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
감독 리안(Ang Lee/ 李安)의 필모그래피는 감탄할 만합니다. 『센스, 센서빌리티』『헐크』『아이스 스톰』『결혼 피로연』『테이킹 우드스탁』『색,계』『브로크백 마운틴』『와호장룡』...
다양성의 백미라 불러도 전혀 부족함이 없을 듯 싶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인도인이 주인공인 철학적이고도 영적인 컬러가 물씬한 『파이 이야기』를 대작(大作)으로 완성시켰습니다. 2002년 제34회 부커상 수상작인 얀 마텔의 소설『파이 이야기』는 40여 개국에서 출간된 부커상 최대의 베스트셀러로 꼽힌답니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는 태평양의 한 가운데에서 살아남은 파이라는 이름의 소년과 호랑이가 겪은 믿을 수 없는 227일간의 놀라운 어드벤처를 그린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파이는 고향 인도에서 가족들과 함께 아버지 동물원의 동물들을 데리고 캐나다로 떠나던 중 거친 폭풍우를 만나 태평양 한 가운데에서 ‘리차드 파커’라는 사람같은 이름의 벵갈산 호랑이와 단 둘이 살아남게 됩니다.
소설의 소재에 대한 고갈에 시달리던 작가는 인도 폰티체리에서 만난 노인의 조언에 따라 캐나다에 살고 있는 인도인 파이를 찾아갑니다. 거기서 파이는 “신의 존재를 믿을 수 있을만한 이야기를 해 주겠다”며 자신의 유년기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폰티체리에서 동물원 주인의 아들로 태어난 파이의 본명은 피신 몰리토 파텔. 파리의 한 수영장 이름에서 따 온 것이지만, 피신(pscine: 프랑스어로 ‘수영장’)이란 이름이 영어의 오줌싸기(pissing)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놀림을 받게 되자 자신의 이름을 원주율을 뜻하는 파이로 바꿉니다.
힌두교와 천주교/ 이슬람까지 여러 종교에 빠져들었던 소년 파이는 부모의 파산에 이은 캐나다 이주 계획에 따라 일본 화물선을 타고 긴 항해를 출발합니다. 하지만 배는 필리핀을 지나 태평양 한복판에서 침몰해 버리고, 우여곡절 끝에 파이는 얼룩말, 오랑우탄, 하이에나, 그리고 벵갈산 호랑이 ‘리차드 파커’와 함께 라이프 레프트(구명보트)에서 위험천만한 동거를 하게 됩니다.
호랑이 ‘리차드 파커’는 누구일까요? 그건 주인공 파이 자신이 아니라면 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미친 주방장(최근 세금내기 싫다고 러시아로 국적을 변경한 프랑스의 유명한 배우 제라르 드빠르디유/ 잠깐 출연하지만, 그가 출연한 이유는 진지합니다)이 선원과 엄마를 죽이자 파이는 내면의 야수성이 폭발 주방장을 죽여 응징합니다. 하지만 파이는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 역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을 죽인 자신을 호랑이로 삼아 자기의 자아와 분리해 생각합니다.
순식간의 태풍으로부터 난파되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거대한 태평양을 유랑하게 된 주인공 파이의 분열된 자아는 배 안과 배 밖에 각각 살아 있습니다. 파이는 자신의 야수성을 배 안에 남겨두고 왔다고 스스로에게 인식시킵니다. 주인공 파이와 호랑이가 동시에 장면 장면 등장하지만, 각자가 아니라 한 인물임을 우리는 주시해야 합니다. 주인공 파이와 호랑이 ‘리차드 파커’가 동일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장치는 이곳 저곳에 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마침내 인간의 땅에 도착한 파이는 이제 더 이상 야수성과 공존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며 '리차드 파커'는 밀림 속으로 홀연히 떠나갑니다. 이곳은 야만의 세계가 아닌 문명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이곳은 진정으로 야만의 세계가 아닌 문명의 세계 맞습니까? 두 번 다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야만의 세계로 변하지 아니하기를 진심으로 간곡히 소망하여 봅니다.
근자에 개봉한 '톰 후퍼' 감독의 『레미제라블』이 민초와 노동자들의 아픔을 이야기하면서도 왠지모르게 '버터냄새' 가득한 반면, 흔하게 볼 수 없는 아름다운 대자연과 초자연의 풍광이 수도 없이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펼쳐지는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는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휘나레를 앞두고, 파이가 평범한 가장으로 단란한 가정을 꾸민 장면은 인간이 얼마나 복잡하고 다면적인 존재인지를 여실히 드러냅니다. 거칠게 고기를 씹던 예전의 모습을 감춘 채, 온화한 채식주의자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숲에 숨어살던 인간은 문화와 문명을 발달시키며 숲에서 나오면서 실제로 일어난 일들을 후손들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비유’와 ‘상징’이라는 기법을 계승 발전시켰습니다. 발생한 사건을 있는 그대로 서술해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보다는 실제의 일들을 다른 사물이나 동물에 비유해 우회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인격화된 신의 존재도 결국은 이런 비유와 상징의 산물은 아닐런지요. 낮이 있기 때문에 밤의 황홀함이 돋보였듯이, 밤의 고독과 슬픔이 낮을 찬란하다고 칭송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는 파이라는 한 인간을 통하여 망망대해에서 인간이 소유한 원초적인 야수의 공포를 길들이며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보여주는 흔하게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또한, 인간세계에 존재하는 치열한 생존의 원칙을 일깨워주기도 하는 매혹적인 작품입니다. 영화는 압도적으로 철학적이며 종교적이고 동시에 인간적이어서 삶의 숭고함이 가슴에 남습니다. '아바타'의 제임스 카메론이 '영상혁명'이라고 까지 극찬했던 환상적인 영상미를 표현한 장면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극장에 온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깨달음의 메시지를 담은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