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아홉다리의 추억
포장술집에는 두 꾼이, 멀리 뒷산에는 단풍 쓴 나무들이 가을비에 흔들린다 흔들려, 흔들릴 때마다 한 잔씩, 도무지 취하지 않는 막걸리에서 막걸리로, 소주에서 소주로 한 얼굴을 더 쓰고 다시 소주로, 꾼 옆에는 반쯤 죽은 주모가 살아 있는 참새를 굽고 있다 한 놈은 너고 한 놈은 나다, 접시 위에 차례로 놓이는 날개를 씹으며, 꾼 옆에도 꾼이 판 없이 떠도는 마음에 또 한 잔, 젖은 담배에 몇 번이나 성냥불을 댕긴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포장 사이로 나간 길은 빗속에 흐늘흐늘 이리저리 풀리고, 풀린 꾼들은 빈 술병에도 얽히며 술집 밖으로 사라진다 가뭇한 연기처럼, 사라져야 별수없이, 다만 다 같이 풀리는 기쁨, 멀리 뒷산에는 문득 나무들이 손 쳐들고 일어서서 단풍을 털고 있다
----- 감태준 / 흔들릴 때마다 한 잔
이렇게 부슬부슬 비가 오시는 것으로 해서 가을은 마감될 모양이다.
어린 시절, 여름이면 한강의 모래톱에서 야실거리고 개헤엄을 치던 나는 다리에 힘이 붙으면서 여름이면 제법 수영을 다녔는데...
서울에서 살던 나는 중학생의 마지막 여름에 어머니의 친정이 있는 군산엘 갔다. 지금은 시내가 되어 있지만, 당시 군산의 변두리에는 아흔아홉다리라는 다리가 있었다. 그 다리는 사람이나 차량이 다니는 다리가 아니라, 기차가 다니는 철교인데...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의 무대가 된 호남평야의 쌀을 항구도시인 군산으로 실어나르기 위하여 개설한 군산선의 철교로서, 그 철교의 레일을 받치는 침목의 숫자가 99개(사실인지 아닌지는 내가 책임질 수 없음)라서 아흔아홉다리(그 동네말로 “아나옵다리”)라 불리며 길이는 대략 50~60미터 정도에 해당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60년대 그 시절 여름, 다리 아래 또랑물에는 수많은 악동들이 헤엄을 치고 물장구를 치며 놀았고 밤이면 어른들이 무더위를 씻던 장소이다.
여름방학중의 어느 날이던가.. 동네의 안면있는 까까머리 친구가 나에게 다가와 곧 열차가 올텐데 다리 위 레일에 기차가 오는 방향을 향하여 좌우로 나란히 서서 ‘기차가 눈앞에 다가올 때까지 누가 강으로 뛰어들지 않고 끝까지 버티는지’ 시합을 하자는 거였다.
나는 진작에 그 친구가 어머니 친정 동네의 꼬마대장임을 알고 있었으며, 나 또한 한 시절 서울 종로 인사동의 오야붕(?^^)이었거늘 꼬리를 내린다는 거는 존심이 허하지 않았던 거다.
일 순 긴장했지만, 방학 때마다 이 동네를 와야 할지도 모른다면.. 어차피 건너야만 할 강이었던 거다.
우리 둘은 철교의 침목위에 나란히 서서 몸을 풀었다. 그야말로 태양은 머리위에 붉게 타오르고 그 찌는 듯한 더위는 가히 두 소년에게 시련이었는데도 기차는 오지 않았으며 그 더위에 견딘다는 것 자체도 무리였다.
물이 줄줄 흐르던 팬티는 이윽고 바짝 말라 몸에 달라붙은 지 오래였고 몸은 타들어가는 느낌이었으며 입술은 바짝바짝 마르며 갈증이 심했다. 침목을 딛고 서있는 발바닥에도 따끔따끔 뜨거움이 전달되어 왔다.
얼마를 그렇게 버티고 서있었을까 아련하게 열차의 경적이 들리자 얼핏 정신을 차리고 턱을 당겨 긴장을 하였으며, 잠시 후 마침내 그렇게 기다리던 열차가 달려오고 있는 모습이 멀찌감치 보였다. 얼마쯤인지 열차가 쿵쿵거리며 가까이 다가오자.. 열차가 먼저 경적을 요란하게 연속적으로 울려대며 꽥꽥거렸다.
나는 후들거리려는 다리에 힘을 주고 어금니를 깨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직은 거리가 있는 그 찰나의 순간.. 옆에 선 녀석이 문득 허수아비 쓰러지듯이 강물을 향하여 무너졌으며, 영문을 몰라 잠시 어리둥절하는 사이에 열차는 평생 두 번째로 맞이해보는 엄청나게 강력한 바람소리와 압력을 퍼부으며 나를 향하여 달려들고 있었다.,.
나는 단발마적인 본능으로 강을 향하여 몸을 날렸으며 그 순간 그 강력한 바람은 나를 잡아끄는 듯 하더니 일순 나를 놓치며 강심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다음날, 나는 얼떨결에 그 동네의 외인부대 출신 대장이 되어 다리위에서 기절하여 쓰러진 그 구마적의 병문안을 다녀왔던 거다.
되는 일이라고는 오늘도 어김없이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술시(?)는 돌아온다’는 오늘처럼 부슬비가 내리는 을씬년스러운 날이면,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 길이 없는 그 구마적과 성당 마당 한 쪽에서 꼬불쳐둔 담배를 뻐끔거리고 피우던 그 까까머리 악당들과 포장마차에서 왁자하게 떠들면서 쏘주 한 잔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