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생록(醉生錄)
김여사는 술과 담배를 멀리 하는 사위가 가정적일 뿐만 아니라 딸과 금슬이 매우 좋게 지내는 것을 보고 대단히 만족하고 있었다. 어느 날, 김여사가 딸을 데리고 백화점에 갔는데 뜻밖에도 딸이 남편에게 선물한다며 술을 사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김여사는 딸에게 따지듯 물었다. “아니, 얘야! 박서방은 술을 한 방울도 못 마시는 사람 아니냐?” 딸은 얼굴을 살며시 붉히며 작은 소리로 대답하였다. “지난번 동창들 부부모임에서 그이가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겨 딱 한잔을 강제로 마셨는데, 글쎄.. 그날 밤 그이가 나를 가장 뜨겁게 사랑해 줬거든요!!!” 이 말을 듣고 김여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냐? 그렇다면 네 아버지 몫으로 세 병을 더 사려무나.”
몹시 취한 남자가 호텔에서 비틀거리며 나오더니, 앞에 서 있는 반듯한 제복을 입은 사내에게 손가락을 쳐들며 말했다. “이봐.. 딸꾹~, 빨리 택시를 불러주게.” 사내는 화를 벌컥 내며 말했다. “당신, 지금 나를 모독하는 거요? 나는 문을 열고 닫는 보이가 아니고 해군 제독이란 말이야.. 해국 제독.” “알았네 알았어~, 그럼 급히 쾌속정 보트를 불러주지 않겠나?”
우리는 늘상 즐거워서 마시고 속상해서 마시고/ 심심해서 마시고 피곤해서 마시고/ 슬퍼서 마시고 기쁨에 겨워 마시고/ 아쉬움에 마시고 시원섭섭해서 마시고.. 술을 마시는 이유는 그야말로 셀 수도 없이 많고도 많다. 갖다 붙이면 모두 이유가 된다. 술을 마시는 이유가 구천구백구십여덟 가지라면 술을 못 마시는 이유는 단 두 가지이다. 술이 없거나 몸이 술을 안 받아서일 뿐이다.
우리는 대개 “한 잔 할까?”로 시작하지만, 한 잔으로 끝나는 술자리는 내가 아는 한 거의 없다고 봐도 맞다. 즐겁게 시작되었건 슬프게 시작되었건 간에 한 잔은 두 잔이 되고, 그 두 잔은 열 잔이 된다. 그 열 잔이 마지막 몇 잔으로 끝날지는 나도 모르고 당신도 모르고 귀신도 모른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지만 나중에는 술이 술을 마시고, 마침내 술이 사람을 둘러 마신다.
일찍이 중국 사람들은 술 마시는 사람들의 갖가지 행태를 설파(說破)했는데, 그것이 취객십경(醉客十景)이란다. 낙(樂)/ 설(說)/ 소(笑)/ 조(調)/ 창(唱)이니 즐기고 이야기하고 웃고 어울리고 노래하는 것이 사람이 술을 마시는 모습이라면, 노(怒)/ 매(罵)/ 타(打)/ 곡(哭)/ 토(吐)는 술로 표출되는 대표적 부정적인 모습이라 하겠다. 긍정이건 부정이건 그 모든 것을 다 소유하고 표현하는 자(者) 그가 술꾼이다.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꽃 꺾어 술잔 세며 한없이 먹세그려
죽은 후엔 거적에 꽁꽁 묶여
지게 위에 실려 가나
만인이 울며 따르는
고운 상여 타고 가나
억새풀 우거진 숲에 한번 가면
그 누가 한 잔 먹자 하겠는가
무덤 위에 원숭이가 놀러와
휘파람 불 때 뉘우친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 송강(松江) 정철(鄭澈)
탈무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술은 악마가 바빠서 찾아올 수 없을 때 대신 보내는 것이다. 술이 머리로 들어가면 비밀이 밖으로 새어나온다. 권하는 사람의 예의가 바르면 어떤 술이든 맛있는 법이다.” 또 있다. 참으로 내 맘에 든다. “술마시는 시간을 낭비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 시간에 당신의 마음은 쉬고 있으니까.”
시인 예이츠가 읊은 술은 시인답게 로맨틱하다. “술은 입으로 들어오고 사랑은 눈으로 마신다. 이것이 우리가 늙어서 죽기 전에 진실로 알게 될 전부. 나는 술잔을 입에 들어 그대를 바라보며 한숨짓노라.” 크아~ 역시, 술맛 땡긴다.. 쩝...
우리나라의 명언에 빗댄 우스개소리도 있다.
