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의 이름으로

국민학교 6학년 때였다. 여름방학을 며칠 앞 둔 어느 날, 내 방에서 숙제를 하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일찍 귀가하신 아버지는 나에게 책가방을 챙기라 하시더니 내 손목을 잡으시고 집을 나선 거다. 아버지와 함께 골목길을 돌아 얼마를 걷자 이웃동네의 어느 집 앞에 서시더니 그 집 문을 두드리셨다. 잠시 후에 내 또래의 아이가 나와서 누구시냐고 묻자, 아버지는 아이를 빤히 바라보시더니 “너희 선생님이 지금 계시느냐?”고 물으시는 거였다. 소녀아이가 그렇다고 대답을 하자 아버지는 약속한 어른이 찾아왔다고 전하라고 하자 곧 이어 대학생 또래의 여자 아가씨가 허겁지겁 달려 나와 아버지 앞에 두 손을 모두고 공손히 인사를 하는 거였다. 아버지는 “이미 전달된 이야기대로 아이를 데려왔으니, 오늘부터 부탁드립니다”하며 나를 건네시고는 정작 나에게는 가타부타 말씀도 없으신 채로 뒤돌아 가셨던 거다.
영문을 모른 채 그 아가씨를 따라 일본식 건물의 집안 복도를 따라 어느 방 앞에 도달하자 그 아가씨는 나에게 방문을 열고 들어가라고 했다. 이야기한 대로 방문을 ‘드르르륵’ 열자 방안에는 내 또래의 고만고만한 여자아이 다섯명 정도가 큰책상을 앞에 두고 오르르르 둘러 앉아 있었던 거다. 아가씨는 여자아이 두 명에게 지시하여 간격을 벌리게 하곤 나에게 그 사이에 앉으라는 거였다. 그리곤, 오늘부터 여기서 그 여자아이들과 저녁마다 공부를 한다는 거였다. 그야말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었던 거다. 아니, 내가 그래 여기서 기집애들하고 어깨를 맞대고 공부를 하고 시험을 본다는 거냐. 참으로 얼토당토않은 말도 안되는 소리인 거다. 허나, 오늘은 이미 이렇게 끌려와 앉았으니 어쩌겠나 이 수모를 오늘만 참고 넘기자. 내일부터는 내가 죽어도 안온다. 쪽 팔리게 기집애들속에서 말을 섞고 경쟁을 하며 지내야 한다니 참으로 망신이로고...
그러나, 현실은 내 생각처럼 그렇게 순탄하고 만만하게 흘러가지는 않았다. 나는 첫날과 똑같이 왼쪽에는 약간 살찐 김선아 비스무리한 여자아이/ 오른쪽에는 마른 채시라 비스무리하게 생긴 여자아이를 양 옆에 두고 6개월여를 그 대학생 아가씨 집에서 과외공부를 하고 서울의 괜찮다는 중학교에 괜찮은 성적으로 입학하였던 거다. 솔직히 나보다 공부를 더 잘했던 내 좌우의 두 여자아이는 모두 이화여중에 합격하였다. 과외를 다니던 6개월 남짓 동안 나는 그 여자아이들과 미운 정 고운 정이 들고 말았다. 나하고 집 방향이 마지막까지 비슷했던 채시라 비스무리하게 생긴 그 여자아이. 알고보니 우리집 다음 골목에 살았으며 직선거리로는 100미터도 안떨어진 곳이었고 그 아이는 종로 수송국민학교에서 제법 공부를 잘하는 아이였던 거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골목대장이었던 내게도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있었던 거다.
6학년을 보낸 우리는 그 해 겨울방학동안 내내 날마다 만나서 종로의 구석구석과 광화문 여기저기를 구경다니며 떡볶기와 오뎅을 사먹으면서 칼바람으로 유명한 추운 서울의 겨울을 만끽했다. 그리고, 중학교를 입학하였지만 우리의 만남은 지속되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양쪽 집안의 아버지들도 이미 우리들의 만남을 알고 있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종로2가 화신백화점 옆에서 크고 유명한 금은방을 하고 있었으며 우리집 또한 장안에서 알아주는 집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주 서로의 집엘 찾아가서 함께 공부도 하고 그 녀의 방에서 피아노의 반주와 함께 노래도 부르고 그 녀도 우리집에서 저녁을 먹는 날이 있었지만, 나 또한 그 녀의 집에서 저녁을 먹는 날도 있었던 거다. 그러나, 항상 9시 전에는 헤어졌으며 우리집에서 저녁을 먹고 공부하고 가는 밤에는 늘상 내가 그녀의 집까지 데려다 주고 오곤 했다.
