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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의 대가 소치(小癡) 허련(許鍊)

Led Zepplin 2009. 4. 28. 21:31

 

 

  조선 말엽 한국화의 대가인 소치(小癡) 허련(許鍊) 선생(1808~1892)은 전남 진도에서 출생하였으며...

허련의 선대들이 한양에서 화려한 관력과 명성을 누렸지만 선대조인 허대(許垈/ 1568~1662)께서는...

조선 선조의 서자라고는 하지만 왕위 계승 서열 첫째였던 임해군이 아우 광해군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기고 역모죄로 몰려 진도로 유배 당하여 머물 즈음에...         

본인(허련의 선대조인 허대)이 임해군의 처조카로서, 가솔을 모두 데리고 내려가 그대로 진도에 정착하게 된 연유로 진도에서 탄생하게 되었던 거다.                    

유배지로 이름난 진도로 이주한 양천(陽川) 허씨 가문은, 점차적으로 몰락하여 허련 선생이 태어날 무렵엔 평민과 다름없는 집안이 되었다.                           

그러나, 허련 선생은 비록 집안은 몰락하였으되 가문의 가풍을 잊지않도록 인문적 수련과 한문을 훈육받았다.

당시의 진도는 유명한 유배지로서 조선의 수 많은 쟁쟁한 문신들이 유배되었는데...               

궁벽한 곳일지라도 선비들은 '유배지 문화'를 꽃 피웠던 곳이다.

  

허련 선생은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였지만...

제대로 된 교재나 스승도 없이 혼자 '오륜행실도'등을 모사하는 것이 그림 공부의 전부였다.

그러나, 28살에 우연히 대흥사에 머물던 초의선사 의순(草衣禪師 意恂/ 1786 ~ 1866 )을 만나...

허련의 재주를 알아본 선사의 배려로 그림공부를 하였으며...

해남의 녹우당(綠雨堂)엘 찾아가 공재 윤두서(尹斗緖)의 후손인 윤종민을 만나 '공재화첩'을 빌리게 되어 화첩의 모사를 통한 그림공부를 하게 된다.

물론, 가문의 보물인 선대의 화첩을 빌려준 것은 당대의 선지식인 초의선사의 소개와 보증이 있었기 때문일 터...

허련 선생이 32살 무렵에...

초의선사는 허련의 그림을 가져다가 한양에 있는 추사 김정희에게 보여준다.

그림을 구경한 추사선생은 허련의 솜씨를 칭찬하였으며 허련을 한양으로 상경시킨다.

허련은 한양 장동에 있는 추사 김정희의 저택인 월성위궁(月城尉宮)에서...

김정희 문하의 여러 문인화가들과 본격적인 서화수업을 시작하게 된 거다.

그 일로 인하여, 허련은 궁벽한 유배지의 화가지망생에서 최고의 환경속에 체계적인 공부를 하게되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소치가 추사 밑에서 수업한지 5개월여만에...

추사는 외척들의 권력다툼으로 인하여 제주도에 유배되는 비운을 맞는다.

 

아직 얼음이 채 녹지않은 이듬해(소치의 나이 34세) 2월, 소치는 노련한 사공도 물길을 꺼린다는 험난한 바다를 건너 제주도 귀양처로 추사를 찾게 되는데...      

소치는 뒤에 그의 자서전에서 "삶과 죽음이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운명을 하늘에 맡겼다"고 술회한다.                                                                                       

추사를 찾은 관계로 나중 더 험한 권력다툼의 와중에 휩쓸릴런지도 모를 위험을 무릅쓰고 세차례(34/ 36/ 40세)나 바다를 건너...                                                 

스승의 유배지까지 쫒아가 시봉하며 배우기를 멈추지 않았던 허련의 스승에 대한 충심에서 우러난 존경과 예술에의 집념은 놀랍다고 하겠다...                            

