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베를린(The Berlin File)

Led Zepplin 2013. 2. 22. 14:28

 

 

영화 《베를린》이 제작된다는 소식을 접한 이후 나는 《베를린》과 관련된 소식을 일부러 외면했다. 그건 관련된 정보를 많이 알게되면 알게 될수록 빨리 영화를 보고픈 마음으로 심한 갈증을 느끼게 될 것이 뻔하며 그 내용을 미리 알고 보면 그 맛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감독과 영화의 대강의 줄거리와 출연진의 면면을 보면 얼마나 재미질 것인지가 너무 뻔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뛸 지경인 거다. 《베를린》은 오페라이거나 심오한 철학이 담긴 영화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재미가 없다는 것이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미리 그 내용을 알고 볼 필요까지는 없다. 현장에서 즐기면 되는 재미난 영화인 거다. 그래서 나는 개봉즈음의 날자를 알고도 개봉과 관련한 소식에 일부러 심드렁하게 지냈다. 그리고, 마침내 《베를린》이 개봉되었다. 나는 일찌감치 CGV로 달려갔다. 예상대로 《베를린》은 재미있었다.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국과 북한간의 얽히고설킨 정치적인 음모 그리고 살인/ 배신과 추적이 허리우드 영화 못지않게 활기차게 전개되며 예상대로 출연자 각자의 면면이 개성있게 드러난다. 분단의 아픔을 다룬 영화 《JSA》못지않게 재미있다. 감독 유승완의 솜씨가 바야흐로 물올랐다. 한석규는, 《베를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사건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정원 직원으로서 자신의 일에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이른바 애국충절에 불타는 캐릭터이다. 지극히 빨갱이를 혐오하던 그가, 빨갱이신분을 내동댕이치고 아내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하정우를 풀어주게 되는 과정에서 보여주게 되는 휴머니티는 과연 관록의 한석규스럽다.

 

하정우는 이념의 카테고리에 갇혀있는 북한의 영웅에서 어는 날 문득 음모의 궁지에 몰리게 되자 아내를 구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한 개인의 처절함을 담담하고 치열하게 연기해낸다. 더는 쫒길 곳이 없는 막다른 궁지에 몰린 연기는 하정우가 이미 《황해》에서 선보였는데, 《베를린》에서는 보다 확신에 찬 연기력으로 승부했다. 류승범은 영화의 시종일관 냉혹한 광기를 선보였는데, 북한 고위층의 아들로 권력을 위해서라면 타인을 늑대처럼 물어뜯는 잔악한 모습을 연기했다. 유승범의 캐릭터는 처음부터 끝까지 설정된 하나의 목표만을 바라본 채로 미친 듯이 폭주하는 폭주기관차의 열연을 보여준다. 그는 이제 형의 그늘에서 벌어먹는 별볼일없는 양아치의 모습에서 훌륭한 배우로 확실하게 우화했다.

 

전지현은 《도둑들》에서의 어설픈 연기자에서 아직은 불분명하지만 결혼의 탓인지 보다 더 성숙해진 것만은 확실하다. 자신과 가정을 지키기 어려운 환경에 처해진 여성으로서 사랑만은 지키려하는 그 마음을 표현하려 노력했다. 누구보다 잘 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름 괜찮았다. 류승완 감독은 말한다. “냉전 시대 베를린 길거리의 10명중 6명은 스파이였다고 한다. 그 곳에서 자신을 감추고 살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베를린》이 성공작이 되려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념적 대립과 정치적 변화 따위의 담론에 지쳐있음을 깨닫고 그런 주제에 천착하기 보다는 그리고 또 지나치게 많은 액션스릴러적인 장면을 축소해야 한다. 액션에 돈 수억 쏟아부을 필요는 없다. 그건 이미 홍콩과 헐리우드에서 수천편을 찍었지 않나... 두드려 부시고 때려 부시는 영화 이젠 증말 식상한다. 한국의 조폭영화에서도 수없이 많이 나오지 않았나. 이제 관객은 좀 더 아기자기하고 잔잔하며 멜랑꼬리한(?^^) 스타일을 원한다. 나 역시도 가장 즐기는 영화가 《베를린》스타일의 잔잔한 스릴러 영화이다.

 

상징적이고 재미있는 장면을 제외한 액션장면을 줄이고, 하정우와 전지현의 러브 스토리를 늘려서 좀 더 안타깝고 애잔하며 가슴시린 극적 연출이 되었어야 했다. 국경과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도록 가슴시리게 애절하며 잔잔한 스릴러... 돈 안될 수가 없는 거다. 그 점만 좀 더 진지하게 파고들었더라면 《베를린》은 세계3대영화제에 도전장을 낼 수도 있었을텐데, 아쉬움이다. 그럴지라도, 《베를린》은 1000만 관객을 단숨에 훌쩍 뛰어 넘을 것이다. 암시된 속편도 기대된다. 그리고, 이제 그 누구도 하정우의 탄탄대로를 가로막을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