중학교 2학년 그 해 여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노정객의 말로는 비참했으며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었다. 나 역시도 밥 먹는 것조차도 어려워졌다. 아버지의 주검에 따른 충격으로 공황상태에 가까워진 나는 불면증과 함께 속이 터져나갈 것만 같은 답답함으로 방안에 앉아있지 못하고 밖으로 싸돌아 다녀야만 하는 이상한 병에 걸렸던 거다. 모범답안 같았던 나는 교실의 맨 뒷줄에 앉는 아이들과 친하게 지냈으며, 5살 무렵부터 배워 문교부장관상과 대학총장상을 받았던 미술은 때려치우고 밴드부에 가입하여 트럼펫을 불었다. 아버지의 주검으로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는 내 인생의 모토가 “예술은 길런지 몰라도, 인생은 짧다”로 둔갑하여 졌던 거다. 폭력과 방황으로 중학 2년과 3년의 시간들이 그렇게 흘러갔다.
중학교 3학년도 거의 마쳐가는 초겨울의 어느 날 밤 이미 내왕이 거의 끊어진 그 녀의 집, 희숙이의 방에서 아무도 몰래 그녀와 나는 우리 둘 평생 처음으로 이성의 몸을 체험했다. 그 밤 이후, 우리 둘은 다시 자주 만나게 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도 모르게 경제적인 격차를 느낀 내가 거리를 두게 되어 우리 둘의 관계는 서먹거리게 되었다. 우연처럼 문득 문득 만났던 우리는 고3이 되자, 내가 성적과는 무관하게 목표한 지방대학으로 자원 입학하는 바람에 그나마 아예 단절되었다. 고등학생 시절 내내 자주 만나지는 못하였다고 하여도, 밤이 되면 나는 때때로 골목으로 창이 난 그 녀의 방 창문 앞에서 그녀가 두드리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오랫동안 창가를 떠나지 못했던 시간들이 많았다. 무슨 느낌이었는지, 그 녀는 때때로 창문을 벌컥 열고 두리번거리곤 했는데 그 때마다 나는 깜짝 놀라 골목의 어둠속으로 숨고는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녀는 내게 너무도 아름답고 황홀한 여자였다. 맑고 하얀 피부와 커다란 눈망울/ 뛰어난 마스크에 늘씬한 몸매 그리고 큰 키가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하였던 거다. 목 터지도록 피를 토하는 고함처럼 불어댔던 트럼펫 소리와 함께 거친 야생마와 같은 나의 청소년기는 그렇게 부러진 팔다리의 아물지 못하는 상처의 아픔처럼 고통스럽게 지나갔다.
시간이 지나고, 대학 2학년이 되었다. 성난 들개와도 같았던 내 거친 호흡은 이제 조금 잦아들었으며 눈길도 차츰 부드러워졌다. 겨울방학을 맞아 나는 모처럼 멀리 떠나 온 예전 우리 동네 인사동 골목을 오랜만에 둘러보고 안국동으로 발걸음을 옯겼다. 저녁나절이 가까워져오자 어려서 자주 걸었던 안국동을 걸어보고 야간에 디제이(Disc Jockey)로 일하는 명동으로 걸음을 옯길 차례였다. 안국동 사거리의 육교를 지나 비원쪽으로 걷고 있었는데, 대여섯명의 여대생 차림의 여자들이 깔깔거리며 곁을 지나고 있었다. 무심하게 스쳐 지나갔는데, 왠지 아는 사람이 섞여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때 늦게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러자, 그 중 한 명이 뒤로 돌아선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실례가 될까 봐 얼른 다시 뒤돌아 걷던 길을 걸었다. 그러자, 그 여자는 나에게 “여보세요, 잠시만요!!!”하며 다급하게 나를 불러세우며 쫒아왔다. 가까이 다가온 그녀는 놀랍게도 희숙이. 그녀였다. 우리 둘은 깜짝 놀라며 서로의 손을 움켜쥐고 가까운 커피샵으로 달려 들어갔다.
아직 여명도 채 벗어지지 않은 신새벽, 우리 둘은 조용히 골목의 여관을 빠져나와 목례만을 나눈 채 그렇게 헤어졌다. 밤새 나누었어도 채 다 못 나눈 이야기들은 서로의 마음속에 묻기로 하였다. 그 날 신새벽은 고요한 가운데 눈이 소리없이 소복소복 추억처럼 내려앉고 있었다.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 정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