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산에 오르다
꽃 질 때 널 잃고도 나는 살아남아
은사시나무 잎사귀처럼 가늘게 떨면서
쓸쓸함이 다른 쓸쓸함을 알아볼 때까지
헐한 내 저녁이 백년처럼 길었다 오늘은
누가 내 속에서 찌륵찌륵 울고 있다
마음이 궁벽해서 새벽을 불렀으나 새벽이
새, 벽이 될 때도 없지 않았다. 그럴 때
사랑은 만인의 눈을 뜨게 한 한 사람의
눈먼 자를 생각한다 누가 다른 사람
나만큼 사랑한 적 있나 누가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 있나 말해봐라
무표 한장 붙여서 부친 적 있나
------ '우표 한 장 붙여서'중에서 ( 천양희 /1942년 )
응달편에 속한 '석상암'은 눈에 갇히고...
'마이재'까지도 발목이 푹푹 빠지는 눈밭이다.
안개속으로 멀리 서해바다가 보이고...
자연이 만들어 준 아기자기한 선물, 작은 소나무들이 연출한 소나무 터널이다.
험준하고도 장엄한 바위산 한켠으로 위태위태하게도 도솔천 내원궁이 조그마하게 슬아슬아 자리잡고 있다.
엄청난 자연의 힘이 몰려있는 바위산 선운산, 그 정수리에 해당하는 부분에 자리잡은 내원궁... 저 곳이 바로 극락정토...
불심의 정중앙에 해당하는 곳일 터...
'선운사'가 거느린 암자중에 가장 유명한 '도솔암'이 아름답게 내려다 보인다.
선운사 도솔암의 마애불이다.
고려시대에 조각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마애석 미륵불.
올려다 보려면 고개가 한껏 젖혀져야만 한다.
명치끝에는 어느 스님이 '비결록'을 넣어 두었다는 석실이 있는데...
조선말 전라도 관찰사 이서구가 감실을 열자, 뇌성과 풍우가 불현듯 일어 서둘러 감실을 닫았는데...
책 첫 머리에 "전라감사 이서구가 열어 본다"고 써 있었으며,
이 '비결록'은 19세기말 동학의 접주 손화중이 가져 갔다고...
절벽끝에 매달린 '내원궁'에 오르는 길은 108개의 가파른 계단이며, 지상에서 극락으로 오르는 길이다.
지난 가을, 그토록 화려하고 아름답게 선운사 도솔천을 수 놓았던 꽃잎같은 단풍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져 갔단 말인가...
그야말로 일장추몽(一場秋夢)이련가...
겨울에 바라보는 대웅전의 현판과 단청은 문자향(文字香)과 선기(禪氣)를 느끼게 해준다.
모든 추억을 깊숙히 끌어 안은 채 도솔천은 깊은 겨울잠에 빠져 있다.
봄이 오면, 비록 낡고 아픈 추억일지라도 다시 그 추억들을 순수하고 신선한 모습으로 새록새록 보여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