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속으로
일기예보는 빗나갔다.
어스름 새벽녘에 출발한 여정의 고속도로는 비가 오시겠다는 예보탓인지 별로 붐비지 않았고...
날씨는 더위를 피할만큼 선선했다.
휴게소에서 심심한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으로 목을 축이고 내친 김에 둔내까지 한달음에 내달렸다.
벌써 20년 넘게 단골이 된 강원도 진부면의 '부일가든'은 영동고속도로를 넘나들며 출장을 다니던 30대 초반부터 즐겨찾던 식당이다.
톨게이트 인근이라 드나들기가 쉽고..
언제가봐도 수도권과는 다른 넓직한 주차장도 마음 편하고...
강원도 특유의 꺼먹된장으로 끓여내오는 된장찌게가 시원한 맛으로 일미이며...
직접 만드는 손두부도 촌두부 맛이 제대로이다.
주방의 나물삶는 솥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과 함께 풍겨나오는 내음새도 정겹고 편안하다.
발자욱을 봅니다 발자욱을 봅니다 모래위에 뚜렷한 발자욱을 봅니다 어느날 벗님이 밟고간 자욱 못뵈올 벗님이 밟고 간 자욱 혹시나 벗님은 이 발자욱 다시금 밟으며 돌아 오려나 님이야 이길로 올 수 없건만 님이야 정녕코 돌아온단들 바람이 모래를 물결로 스쳐 옛날의 자욱을 어이 찾으리 발자욱을 봅니다 발자욱을 봅니다 바닷가에 조그만 발자욱을 봅니다. ----- 무애 양동주 / 別後 1924 |
선창(船艙)...
죽변항의 선창은 갈매기와 어촌의 주부들로 분주하다.
죽변항 앞바다에서 잡히는 펄덕이는 생선을 파는 단골집 아주머니가 오랫만이라며 수줍게 웃는다.
미국에 그랜드캐년이 있다면, 금수강산 대한민국에는 불영계곡이 있다.
불영계곡은 총길이가 15키로에 달하는 장대한 계곡이다.
자동차가 달리기에도 위태위태한 계곡길은 겨울에는 정말 위험하다.
그런 스릴을 맛보며 나는 계곡 물가에 있는 한옥집을 구하여 1년여간 아무 생각없이 빈둥거리며 살다 온 추억이 있다.
계곡 곳곳에는 길이 50 미터 이상의 장대한 붉은소나무가 많다.
더러 산속을 다니다 보면 산양의 똥도 자주 보게되고...
늦게 귀가하는 밤에는 고라니가 신작로 길가에서 멀뚱거리며 나를 바라보는 풍경은 흔하다.
울진의 불영사 주차장을 벗어난 철마는 심산유곡의 천연휴양림 통고산 능선을 구비구비 돌고돌아 내리막길을 질주하여 봉화를 가로질러 가을속으로 내달린다.
청량산 육육봉을 아는 이, 나와 백구(白鷗)
백구야 훤사(喧辭)하랴,못 믿을 손 도화(桃花)로다.
도화야 뜨지 마라, 어주자(魚舟子)알까 하노라
------ 퇴계 이황
산문을 지나 청량사(淸凉寺)를 오르는 길은 가파르다.
언젠가부터 입소문을 듣고 유유자적으로 사찰을 찾아 나선 나그네는 속옷까지 흠쩍 젖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른 길가에 서 있는 한 그루 온통 핏빛 단풍나무는...
세세대대(世世代代)로 가파른 이 길을 찾아온 기도자와 순례자들의 깊은 한(恨)과 갈망을 대변하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남민이라는 거사의 집에 어느 날, 뿔이 셋이나 달린 송아지가 태어나 자라서
몇달 동안에 낙타 만큼 덩치가 커지고 힘이 세고 사나웠다.
마침 소문을 들은 스님이 부탁을 하자, 시주로 내 놓았다.
송아지는 절에 오자 순해 졌으며 힘이 장사인지라 청량사의 가파른 산등성이에서
힘든 불사에 많은 노고를 바쳤는데...
송아지는 기운이 모두 소진됐는지 안타깝게도 그만 죽게되어 대웅전 앞에 묻어주었다.
얼마후, 송아지의 무덤위엔 가지가 셋이나 난 소나무가 크게 자라기 시작 했는데...
그래서 위에 보이는 큰 소나무를 '세뿔 송아지 무덤'이라고 부른다.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꽃이 필까 잎이 질까
아무도 모르는 세계의 저 쪽 아득한
어느 먼 세계의 눈소식이라도 들릴까...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저녁연기 가늘게 피어오르는 청량의 산사에 밤이 올까
창호문에 그림자 고요히 어른거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