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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의 추억

Led Zepplin 2022. 3. 2. 01:47

(명동칼국수)

 

  겨울이 끝나가는 무렵, 어중간한 기온으로 인하여 입맛이 사라진 이즈음 외할머니께서 만들어 주시던 따끈한 칼국수가 생각난다. 밀가루에 날콩가루를 대충 섞어 반죽하여 홍두깨로 민 다음 착착 접어 가늘게 쫑쫑 썰고 멸치국물에 듬성듬성 썬 감자를 넣고 한 번 끓인 후 송송 썬 애호박을 우르르 넣어 한소끔 끓이면 구수한 손칼국수가 만들어진다. 여기에 삭힌 매운 고추를 썰어 넣은 양념장을 듬뿍 얹어 뜨끈하게 먹고 뒤로 물러나 앉으면 천하의 진수성찬도 부럽지 않았던 거다.

 

나는 국수를 좋아한다. 건강진단의 결과로 매년 의사선생이 밀가루 음식과 술은 피하라고 눈에 힘을 줘가며 강권 하지만, 술과 국수를 뺀다면 나의 인생은 얼마나 무료하겠나. 술로 만취한 새벽녘 잠에서 깨어 밤에만 문을 여는 단골 국수집을 찾아가 구수하고 따끈한 멸치 국물의 국수에 적당히 익은 열무김치를 척척 걸치고 한 그릇 비워낸다면 속도 편하면서 그 신새벽도 그토록 아름답게 보일 지경이다. 더러는 내친 김에 양재동 꽃시장엘 달려가 좋아하는 장미 한 다발을 옆자리에 싣고 음악을 들으며 고속도로를 달려오는 즐거움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삶은 아름다웠다.

 

그 시절에 가난하지 못한(?) 예술가가 몇이나 되랴만은, 가난하고 외로웠으나 그 뜻이 높아서 고독했던 시인 ‘백석(白石/ 1912~1996)’에게는 〈산숙(山宿)〉이라는 작품이 있다. ‘여인숙이라도 국숫집이다/ 메밀가루 포대가 그득하니 쌓인 웃간은 들믄들믄 더웁기도 하다/ 나는 낡은 국수분틀과 가즈런히 나가 누워서/ 구석에 데굴데굴하는 목침들을 베여보며... 후략.’ 배고픈 민초들의 일상이 국수와 함께 존재했음을 짐작하게 하는 작품이다.

 

성북동 비스듬한 언덕 골목길에 있는 요정 ‘대연각’을 ‘법정’스님에게 보시하여 ‘길상사’라는 사찰로 거듭 태어나게 한 장본인인 기생 ‘진향(眞香)’과의 애절한 사랑 때문에 더욱 유명해진 ‘백석’선생은 여행 중 국숫집을 겸하는 어느 변방(邊方)의 허름한 여인숙(旅人宿)에 묵으시며 국수를 만드는 사람들과 함께 방바닥에 누워 때 묻은 목침을 벤 채 선생의 생각은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끝없는 국수 가닥처럼 그 방에 묵었을 수많은 군상들에 대한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시고 지은 듯하다.

 

‘해기사(海技士) 국가고시’를 응시하려고 경부선 야간열차를 타고 오르내리던 학창시절, 대전역에서 잠시 정차하던 짧은 시간 기차 바로 옆 노상의 사각형 간이매점에 붙어 서서 쏟아지는 잠 그 엉겹결에 후루룩거리며 들이마시듯 몰아넣던 따끈한 가락국수 더러는 기차가 출발해도 국수 그릇을 놓지 않은 채 두 젓가락 더 들여마시며 뛰어 기차에 오르던 밤기차의 가락국수 그 맛은 제대로 꿀맛이었다.

그러나, 그 가락국수의 꿀맛도 서울과 부산을 주파하는 ‘그레이하운드’라는 개가 크게 그려진 대형 고속버스가 생기면서 대전역 ‘대전 발 0시 50분’ 열차의 낭만과 가락국수의 추억은 사라지고 말았던 거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엎드려 공부만 하기에는 뜨겁게 끓어 터질 듯한 가슴을 주체하지 못한 친구들과 어울려 밤기차를 차표도 없이 몰래 타고(이 바닥의 전문용어로는 ‘때뽀차’) 전국무전여행이랍시고 싸돌아다니던 무렵에 주린 배를 참다못해 길가 ‘포장마차’에서 손바닥만할 뿐 아니라 일부러 찌그러트린 것만 같은 양은냄비에 담아주던 우동국수 두 그릇을 셋이서 ‘게 눈 감추듯’ 후루룩 나눠먹으며 그 부족함이 못내 아쉬워 가장 쩝쩝거리던 그 친구는 지금 의사선생님이 되었다. 급 그 친구가 보고 싶다.

 

예전엔 광화문에 ‘미리내 막국수’ 집이 있었다. 그 집 국수 맛에 반하여 여러 번 드나들었던 기억도 있다. 아직도 그 자리에 있을런지..

그러나, 나에게 국수의 오랜 추억은 명동성당 아래 골목의 ‘명동칼국수’이다. 뜨겁지만 쫄깃하면서 그 집만의 매운 김치 맛이 국수와 아주 잘 어울린다. 지금은 본점이라 불러지며 일본인과 중국인 손님이 많지만 고등학생 시절부터 내가 수십년을 드나들었으니 내 나름 단골집이라 하겠다. 그 집에서 함께 국수를 먹었던 여러 명의 친구들이 떠오른다. 젊은 시절, 명동에는 내가 좋아하는 국수와 더불어 술과 음악으로 즐겁게 지냈으니 명동의 추억은 내 인생 젊음의 추억이다.

 

국수는 예로부터 장수를 기원하거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잔칫상에 빠질 수 없는 행복한 음식이며 고달팠던 그 시절, 간단하고 빠르게 먹을 수 있는 우리들의 서민 음식이다. 이처럼 국수는 우리들에게 추억의 음식이며 삶의 희로애락이 두루두루 정겹고 안타까울 만큼의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음식이다.

돌아보면, 문화(文化)와 사회(社會)를 이루는 힘이야말로 국수처럼 가늘고 끈질긴 사소한 것들로 부터의 출발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정신과 그 영혼은 수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대를 이어 그 DNA에 유전해 내려간다. ‘백석’선생께서 국수에 애착을 보인 이유 또한 사소하지만 우리의 민초들이 갖고 있는 바로 그 가늘고 긴 생명력 때문이라 생각해 본다는 거다.

 

예년보다는 덜 추웠다 하지만 아직도 꽃샘추위를 앞 둔 대문 앞에는, 이미 봄이 망설이며 조바심을 내고 있다. 말로 다하기 어려운 서정(抒情)으로 가득한 이 늦은 겨울에, 무정한 세월에 몸을 맡기는 저 바람처럼 눈 내린 산야의 들길을 따라 표표히 걸으며 문득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다. 그 떠나온 길목 어느 해 저무는 길가 마을의 국수집에서 국수 삶는 구수한 냄새를 따라 한 움큼 주린 배를 채운다면 고단한 나그네는 행복한 미소를 떠올리며 따뜻한 잠자리를 찾아들 것이다.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을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 이상국/ 국수가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