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르(amour)
조조영화를 본 적이 오래되었다. 돈이 항상 부족하였던 젊은 날의 아침이 떠올라 궁상맞게 보일까봐 몇 주를 미루다가, 미룬 끝에 놓친 아까운 영화들이 떠올라 이른 아침의 추위를 떨쳐내고 극장으로 향했다. 아침과 저녁으로 하루 두 번 밖에 상영을 안 하는 까닭이다. 돈 되는 영화는 주로 상영횟수가 많고, 돈 아니되는 영화는 그만큼 횟수가 적은 것이 요즘 극장가의 풍경이다. 예술영화 또는 철학적인 내용의 영화/ 곰곰이 곱씹어야만 하는 영화는 그만큼 생존의 공간이 척박하다. 그러니, 좋은 영화에 목말라하는 관객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거다.
예매한 표를 출력하여 10분전에 상영관을 들어서자 역시 빈자리가 많다. “그러면 그렇지. 누가 아침 일찍부터 이런 영화를 보러오겠나. 영화에 미친 나같은 인간이나 오면 왔지. 일요일 아침의 느긋함을 만끽하며 따뜻한 이불속에서 씨잘데없이 채널을 널뛰기하듯 활보하고 여유를 부리며 커피를 마실텐데... 쩝...”하고 군시렁거리며 자리에 앉아 물병의 물을 한모금 마시고 주변을 둘러보자 어렵쇼 내 뒤 꽁무니를 따라왔는지 줄줄이 사탕으로 사람들이 자리를 채우더니 불과 몇 분 사이에 만석이 되었던 거다. 조용히 자리를 채운 이들은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젊은이들도 간혹 보였고 누가 시킨 바도 아니건만 일제히 핸드폰의 음향을 조정하는 모습들을 보였다. 영화 ‘아무르’를 감상하러 온 관객들의 수준을 보여주는 깜짝 놀랄만한 장면이었다. 만석속의 정적은 영화의 엔딩크레딧이 올라오는 순간까지 지속되었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72)은 65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아무르(Amour)’로 영화제의 최고 영예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네 번째 칸 본상 수상이자 2009년 ‘하얀리본’에 이은 두 번째 황금종려상이다. 그는 1942년 독일에서 태어나 오스트리아에서 성장했다. 빈대학교(빈대 학교 아님/ 비인 대학교)에서 철학과 심리학을 전공하였으며 ‘일곱 번째 대륙’으로 감독으로 데뷔했다. 이후 ‘베니의 비디오’‘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1개의 단편’ ‘퍼니 게임’ 등으로 폭력과 미디어에 집중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국내에 미카엘 하네케의 명성을 알린 영화는 1997년작 ‘퍼니 게임’이며 영화는 오스트리아의 중산층 가족의 별장을 기습해 연쇄살인을 벌이는 청년들을 담은 작품이다. 이후 그는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은 프랑스의 이자벨 위페르가 여자주인공으로 출연한 ‘피아니스트’로 칸의 주목을 받는다. 2001년 칸국제영화제에서 논쟁작으로 부상했던 ‘피아니스트’는 심사위원대상과 남녀주연상을 수상하여 기염을 토했다.
감독 미카엘 하네케는 ‘피아니스트’ 이후 2003년 ‘늑대의 시간’으로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으며 2005년 과거 때문에 본인과 가족이 위협받는 TV 프로그램 진행자를 다룬 ‘히든’으로 칸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은 좋아하기 힘든 복잡한 인물이다. 폭력/ 잔혹/ 파격과 같은 단어로 설명되는 그의 영화들은 냉혹하고 잔인하지만 인간에 대한 애정의 따뜻한 시선이 존립함은 확실한 사실이며 그래서 그의 영화들은 보는 이들을 조금은 불편하게 한다.
영화 ‘아무르(불어/ 사랑)’에서, 조르주와 안느는 80대의 노부부이다. 별탈없이 행복하고 평화로운 노후를 보내던 음악가 출신의 노부부 조르주와 안느에게 어느 날 아내 안느가 갑자기 마비 증세를 일으키면서 그들의 삶은 하루아침에 달라지기 시작한다. 남편 조르주는 반신불수가 된 아내를 헌신적으로 돌보지만, 하루가 다르게 몸과 마음이 병들어가는 아내를 바라보면서 조르주는 차차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고야 만다.
하네케 감독이 보여주는 현대인 노친네 안느와 조르주를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는 주체성과 독립심이다. 대부분의 현대 노인들이 그렇듯 이들은 타인의 동정과 관심을 단호하게 거절한다. 간호사/ 파출부/ 간병인 심지어 딸네미도 타인이다. 더욱 놀랍게도 죽음을 앞둔 아픔앞에서는 자신의 젊음조차도 타자이다. 당연하지만, 재미있고도 연민스러운 일은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부부가 어린 시절에 있었던 작은 일화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다. 안느와 조르주는 그런 일상의 대화를 보여준다. 평생을 함께 살아와서 다 못한 이야기도 없을 것 같지만, 실은 못 다한 이야기가 더 많다.
안느: 이런 얘길 왜 이제야 해?
조르주: 아직 안 한 이야기가 아주 많아.
안느: 늙어서 이미지 망치면 어쩌려고 그래?
조르주: 안 그러도록 해야지.
영화의 장면이 흐르면서 점차로 가슴 속에 차오르는 암울함과 비통함이 차오르는 이유는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인생에 대한 시선이 누구에게나 일상적이며 흔하게 볼 수 있는 보편성이 직접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첩을 무심히 바라보면서 “아름다워~!” “인생이 참 긴 것 같아~ ”라고 말하거나/ 노부부가 서로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말자며 건네는 위로/ 친구의 장례식에 다녀와서 이를 담담하게 말하는 태도/ 자신을 다그치는 딸에게 “나도 너만큼 엄마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조르주. 이러한 지극히 일상적이고 사소해 보이는 순간들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는 노부부에게는 의식과도 같은 특별한 순간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아름다울 때도 있지만 때로는 너무 길어서 고통스럽기도 하고 어느 시인의 말마따나 문득 떨어지는 옷걸이의 옷처럼 스러지고플 만큼 힘들고 고독하며 한없이 행복하기도 했던 순간들의 기억들이 존립하지만 누구에게나 예외없이 마지막이 찾아올 수밖에 없다는 당연한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영화를 보면서 문득 복받쳐 오르는 울음을 참을 수 있어야 주변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인격적인 죽음에 대하여도 넌지시 물음표를 제시하며 머지않아 폭발적으로 증가할 우리나라 노년들의 현실을 꼬집으며 아프게 질문한다. 이 영화는 결코 로맨틱하거나 감상적이지 않고 미화되어 있지 않으며 노부부의 아픔과 그 막다른 선택을 냉철하게 생각해야 하고, 영화속에 몇 차례 등장하는 시퀀스처럼 문득 갑자기 죽어야만 하는 우리네들의 마지막 순간이 허망하지만 그 허망한 삶속에 사랑의 의미는 진정 어떠한 것인가를 조용히 차갑도록 냉정하게 표현하고 있다. 영화를 보고 계단을 내려오는 내 머릿속에는 슈베르트의 피아노 즉흥곡이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