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예찬(禮讚)
T.S.엘리어트가 노래한 ‘4월은 잔인한 달’은 패러독스(Paradox)의 전형(典型)이다.
고월(古月) 이장희(李章熙)는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서 봄의 향기를 맡았으며...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런 고양이의 눈에서 미친 봄의 불길을 보았던 거다.
황사가 휩쓸고 지나간 산야에는 바야흐로 진달래, 개나리, 매화의 꽃망울 터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봄의 전령 진달래꽃은, 개나리와 함께 한국의 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꽃으로...
북으로 백두에서 부터 남으로 한라에 이르기 까지 우리나라 어디에서든지...
개나리가 들녘을 노랗게 수놓을 때 진달래꽃은 산과 계곡을 온화한 컬러로 붉게 물들인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고 어금니 깨물고 노래한 소월의 꽃보다는...
“수줍어 수줍어 다 못 타는 연분홍이/ 부끄러 부끄러 바위틈에 숨어 피다”의 노산선생의 꽃이 더 진달래꽃답다.
봄꽃의 대명사인 진달래도 좋지만, 일시에 만화(滿花)했다가 일시에 져버리는 벚꽃 또한 봄꽃으로 더할 수 없이 아름답다.
“벚꽃 그늘 아래 잠시 생애를 벗어 놓아보렴/ 입던 옷 신던 신발 벗어놓고/ 누구의 아비 누구의 남편도 벗어놓고/
햇살처럼 쨍쨍한 맨몸으로 앉아보렴/ 직업도 이름도 벗어놓고/ 본적도 주소도 벗어놓고/
구름처럼 하얗게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그러면 늘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 저당 잡힌 내일이/
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노래한 이기철 시인처럼...
나를 내려놓고 벚꽃 그늘에 앉으면 사람도 세상도 모두 꽃처럼 눈처럼 아름답다.
한 때 벚꽃이 일본의 꽃이라고 잘 못 알려진 적도 있었지만.. 일본에는 국화(國花)가 없으며, 일본 왕실의 문양(文樣)인 꽃이 국화(菊花)일 뿐이다.
아름다운 벚꽃중의 으뜸은 왕벚꽃인데, 제주의 한라산이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원산지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꽃이 잎보다 먼저 피는 벚꽃은 낮에는 햇살을 받아 화사하게 빛을 내어 기쁨을 주고...
조명이 있는 밤에는 어둠에도 지지 않는 농밀한 향기와 색깔을 내뿜으며 주위를 유혹하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바람이라도 불어준다면 눈이 내리듯 난분분 흩날리는 꽃잎에는 그야말로 경탄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다.
벚꽃은 잠깐이다. 피는가 싶으면 어느덧 지고 만다.
이처럼 꽃도 청춘도 언젠가 그 때가 오면 아쉽지만 보내야만 한다는 거다.
그런 연유로, 벚꽃 속에 얽힌 추억은 더욱 생생하고 안타깝다.
이형기(李炯基)의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의 낙화(落花)는...
슬프지만 떠나야만 하는 아름다운 청춘을 상징하는 그 절정이다.
낙화(落花)는 그래서 더욱 비장하다.
한하운(韓何雲)은 답화귀(踏花歸)에서 “꽃이 지네 꽃이 지네/ 뉘 사랑의 이별인가 이 밤에 남몰래 떠나시는가/
꽃 지는 밤 꽃을 밟고 옛날을 다시 걸어/ 꽃길로 꽃을 밟고 나는 돌아가네”라고 노래했으며...
당의 시인 유희이(劉希夷)는 “금년에 꽃이 지면 그만큼 얼굴빛 변하리니(今年花落顔色改)/
내년에 꽃이 피면 누가 남아 있겠나(明年花開復誰在)/ 늘푸른 소나무도 베어져 장작이 되고(已見松柏摧爲薪)/
뽕밭은 변하여 바다가 된다고 들었네(更聞桑田變成海)/ 해마다 피고지는 꽃들은 비슷하지만(年年歲歲花相似)/
해마다 구경하는 사람들은 같지 않다네(歲歲年年人不同).”라고 노래하여 인생의 허무함을 탓하였다.
이처럼 피었다 진 꽃은 내년에도 다시 돌아오련만 한 번 떠나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오늘도 숙취(宿醉)는 몇 장 지전(紙錢)속에서 구겨지고 있는데...
세숫대야 속에 삶은 달걀처럼 잠긴 얼굴위로 꽃잎이 떨어져 물들고 있다.
아, 눈처럼 난분분 흩내린 벚꽃잎을 즈려밟은 채...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었던 얄궂은 추억을 뒤로 하고...
봄날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