스승인 김정희가 고독한 섬 제주로 유배되었다는 것은, 인간은 고독할수록 그 깨달음이 명징했을터이니...                                                                                

제자인 허련에게 있어서는 어쩌면 스승에게서 학문의 진수를 전수받을 수 잇는 절호의 기회가 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추사에게서 수업을 받으면서 허련은 본격적으로 글과 그림에 눈을 뜨며 일취월장의 실력을 보인다.

 

소치 허련은 바다를 건너 제주의 위리(圍籬/ 탱자나무 울타리)안에서 추사와 함께 그림을 그리고, 시를 읊고, 스승으로 부터 글씨를 배웠다.                                

스승 김정희는 허련에게 학문과 화법을 훈육하고 전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중요 가문들에게 소개하여 허련의 후원자가 될 수 잇도록 알선하였던 거다.                                     

허련은 김정희의 지도로 30대 중반에 이미 '예황법(중국 남종화의 대가인 예찬과 황공망의 화법을 믹싱한 화법)'을 확립하였으며...                                            

스승으로 부터 전수받은 간결한 필법을 기본으로 거친 듯 연하게 푸른 담청을 구사하여 겸허하면서도 진솔한 화법으로 평생의 화풍을 유지하였다.                        

허련의 호 소치(小癡)는, 추사로 부터 받았으며 당의 대화가 황공망의 호 대치(大癡)에서 따온 것으로...                                                                                

스승 김정희가 허련이 가야할 길을 이미 제시하였다.                                   

소치 허련은 가히 김정희의 수 많은 제자중에서 회화분야에서 가장 인정받은 수제자라 할 수 있다.

 

제주를 오가며 학문과 화법을 연마하던 허련의 나이 40세 되던 해...

 

신관호의 집에 머물며 헌종이 훈련대장을 시켜 내린 당선이나 선첩에 그림을 그려 헌종께 바쳤는데...

그림을 보신 헌종은 소치를 이듬해 정월 궁으로 들게 했다.

헌종은 소치를 반갑게 맞아들인 뒤 좌우에 대립(待立)한 별관들에게 먹을 갈 게 한 뒤 친히 양털붓 한 자루를 내어주시면서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                           

소치는 당선(唐扇)에 매화를 치고 "향기는 꽃술에도 없고 꽃받침에도 없으니, 뼈속에 사무치는 이 향기 받치오니 님이 감상하소서"라고 화제를 달았다.                   

헌종은 소치와 무릎을 맞댈 듯 앉은채 소동파(蘇東坡)의 진품(眞品) 책첩(冊帖) 끝에 고목과 괴석을 그리게 하는가 하면...                                                        

황공망 대치(大癡)의 두루마리 산수를 마주잡아 펴 감상하기도 했다.               

또 제주로 유배된 추사가 지내는 환경이나 대선사 초의에 대한 이야기, 진도의 민속 따위 등 여러가지를 하문하신 뒤...                                                            

어필(御筆)로 제독(題篤)하고 어장(御障)을 누른 시법입문(詩法入門) 4권(남농 소장)을 직접 하사하셨던 거다.                                                                       

소치는 그후 네차례나 더 입궐하여 고화를 품평하고 수많은 화첩에 그림을 그려 바쳤으나, 그 해 헌종이 23세의 아까운 나이로 승하하시게 되자...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표표(漂漂)히 떠돌다 49세 되던 해(철종 9년) 진도로 내려와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세운 뒤 진도에 칩거(蟄居)했다.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券氣)를 바탕으로 한 학문과 예술의 일치로 불리워 마땅한 문인화(文人畵)는...

 

한자문화권 미학의 총체이며 예술관(藝術觀)으로서, 시대를 초월한 고전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정희가 평생을 두고 추구한 문인화는, 고도의 철학과 학문적 깊이 그리고 감상안을 지닌 사람만이 제대로 음미할 수 있는 절대적 이념미의 세계로서...

당대와 후대에 이어 현대에 이르는 지금까지 압도적인 미학의 세계를 발현하고 있다.

