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이 전하는 말
낙엽 지는 소리와 함께 다시 찾아 온 계절 가을...
대지와 하늘 그 사이에 깊은 늪과 같은 공간이 생겨나는 것처럼 느껴지고, 먼지와 모래로 꾸며진 거푸집처럼 푸석하게 무너져버린 허무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나의 계절병이다. 바람 한 줌에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광경을 외면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가을이며, 창 밖을 바라보다가 그 풍경에 빠져 문득 멍~ 해 지도록 하는 것도 가을이다. 금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샛노랗게 부서지던 황금들판은 이제 늙어만 가는 나의 텅 빈 가슴처럼 허전하며, 소슬하니 불어주는 바람이 뼛속을 에이는 듯한 이런 느낌도 이만큼 나이 들었으면 무뎌질 만도 하건만.. 삶이 가을이 하도 외롭다 하여도 한 줄기 떠도는 바람으로 살고 싶다고 다짐하며, 내게 주어졌던 슬픔도 기쁨마져도 떠나가는 가을처럼 아무 것도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람이 지나가며 시리게 가슴을 때리고 지나간다. 오늘도 무심하게 흘러가는 가을, 오래된 추억의 달콤함도 슬픈 사랑의 비밀도 포장마차 쓴 소주 한 잔에 털어 마시고 낙엽이 전하는 말에 귀 기울여본다.
시(詩)
가라, 어느덧 황혼이다
살아 있음도 살아 있지 않음도 이제는 용서할 때
구름이여, 지우다 만 어느 창백한 생애여
서럽지않구나 어차피 우린
잠시 늦게 타다 푸시시 꺼질
몇 점 노을이었다
이제는 남은 햇빛 두어 폭마저
밤의 굵은 타래에 참혹히 감겨들고
곧 어둠 뒤편에선 스산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우리는 그리고 차가운 풀 섶 위에
맑은 눈물 몇 잎을 뿌리면서 落下 하리라
그래도 바람은 불고 어둠 속에서
밤이슬 몇 알을 낚고 있는 흰 꽃들의 흔들림!
가라, 구름이여,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해
이제는 어둠 속에서 빈 몸으로 일어서야 할 때
그 후에 별이 지고 세상에 새벽이 뜨면
아아,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 우리는
서로 등을 떠밀며 피어오르는 맑은 안개더미 속에 있다 .
----- 기형도 /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
역(驛)
그리움이 추억처럼 기다리고 있는 시골 역...
아무도 없는 시골 간이역의 플랫홈 시멘트 바닥의 을씬년스러움을 황금색 융단으로 가득 메워 외로움을 달래주는 은행나무잎들의 흐드러진 잔치는 차분하지만 다정스럽다. 고향을 찾아가는 누군가에겐 사무치게 그리웠던 풍경일수도 있으며, 만남의 기쁨과 이별의 아쉬움으로 서로 손을 부여잡았을 그 모습들이 아련한 벤취에는 쓸쓸함만이 정적으로 흐르고 있다. 아직도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러나, 해질 무렵의 우리는 진정 돌아갈 곳이 있기나 한 것인지... 뒤돌아볼 시간도 없이 빠르게 흘러가는 우리들의 일상속에서 추억이라는 수많은 인생의 정거장에는 과연 어느 누가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예전의 영예를 자랑하듯 이제는 낡아버린 길게 늘어선 텅 빈 플랫홈을 망연히 바라보면 금방이라도 느릿느릿 뒤뚱거리며 달려올 것만 같은 열차는 아무리 기다려도 더 이상 오지 않는데.. 끝이 어디인지 모르는 긴 철로는 세월의 야속함을 묵언으로 항변하는 듯 하건만 왠지 나도 모르게 그 철로를 따라 끝없이 끝도 없이 걷고만 싶어진다. 멀어지는 철길 따라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지나간 사랑의 풍경들도 이 가을엔 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바다(海)
창 밖, 바삭거리도록 마른 잎들이 매달린 나뭇가지 사이에 걸린 달이 창백하게 떨고 있습니다. 달빛과 그 나뭇가지 사이의 어둠속으로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경적소리에 깜짝놀라며 높은 소리로 울면서 날아오릅니다. 문득, 부서지는 파도소리가 잠을 이루지 못하게 했던 죽변항 바닷가 그 민박집이 생각납니다. 그 허름한 민박집에서 당신의 몸을 생각하는 일은 아주 참담합니다. 그래서 당신의 그 화창하도록 경쾌한 웃음은 더욱 슬펐던 기억입니다.
한 때는 당신의 몸속에서 탁류의 만경강에 몰려 들어오던 들물을 떠올리기도 했으며, 비온 뒤 산하에 걸려있던 안개가 천천히 흐르고 더러는 달빛 속에서 끼륵거리며 기러기도 지나가고, 청명한 신새벽 숲속에서 맡았던 그 향기로운 솔내음도 있었더이다. 신성리 갈대밭의 눈부신 흐느낌과 금강하구둑에 까맣게 내려앉으며 명멸하며 번득이던 수많은 비늘의 새 그리고 새떼들...
모두들 떠나고 달빛마져도 이처럼 고운 밤. 부는 바람에도 슬픔을 참고, 제가 누군가의 이름으로 당신을 부른다면.. 당신도 더러는 나를 기억해 주시겠나요... 그 언젠가의 저녁처럼 바람이 불던 바닷가 방파제, 멀리서 명멸하던 불빛들을 바라보며 아름다웠던 그 바닷가를 추억하면서 말입니다.
고운 밤 보내시옵소서. 당신의 평온하고 달콤한 꿈을 위하여.. 흘러간 아름다웠던 우리들의 추억으로 상처난 아픔의 울음을 참으며 떨리는 손으로 당신 곁에 은은하고 따스한 촛불 하나를 두 손 받쳐 올리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