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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펀 러닝

오후 다섯 시 무렵 벌건 대낮이 한풀 죽어 아직은 서늘함이 깃들기 전, ‘이모집’에는 늘 그 얼굴이 그 얼굴인 오랜 안면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순철이가 합성수지로 만든 지 벌써 삼십 년은 됐을 법한 오래되어 기름이 잘잘 흐르는 늙은 발을 들치고 들어서며 타박을 늘어놓는군요. “아니, 꼭 자기 집 앞이라고 혀서 자기 차만 대라는 법이 있는 거냐고. 지나가던 사람도 댈 수 있는 거고.. 누구든 간에 빈자리가 있어서 댈만 하면 댈 수도 있는 거 아녀? 촌놈들이 더 하다니께...” 30여 분 전에 먼저 와서 이미 이슬이 한 병을 까서 털어 넣고 있던 나와 광수가 반가움에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내 말이 그 말이여. 요 옆집 슈퍼 그 슈퍼 쥔 놈이 차 댔다고 뭐라 허지? 하~, 그 놈 참 진상이라니께..

카테고리 없음 2021.10.02

일상의 주문 하나, 쫌쫌따리

그 시대에 통용되는 언어에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화와 가치관이 반영되기 마련인데, 기성세대인 우리와 달리 MZ세대 그들의 신조어를 들어보면 그들이 어떤 가치관과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우리는 난해하기만 하다. 사투리인지 외계어인지 알기 어려운 디지털 시대의 주역 이른바 MZ세대 그들의 신조어 몇 개를 우선 나열해 보자. ‘뷰세권’이란 좋은 전망을 볼 수 있는 곳을 말하며, ‘병세권’은 병원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곳 그리고 ‘몰세권’은 대형 쇼핑몰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곳을 뜻한다는 거다. ‘별세권’은 스타벅스가 인근에 있는 곳이며, ‘주세권’ 퇴근 후 술 한잔하기 좋은 곳이고 ‘초품아’는 초등학교를 품고 있는 아파트란다. 그래도 이 정도까지는 이해가 간다. '갑통알'이란 단어의 뜻은, ..

카테고리 없음 2021.08.26

냉면 이야기

나는 여름이면 냉면을 즐겨 먹는다. 남자들은 그중에 대개 물냉면을 좋아한다. 대장암의 수술과 속이 냉하여 위가 약하다는 건강진단의 결과로 의사는 면 종류의 음식과 술을 피하라 하지만, 술과 냉면(국수)을 뺀다면 나머지 나의 인생은 얼마나 밋밋하겠나. ‘냉면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으로 ‘차갑게 식힌 국물에 국수를 말아서 만든 음식’이라지만,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무식의 소치일 뿐이며 냉면이란 자고로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은 것이 냉면의 독특함이다. 육수를 어떻게 우려냈느냐에 따라서 또한 면의 성분과 함량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그리고 그 고명의 구성이 무엇무엇이냐에 따라서 냉면의 맛은 천양지차를 이룬다. 조선말 ‘고종황제’께서는 시원한 동치미 국물에 사리를 말아 편육과 배/ 잣 등을 올려 날마다 먹었다고..

카테고리 없음 2021.08.11

목마(木馬)의 노래

국민학교 6학년 여름방학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숙제를 하고 있었는데 일찍 귀가하신 아버지는 내 손목을 잡으시고 집을 나선 거다. 아버지와 함께 인사동 골목길을 돌아 얼마를 걷자 이웃 동네의 어느 집 앞에 서시더니 그 집 문을 두드리셨다. 잠시 후, 내 또래의 아이가 나와서 누구시냐고 묻자 아버지는 아이를 빤히 바라보시더니 “너희 선생님이 지금 계시느냐?”고 물으시는 거였다. 소녀가 그렇다는 대답을 하자 아버지는 약속한 어른이 찾아왔다고 전하라 하자 곧이어 대학생 또래의 여자가 허겁지겁 달려 나와 아버지 앞에 두 손을 모두고 공손히 인사를 하는 거였다. 아버지는 “이미 전달된 이야기대로 아이를 데려왔으니, 오늘부터 잘 부탁드립니다.” 하며 나를 건네시고는 정작 나에게는 가타부타 말씀도 없으신 채로 뒤돌아..

카테고리 없음 2021.08.11

샹그릴라 가는 길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는 인간의 이상향을 표현하는 말에는 ‘유토피아(utopia)’라는 말이 있다. ‘유토피아’는 현실적으로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인간의 이상향을 가리키는 말로써 영국 작가이자 정치가인 토머스 모어가 1516년 만든 단어이다. 그 이후, ‘샹그릴라(Shangri-La)’는 영국의 소설가 ‘제임스 힐튼’이 쓴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 1933)이라는 작품에 나오는 가공의 장소이며 소설 속에서 ‘샹그릴라’는 티베트 쿤룬산맥(崑崙山脈)1) 어딘가에 있는 라마교 사원 공동체로써 행복과 평화의 신비스러운 이상향으로 묘사되고 있다. 극도의 피로와 기억상실증 때문에 병원에 있는 ‘콘웨이(Hugh Conway)’가 차츰 되살아나는 기억을 더듬어가며 이야기하는 그의 체험담이 이..

카테고리 없음 2021.0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