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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가 먹고 싶다

Led Zepplin 2014. 2. 13. 16:46

 

 

 추위로 인하여 입맛이 사라진 이즈음 외할머니가 만들어 주시던 따끈한 칼국수가 생각난다. 밀가루에 날콩가루를 대충 섞어 반죽하여 홍두깨로 민 다음 착착 접어 가늘게 쫑쫑 썰고 멸치국물에 듬성듬성 썬 감자를 넣고 한 번 끓인 후 송송 썬 애호박을 우르르 넣어 한소끔 끓이면 구수한 손칼국수가 만들어진다. 여기에 삭힌 매운고추를 썰어 넣은 양념장을 듬뿍 얹어 먹으면 천하의 진수성찬도 부럽지 않았다.

 

나는 국수를 좋아한다. 건강진단의 결과로 매년 의사선생이 밀가루음식과 술을 피하라 하지만, 술과 국수를 뺀다면 나의 인생은 얼마나 허전하겠나. 술로 만취한 새벽녘 잠에서 깨어 밤에만 문을 여는 단골국수집을 찾아가 구수하고 따끈한 멸치국물의 국수에 적당히 익은 열무김치를 척척 걸치고 한 그릇 비워낸다면 속도 편하면서 신새벽조차도 아름답게 보일 지경이다. 내친 김에 양재동꽃시장엘 쫒아가 좋아하는 장미 한 다발을 옆자리에 싣고 음악을 들으며 고속도로를 달려오는 즐거움은 그 자체로 이미 삶은 아름답다.

 

가난하고 외로웠지만 그 뜻이 높아서 고독했던 시인 백석(白石/ 1912~1996)에게는 산숙(山宿)이라는 작품이 있다. ‘여인숙이라도 국숫집이다/ 메밀가루 포대가 그득하니 쌓인 웃간은 들믄들믄 더웁기도 하다/ 나는 낡은 국수분틀과 가즈런히 나가 누워서/ 구석에 데굴데굴하는 목침들을 베여보며/ 이 산골에 들어와서 이 목침들에 새까마니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 사람들의 얼굴과 생업과 마음들을 생각해 본다’

 

성북동 비스듬한 언덕 골목길에 있던 요정 ‘대연각’을 법정스님에게 보시하여 ‘길상사’라는 사찰로 거듭 태어나게 한 장본인인 기생 진향(眞香)과의 애절한 사랑 때문에 더욱 유명해진 백석선생은 여행 중 국숫집을 겸하는 어느 변방(邊方)의 허름한 여인숙(旅人宿)에 묵으셨던 모양이다. 국수를 만드는 사람들과 함께 방바닥에 누워 때 묻은 목침을 벤 채 선생의 생각은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끝없는 국수 가닥처럼 그 방에 묵었을 수많은 군상들에 대한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셨던 모양이다.

 

어쩌면 역사(歷史)를 지탱하는 것이야말로 그렇게 가느다랗고 질기디 질기고 사소한 것들일 것이다. 변방의 산골 오지를 오가며 좁은 여인숙 방의 목침에 때를 남긴 사람들, 아무도 그 이름 석자를 기억해주지 않는 그 사람들이야말로 역사의 주인공들이 아닐는지... 천하를 호령하던 영웅도 난세를 평정한 대장군도 결국 언젠가는 스러지지만, 우리들의 정신과 그 영혼만은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이 지나도록 대를 이어 유전해 내려간다. 백석선생이 국수에 애착을 보인 이유 또한 사소하지만 민초들이 갖고있는 바로 그 가늘고 긴 생명력 때문은 아니었을까.

 

세기의 철인 소크라테스(Socrates)는 “떠날 때가 되었으니, 이제 각자의 길을 가자. 나는 죽기 위해서, 당신들은 살기 위해. 어느 편이 더 좋은 지는 오직 신만이 알 뿐이다.(The hour of departure has arrived, and we go our ways ― I to die, and you to live. Which is better God only knows.)”라는 말을 남겼다.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은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말도 했다. 아등바등 구차하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면, 잠언(箴言)처럼 꺼내들게 된다.

 

예년보다는 덜 추웠다 하지만 아직도 꽃샘추위를 앞 둔 대문 앞에는, 이미 봄이 망설이며 조바심을 내고 있다. 말로 다하기 어려운 서정(抒情)으로 가득한 이 늦은 겨울에, 세월에 몸을 맡기는 바람처럼 눈 내린 산야 들길을 따라 걸으며 문득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다. 그 떠나온 길목 어느 해 저무는 길가 마을의 국수집에서 국수 삶는 구수한 냄새를 따라 한 움큼 주린 배를 채운다면 고단한 나그네는 행복한 미소를 떠올리며 잠자리를 찾아들 것이다.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을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 이상국(1946~ )/ 국수가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