선생이 추구한 예술철학이란, 현실에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이룰 수 없을지라도 이상을 향하여 끊임없이 완성(完成)을 지향해야만 한다는 거다.

그러한 총체적 학문과 예술의 의미에서 허련은 일생을 통하여 전통 문인화의 높은 이상을 향하여 멀고도 고단한 구도(求道)에 매진하였으며...

김정희의 뒤를 이어 스승의 예술론을 충실히 추종하였던 거다.

  ( 바라보는 순간, 충격과 같은 탄복을 받았지만... 촬영 솜씨의 부재로 인하여 송구하게도 전달력이 태부족이지만...

  진실로 예술의 경지를 보여주는 추사 김정희 선생께서 초의선사에게 보낸 - 재능이 있는 허련을 하루빨리 올려 보내 달라는 내용이 담긴 - 친필서간 )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선생이야말로, 19세기 예술사의 성격을 규정짓는데 그 중심에 있는 금석학(金石學)의 대가이며...

문인화가로서 글씨세계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파천황(破天荒)의 신세계를 열었던 예술가인 거다.

유불선 모두에 조예를 지니고 시대를 앞서 미래를 준비한 해박한 선지식인으로서 입문하는 소치에게 아래와 같이 당부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그림을 배우려면 곧 공재(윤두서)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네... 그러나, 신운(神韻)의 경지는 결핍되었네...

전겸재(정선), 심현재(심사정)가 모두 이름을 떨치고 잇지만, 화첩에 전하는 것은 한갓 안목만 어지럽힐 뿐이니 결코 들춰보지 말게..."

대가 윤두서의 그림도 신운이 결핍되었다고 하며, 문인화의 거두인 두 사람마져 이처럼 혹평받았던 거다.

 

소치는 동학란이 발발하기 전인 1893년(고종 30년) 여든여덟의 나이로 장서(長逝/ 오래 살다 죽음)까지 임금이 쓰는 벼루에 먹을 갈아 그림을 그렸고...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숱한 권문세가와 스승이었던 추사(秋史) 김정희, 초의대사(草衣大師) 등과 어울리면서...                                                                       

조선 말기를 풍미했던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의 대가이다.                                  

흔히 소치를 일컬어 시(詩) 서(書) 화(畵)의 삼절(三絶)이라 부르거니와...                     

일찍이 추사 김정희는, 소치를 일러 "압수이동(押水 -압록강- 以東)에는 소치를 따를 자가 없다"고 신헌(1810~1884)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으며...                         

당대 제일가는 시인이었던 유산(酉山) 정학연(다산 정약용의 아들)은...         

"속계(俗界)를 초월한 자품(資稟)이 있는 뒤에야 그림의 삼매(三昧)에 들어갈 수 있는데, 이 세계에 이른 것은 소치 한사람 뿐이다." 라고 잘라 말하였다.

소치 허련의 아들인 미산 허형(許瀅)과 의제 허백련, '남농산수'라는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한 남농 허건(許楗)...                                                                     

미산의 네째 아들로서 요절한 천재화가 임인(林人) 허림(許林) 등이 경지를 이루었으며...    

손(孫)인 임전(林田) 허문(許文)과 운림산방 5대 주인인 허진(許鎭)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그의 화풍에 뿌리를 둔 수많은 가지들은 소치 허련이 49의 나이에 설립한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정신적 고향으로... 

전남은 물론 서울 등 경향각지에서 정력적인 작품활동을 함으로써...                              

양인(洋人)들의 그림을 그리는 서양화가들을 제외한, 한국화(韓國畵)로서의 한국 화단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은 그 본질을 이룬다 하겠다.                             

삼가, 추상같은 구도정신으로 화풍과 필력을 개척하고 그 고단한 사상을 평생토록 유지, 계승한 선인들의 숭고한 정신에 고개숙여 무한한 감사와 존경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