc 오토바이가 전부입니다. 그래도 그의 얼굴에는 맑은 미소가 떠나지 않습니다. 나는 그보다 많이 갖고도 늘 상 웃지 못하는 내가 부끄럽습니다.

〈자루엔 쌀 석 되/ 화롯가엔 땔나무 한 단/ 밤비 부슬부슬 내리는 초막에서/ 두 다리 한가로이 뻗고 있네 --- 양관선사〉. 지리산 어느 작은 암자에 사는 스님의 좌우명과 같은 글입니다. 지극히 소박하고 단순한 표현이지만, 삶이 어떠해야 하는 가를 극명하게 표현해 주고 있는 말입니다.

 

주변에서, 우리는 하고 있는 일에서 일과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채 좌절하거나 갈등을 할 경우에는 덜 떨어진 못난 인간으로 평가받습니다. 열심히 지극정성으로 기도한다 한들 신을 만나는 영적 체험을 못 해본 사람이 받는 내적 갈등과 자괴감은 글과 말로 표현하기 어렵더군요. 마찬가지로 아무리 일을 뼈 빠지게 열심히 한다고 해도 일에서 삶의 의미와 행복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 역시 감당하기 어려운 자괴감에 빠집니다. 결국, 본인에게 주어진 일의 밖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본인의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인간/ 성실하지 못한 인간/ 배불러서 씨잘데읎는 망상에 빠진 인간으로 매도당합니다.

그러한 결과로, 일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다시 말해 돈을 벌었다던지 진급이 잘되어 임원급 또는 경영진까지 출세한 사람은 새로운 신앙의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마치 본향/ 친지/ 부모의 집을 떠나 부처와 예수를 만날만한 곳으로 떠난 석가모니와 아브라함처럼 와이프와 자식과 친구를 떠나 매일 직장으로 나가 충성으로 매진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스스로만의 소중한 시간을 위하여/ 가족과 친구와 보내는 행복한 시간을 위하여 일을 한다며 시작되었던 애초의 소신은 어느덧 사라지고 오히려, 일을 위해 자신과 가족 그리고 친구를 희생하는 어처구니없는 삶의 길을 본인도 모르게 가고 있는 겁니다. 〈바쁘다〉는 말은 일상용어이며 먹는 것 입는 것조차도 무관심인 결과로, 주말이면 쇼파를 끌어안고 초저녁이 될 때까정 비몽사몽을 헤매는 경우가 다반사이며 어떤 친구는 드물게 〈번아웃(burnout: 탈진)〉으로 응급실에 실려도 갑니다.

 

자신이 바라는 이루고저 하는 그 어떤 것을 위하여 신에게 간절히 기도하는 신앙인처럼 우리들은 삶의 의미를 나의 존재의 완벽함을 일에서 찾게 해달라고 간절히 간구하게 되었습니다. 기도에 끝이 없듯이 일하는 시간에도 끝이 없어서, 급기야 우리들의 노동 시간은 세계 최정상급의 위치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심각하게 여기기보다는 내심 자랑스러워하는 지경에까지 도달하였습니다. 이렇게 일이라는 신앙만을 일구월심 좆은 결과 얻어진 돈과 출세로 말미암아 우리는 과연 그 신앙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을런지요?

 

일이란, 여유 있게 쉬려고 즐기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나요? 계획보다 돈이 조금 더 부족하고 조금 덜 출세하면 안될까요? 일 자체를 삶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의 자리로 되돌릴 때, 우리는 일에서 재미있고 즐거울 수 있다고 봅니다. 원하는 것을 소유하고자 일을 하였던 젊은 날의 욕망까지도 나이가 들면 결단과 함께 내동댕이쳐야만 합니다. 아무도 내일의 일은 알 수 없는 것. 젊음임에도 내동댕이친 자에게는 박수를 보냅니다. 그 후회가 저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즐기지 못한 채 내일에만 매달려 오늘을 탕진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벚꽃도 일출도 노을도 부모님도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습니다.

 

5월이 되면 부모님에게 효도하고 형제들과 아들과 딸들에게 친밀하고 우애있으며 자신에게 충일한 인간이 될 수 있는 본래의 소박한 사람으로 돌아갑시다.

시인 〈천상병〉은 〈귀천〉에서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고 노래하였으며, 〈김만중〉은 그의 환몽소설 〈구운몽〉으로 부귀영화 또한 일장춘몽이라 적었고 〈장자〉의 〈호접몽(蝴蝶夢)〉 역시 인생은 하룻밤의 꿈 깨고 나면 한낱 꿈에 불과하니 욕심부리지 말고 살라는 뜻이라고 판단됩니다. 오늘, 노을이 아름다운 저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