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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야기

Led Zepplin 2012. 5. 10. 12:13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 신경림 / 가난한 사랑 노래

 

그 해 겨울은 무척 추웠다. 추운 독서실에서 손을 호호 불며 책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언제인지 모르게 슬며시 다가오는 따스하도록 환한 미소가 있었다. 나이보다 볼륨감 있고 키가 커 늘씬했으며 웃으면 상냥하고 해맑은 표정과 덧니가 얼핏 보여 더욱 귀여웠던 그녀는 그 춥고 긴 겨울동안 그녀 어머니의 눈총을 받으며 온갖 반찬을 독서실에 살다시피 하는 나에게 갖다 나르며 아무 말 없이 다소곳이 내 곁을 동행(同行)해 주었다.

 

거리는 차갑게 얼어붙었으며 빌딩 사이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으로 콧잔등을 발갛게 물들였지만 안국동에서 경복궁 돌담벽을 타고 가회동을 돌아오는 우리들의 발길을 막지는 못했다. 눈보라로 뿌려대던 하얀 눈송이들은 우리들의 보이지 않는 미래처럼 뿌옇게 앞을 가렸지만 우리 둘의 가슴은 이름모를 기쁨으로 벅차 있었다. 화사한 흰 옷을 즐겨 입던 그녀와 달리 늘상 그 옷이 그 옷이었던 우리들의 데이트는 곰보빵과 국화빵 그리고 뜨거운 국물이 있는 오뎅이 전부였어도 우리는 배고픈 줄을 몰랐다.

 

부산에서 벌어진 교통부가 시행했던 국가고시에 응시하기 위하여 미리 부산에 내려가 숨고르기를 하고 있었던 나에게 격려차 부산엘 내려왔던 그녀는 내 곁에서 아무 말없이 하룻밤을 보내곤 부산진역 플랫폼에 서있는 나를 차창(車窓)으로 내려다보며 손을 흔들고 떠나갔다. 기차(汽車)가 떠나고 난 후에 나는 그녀의 마지막 표정에서 그 큰 눈에 눈물방울이 맺혔던 게 아닌가 하고 잠시 생각했다.

 

시험은 예상보다 어려웠지만, 나는 합격했다. 기쁜 마음을 안고 열차에 올라 서울역에 도착하여 뛸듯이 개찰구를 나왔으나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빠져나가 텅 빈 광장의 구석에서 두리번거리는 나의 시야에 슬픈 표정의 그녀 여동생이 보였다. 모습을 보이지 않은 그녀는 “뱃놈에게 내 딸을 줄 수 없다”는 아버지의 강압적인 지시대로 오늘 아침 비행기로 미국으로 떠났던 거다.

 

발자욱을 봅니다.

발자욱을 봅니다.

모래위에 또렷한

발자욱을 봅니다.

 

어느 날 벗님이 밟고 간 자욱

못 뵈올 벗님이 밟고 간 자욱

혹시나 벗님은 이 발자욱을

다시금 밟으며 돌아오려나.

 

님이야 이 길을 올 리 없건만

님이야 정녕코 돌아온단들

바람이 물결이 모래를 스쳐

옛날의 자욱을 어이 찾으리.

 

발자욱을 봅니다.

발자욱을 봅니다.

바닷가에 조그만

발자욱을 봅니다.

 

                              -----  양주동 / 별후(別後)

 

그녀가 떠난 골목길 구비구비를 밤늦도록 오랫동안 나는 유령처럼 떠돌았으며, 그녀 집 앞 가로등(街路燈) 아래에서 여러 차례 미친 듯이 소주 병나발을 불어댔던 거다. 뜨겁게 마주 잡아오던 체온 그리고 귓가를 간질이며 부끄러운 밀어(蜜語)를 속삭이던 우리가 즐겨 만났던 공원 벤치의 하트 마크 속에 새겼던 두 사람의 이름은 그림을 공부했던 그 녀가 떠났어도 지워지지 않은 채 슬프게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언젠가 함께 여행했던 그 항구(港口)의 부둣가에도 뱃고동소리만 아련할 뿐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긴 겨울이 끝나고 이듬해 봄에 나는 스페인으로 떠났다.

 

그 후, 스무해 정도의 세월(歲月)이 지난 어느 날 문득 내가 근무하던 강남 논현동의 근처 어느 호텔 쇼스타코비치의 왈츠가 흐르는 커피샾에서 나는 그녀를 만났다. 그녀와 나는 시간(時間)과 여행(旅行)을 오랫동안 이야기하며 악수만 나눈 채 헤어졌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는 피천득 선생의 말이 떠올랐다. 다시 6월이 오면 군산에 다녀오려고 한다. 금강 하구뚝에서는 바람결에 일렁이는 강물과 함께 갈대가 아름답게 춤을 추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