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광의 깨알 영화이야기
나는 영화보기를 좋아한다. 극장은, 나에게 영화라는 또 다른 우주를 만나는 멋지고 훌륭한 공간이다. 영화라는 멋진 친구를 만나러 갈 때에는 사실 동행조차도 필요 없다. 조용한 어둠속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고 바라보는 크고 넓은 스크린 가득 펼쳐지는 어느 누군가의 삶 그리고 내가 알았던 또는 알지못했던 또 다른 우주가 판타지(Fantasy)와 상상과 허구들이 시대를 초월하여 실제처럼 그 곳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우리 이 전의 시대와 우리의 시대에는 영화를 능가하는 가치있는 오락(Entertainment) 장치는 없다.
재미있었던지 없었던지 간에 보려고 맘먹었던 영화가 마침내 끝나고 극장의 계단을 내려오며 비상구를 나타내는 녹색의 사각램프 아래를 지나 세상속으로 걸어 들어 올 때 그 어둠속으로 부터 밝은 조명과 현실 속으로 내던져지는 그 묘한 느낌은 딱히 무엇이라 표현하기 어렵도록 묘하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유영하다가 세상으로 돌아와 타임머신의 문을 통과한 그런 느낌말이다. 그런 느낌은 영화라는 멋진 판타지와 현실이 묘하게 뒤엉키는 오직 극장이라는 곳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순간이다.
내가 즐겨 부르는 노래 ‘모란동백’을 작시/ 작곡하고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직접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한 영화광이기도 한 이제하 시인은 자신의 SNS에 ‘영화의 시대는 가고 있다’는 글을 올린 적이 있다. 시인은 글에서 나처럼 지난 날 희귀 필름을 사서 모으던 시절의 열기를 추억했다. 문명의 발달로 이제는 그런 영화들을 얼마든지 간단하게 만날 수 있지만, 영화를 통한 지적/ 예술적 갈구는 찾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영화라는 문화를 통하여 카타르시스/ 인간적 체험과 경이로움/ 감동 이와 같은 것이 사람이 세상에 와서 즐거운 삶을 살아가는 방법론으로 추천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눈물 흘린 기억이 많다. 최민식과 장백지가 주연한 ‘파이란’이 그렇고.. 수잔 서랜든과 지나 데이비스가 열연한 로드무비 ‘델마와 루이스’가 그렇고.. 마카로니 웨스턴 스파게티 서부활극으로 유명한 74살의 노털 영화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 주연/ 음악을 맡은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그렇고.. 찌질한 폐병장이 좁쌀사기꾼 더스틴 호프만과 출세와 돈에 눈이 먼 텍사스 촌놈 존 보이트가 열연한 ‘미드나잇 카우보이’가 그렇고.. 장 가뱅과 알랑 들롱이 주연한 범죄영화 ‘암흑가의 두 사람’ 이 그렇고.. 설경규의 대표작 ‘박하사탕’이 그렇다. 어디, 그 뿐이겠나... 더구나, 감동을 먹은 영화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지경이다.
영화란 작가가 체험하거나 상상한 것을 창작적으로 구성하여 재현한 예술 행위인데, 깐느와 베니스영화제의 심사위원이었으며 저명한 평론가였던 앙드레 바쟁은 “영화는 그 본질로부터 인간의 리얼리즘에 대한 집념을 실현시켜 다른 예술로 하여금 유사성에 대한 콤플렉스로부터 해방시켰다”고 말하였던 바, 뿐만 아니라 곰곰 생각해보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갖고있는 양면들 바로 사랑과 미움/ 슬픔과 기쁨/ 추함과 아름다움/ 분노와 아픔/ 웃음과 울음 그리고 인간의 상상과 무한한 판타지를 보여주는 것이 영화이다. 살아가면서, 최악의 슬픔과 아픔속 일지라도 즐거움과 웃음의 작은 틈새가 있다는 건 그나마 얼마나 다행스럽고 신비스러운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