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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歲寒圖)’ 품은 뜻은

Led Zepplin 2012. 1. 14. 11:40

 

                                                          (국보 제180호 / 국립중앙 박물관 소장)

 

 춘추오패(春秋五覇 :중국 고대 춘추시대의 제후 간 회맹의 맹주를 가리키며, 제나라의 환공, 진나라의 문공, 초나라의 장왕, 오나라의 왕 합려, 월나라의 왕 구천을 주로 지칭한다) 가운데 한 사람인 진(晉)의 문공이 초나라와 전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진이 강국 초나라를 이기기가 어렵자 자신의 대부 호언(구범)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러자, 호언은 속임수를 제안하였다. "전쟁에서는 오직 승리만이 중요할 뿐 예의는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문공은 다시 이옹(李翁)이란 자에게 자문을 구했다.

 

이옹은 아래와 같이 대답하였다. “연못의 물을 모두 퍼낸다면, 당장은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겠지만 후일에는 물고기를 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산짐승을 잡기 위해 산에 있는 나무를 모두 태워 버린다면 한 마리의 짐승도 남아 있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당장에 속임수를 쓴다면, 위기는 넘길 수 있겠지만 이는 단순한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갈택이어(竭澤而漁)라는 이 교훈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실천하기는 참 어려운 가르침이다.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선생께서 제주도에 유배를 온 지 어느 덧 5년이 흐른 해인 1844년의 일이었다. 선생께서 아끼던 제자 이상적(李尙迪·1804~1865)이 역관으로 공무를 수행하러 떠난 중국 연경(燕京)에서 구하여 보낸 서책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 120권을 받았다. 먼 타국으로 공무(公務)를 다녀오는 길에 스승의 당부를 잊지않고 서책을 구하여 보낸 거다.

 

나라의 명으로 다녀 온 먼 길일텐데, 제자는 제주로 유배를 가있는 별 볼일 없는 스승을 잊지 않았다. 그 얼마 전에도 ‘만학집(晩學集)’과 ‘대운산방문고(大雲山房文槀)’를 구해 제주로 보내주었다. 모두 구하기 힘든 책이었기에 추사선생은 감격(感激)했다. 그 당시 제주도로 유배를 당했다는 것은 ‘정치생명’이 종쳤음을 의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 이상적은 스승을 향해 변함없이 한결같은 마음을 보여주었다. 스승을 향한 제자의 한결같은 마음이 고마웠던 추사선생이 붓을 들어 완성한 작품이 바로 그 불후의 명작인 ‘세한도(歲寒圖)’인 거다.

 

‘세한도(歲寒圖)’의 그림은, 작은 초가집을 중앙에 두고 그 양쪽에 두 그루의 나무가 우뚝 서 있는 아주 단순한 구도이다. 맨 위쪽을 보면, 가로로 예서체로 세한도(歲寒圖)라 큼지막하게 쓴 바로 옆에 조금 작은 글씨로 ‘우선(藕船) 이것을 감상하시게(是賞) 완당(阮堂)’이라는 소제목으로 이어진다. ‘우선(藕船)’은 이상적의 호(號)이며, ‘시상(是賞)’ ‘완당(阮堂)’으로 연결된 ‘정희(正喜)’라는 붉은 도장 그리고 바로 아래로 이어서 그린 노송(老松)의 가지를 만나게 된다. 노송이 메말라 비틀어진 채 가지만 남아잇고 잎이 없는 것은 유배지에서의 정신적/ 육체적인 자신의 현상을 상징화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그 노송의 곁에는 이제 막 물이 차오른 청송(靑松)이 반듯하고 꿋꿋하게 서 있다. 그 노송이 김정희라면 청송은 바로 제자인 이상적인 거다.

 

초가집인지 기와집인지도 그림에 안어울리고 좀 어색하지 아니한가? 그 역시도 낯설고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제주라는 왜곡된 현장/ 장소를 의미한다고 봐야 맞다고 생각된다. 집을 사이에 두고 청송과 노송의 맞은편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서 있다. 그 두 그루의 나무가 있기에 그림은 좌우의 안정감이 느껴진다. 맞은편에 두 그루의 나무를 그려 넣은 이유가, 단순히 집 건너편의 소나무와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김정희(金正喜)선생이 ‘세한도’에 특별하게 소나무와 잣나무를 선택해서 그린 것은 인간에 대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 공자(孔子)의 서책 ‘자한(子罕)’ 27장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는데...

 

“자왈(子曰) 즉, 공자께서 가로사대, 날씨가 추워진 연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子曰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 어떤 나무가 참으로 싱싱하고 늦추위 까지 견디며 가장 늦게 시들게 되는 지는 한겨울의 추위가 닥쳐봐야만 알 수 있다는 거다. 그 나무는 다름 아닌 한결같이 늘푸른 소나무와 잣나무라는 것을...

청청하게 우뚝 서있는 소나무와 잣나무들을 한겨울의 추위속에 초가집 주변에 세움으로서 세상이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선비는 늘푸르게 존재해야 함을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어찌 나무뿐이겠는가. 인간사(人間事) 우리 또한 마찬가지이다. 내가 잘 나갈 때는 휴대폰에 배터리가 당해낼 수 없도록 뻔질나게 불러대던 사람들이 내가 곤경에 처하면 혹여 내가 전화를 해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누구를 원망하리.. 그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완당(阮堂)선생의 ‘세한도(歲寒圖)’는 권세와 이익을 쫒는 속물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소나무와 잣나무처럼 올곧은 사람이 있음이 반가워서 그린 작품으로, 조선시대에도 이미 그런 인간들이 많았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물기없는 숯처럼 진한 먹을 사용하여 초묵법으로 그린 이 그림속에는 유배당한 자의 삭풍이 몰아치는 듯한 설움과 고통을 뛰어넘는 숭고하달만큼의 차가운 지적의식이 함초롬히 표현되어 있다. ‘세한도(歲寒圖)’라 적은 그 글씨의 맨아래쪽에 사각형태의 ‘장모상망(長毋相忘/ 오랫동안 서로 잊지 말자)’이라 적은 네 글자를 볼작시면, 붓 잡은 김에 간단히 글로 끄적거려도 됨에도 불구하시고 일부러 도장을 새기어 붉은 인주를 묻혀 조심스레 찍어 놓은 것만 봐도 제자를 향한 스승의 마음이 얼~ 마만큼 각.별.했는지를 알 수 있지 않는냐는 거다.

스승을 향한 제자의 도리(道理)가 무너진 작금의 현실에도 되새김질이 필요한 그림이 아닐 수 없다.

 

스승 김정희(金正喜)로 부터 ‘세한도’를 받은 착한제자 이상적(李尙迪) 또한 감격했다. 그는 동지사(冬至使) 일행을 수행하는 역관으로 다시 연경에 가는 길에 스승의 그림 ‘세한도’를 품에 안고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청의 학자들에게 스승의 작품을 보여준 뒤 청나라 학자들의 찬시(讚詩)와 함께 조선의 오세창, 이시영, 정인보 등의 글이 붙어 현재의 대형 두루마리 그림으로 만들어졌다. 스승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격려 메시지가 외로운 절해고도 제주에서 실의에 빠져 있는 스승에게 격려의 큰 힘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없다. 나의 소나무에 찬바람이 불 때, 개그맨 김영철의 가수 윤복희 모창 노랫말따나 “누가 나를~” 위로해 줄까. 또, 올해에는 나도 누군가의 그런 소나무가 될 수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는 새해의 소망을 품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