1. 술 마시기를 물마시듯 하라 --- 최 영
2. 나의 오바이트를 후배에게 알리지~ 말라 --- 이순신
3. 일일불음주는 간중생형극 (一日不飮酒 肝中生荊棘)이라.. 곧, 하루라도 술을 거르면 간에 가시가 돋친다 --- 도산 안창호
4. 오두가단일지언정 차주불가단 (吾頭可斷 此酒不可斷)이다.. 하니, 내 머리는 잘라도 이 술은 끊지 못한다 --- 단재 신채호 (이건 좀 심하다)
5. 우리는 양지에서 마시고 음지에서 오바이트한다 --- 안기부 (그럴 만하다)
주당(酒黨)이 지켜야 할 일곱가지 계명이 있으니 가로사대...
1. 청탁불문(靑濁不問): 소주이건 막걸리이건 맥주이건 양주이건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마신다.
2. 원근불문(遠近不問): 종로이건 광화문이건 서울이건 부산이건 지하실이건 옥상이건 부 르면 어디든 달려가서 마신다.
3. 수하불문(誰何不問): 술 마시는 상대가 누구이건 결코 따지지 않는다.
4. 주효불문(酒肴不問): 술과 안주를 가지고 까탈 부리지 않는다. 야채 샐러드와 치즈 안주 로 빼갈을 마시거나 일등급 한우 갈비로 막걸리를 마시거나 무조건 마신다.
5. 금전불문(金錢不問): 지갑에 돈이 많거나 적거나를 따지지 않고 그 형편에 따라 마신다.
6. 생사불문(生死不問): 주선(酒仙)이자 시인(詩人)이셨던 조지훈 선생이 일찍이 설파한 주당의 최고 경지인 입신(入神)의 경지에서 실천해야 할 숭고한 계율이로고.
7. 주야불문(晝夜不問): 입 아프다.
부끄러우면 부끄러웠지 자랑할 일은 못되지만 본인도 한 때는 술을 제법 마셨던지라, 술에 얽힌 이야기를 하자면 날밤 새워도 부족하지만.. 직장 동료 몇 명과 함께 각자 병맥주 한 박스씩을 짊어지고 한강변 풀밭에 앉아 밤새도록 이야기하며 교대로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술 마시고 새벽에 백사장 그 자리에서 출근한 일도 있었으며 예전 남한산성 보신탕계곡에서 밤새 소주 마시고 고기를 뜯으며 웃고 떠들다가 어슴프레한 아침에 곧장 출근한 날도 있었으니 술꾼의 굴곡진 인생역정속에는 당연 넘어져 이도 부러지고 안경도 깨지고 그래도 지갑을 잃은 기억은 없다.
언젠가는 퇴근하여 동료 두엇과 함께 오징어와 소주 몇 병을 들고 명동성당 앞, 어느 둘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데 들을만 하길래 그 길 건너편 계단에 마주앉아 술판을 벌린 채로 감상을 해주며(?) 공짜인 주제에 제법이라는 둥 아직 쪼매 덜 익었다는 둥 나발을 떨며 동료들과 소주를 마셨는데 며칠 후 그곳에서 기타를 치던 그 둘이 ‘수와 진’이라는 유명한 듀엣이 되어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하였던 거다.
한번은 스페인 어딘가의 술집에서 일본인 세명과 싸움이 벌어져 그들이 맥주병을 깨서 찌르며 달려들 때 손바닥으로 깨진 맥주병을 막고 잡아서 찢어진 손바닥 상처에 옆테이블의 양주를 병나발로 입에 물고 상처에 뿌려 적신 채로 피를 뿌리며 주먹과 당수도와 발차기를 날리는 바람에 미치광이의 한 바탕 광란에 놀란 그들이 혼비백산하여 냅다 도망쳤는데 그 상처는 아직도 훈장처럼 남아있다.
옷걸이에서 문득 ‘툭’하고 떨어지는 옷처럼 그냥 허물어져 버리고 싶은 어느 날의 풍경처럼, 추적추적 내려주는 빗속에서 문득 추억에 몸서리쳐질 만큼의 쓰라림이 전해오는 어느 날의 오후처럼, 먼 여행길 노을이 붉게 물든 어느 산자락 모퉁이 차안의 라디오에서 ‘Dust In The Wind'가 들려오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눈물을 쏟은 석양무렵처럼.. 그런 시간이면 나는 소주이건 양주이건 와인이건 지금도 무조건 마시고 싶어만 진다.
초경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 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 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수위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廢人)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 황지우/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