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김형!
장마인지라, 소나기가 오락가락하고 때로는 가을 날씨처럼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기도 합니다. 일기 고르지 못한 이즈음 강건하시온지요? 지난 3월의 그 마지막 주말(週末), 노랗게 망울이 맺히기 시작하던 어여쁜 개나리가 4월의 초에는 샛노란 꽃으로 수줍게 피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늘진 방향의 개나리가 노랗게 피어나기 시작하던 그 무렵에 양지바른 곳에 서있던 목련은 활짝 피어 그 소박하면서도 청순한 아름다움이 보기에 무척 좋았습니다. 지난겨울에 제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남녘의 고매화(古梅花)들은 이미 그 꽃과 향(香)을 바람결에 떠나보내고 푸르른 잎으로 성숙하였겠습니다그려. 고매화들을 보려고 날짜를 카운트다운하면서 주변의 숙소를 미리 물색하여 두었던 저의 금년 이미 지나간 봄, 저의 고매탐사(古梅探査)는 그렇게 계획으로만 가슴속에 핀 꽃으로 그치고야 말았더이다.
2014년 3월 7일(금요일) AM 07: 30분 무렵.
습관으로 일찍 출근하여 내 자리의 테이블앞에 앉아있자니 배꼽아래의 중앙 부근을 간헐적으로 무엇인가가 바늘로 찌르는 듯한 느낌이 아프지는 않았지만 기분 나쁠 정도였다. 시간이 흐르자, 아침의 상쾌한 기분은 사라졌다. 회사앞의 동네 병원에서 약을 사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AM 11: 00분 무렵.
약국의 7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약사아저씨는 “장이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받았거나 이상증세를 보일 수도 있는 것”이라면서 3가지 종류의 약을 주면서 1일 3회 3일간의 복용을 권유하였다. “그렇다면, 괜찮아지겠지”하는 생각이 들어 약을 받아들고 나왔다.
2014년 3월 10일(월요일) AM 09: 30분
약국에서 받은 약은 지난 주말동안 효과가 없었다. 지난 금요일보다 조금 더 아픔이 더해진 듯 싶다. 그 약국 맞은편의 의원엘 가서 의사와 마주앉았다. 침상에 눕히고 배를 청진한 의사는 “장이 스트레스를 받았거나 이상증세가 발생한 것일 수 있으나 전립선의 문제일 수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처방전을 주었다. 의원 옆의 약국에서 약을 받아 자리로 돌아왔다.
2014년 3월 12일(수요일) 오전중
아픔이 지속되어 혹시 전립선의 문제일까 싶어 비뇨기과병원에 왔다. 아픔도 수반되는 갖가지 절차의 검사를 거친 뒤, 머리는 벗어졌지만 젊쟎고 편안한 미소가 있는 의사는 “이상이 있어보이지는 않으나 혹시 전립선에 이상이 있을지도 모르겠으므로 처방된 약을 드시고 지켜보시고 모래쯤 다신 내원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거금을 들여 검사를 했건만, 의사는 참 부담없이 편하게 말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방된 약을 받아들고 귀사하였다.
2014년 3월 13일(목요일) 퇴근후
비뇨기과의 문제는 아닌 듯 싶다. 아픔이 배꼽아래에서 배꼽위 아랫배로 서서히 올라와 어제보다 아픔이 더해졌다. 퇴근하여 집근처의 제법 유명하다는 병원을 찾았다. 진찰받고 싶은 원장앞에는 줄줄이 10여명의 환자가 대기하고 있었다. 잠시 기다리다가 원장보다는 젊은 부원장격인 젊은 원장의 이름표 아래에는 환자가 없기에 그 방으로 들어갔다. 혈색좋고 통통한 젊은 의사는 역시 눕혀놓고 배를 청진하더니 X-Ray를 찍자고 하였다. 잠시후, 모니터의 사진을 보더니 젊은 의사는 “장의 움직임이 없는 것이 아닌가 싶으니 약을 드시고 내일 다시 와 보시죠“하며 처방전을 내렸다. 평소 약을 안즐기던 내 책상위에는 먹다만 약봉지가 제법 여럿 쌓였다.
2014년 3월 14일(금요일) 퇴근후
아픔이 좀 더 심해진 듯싶다. 조금 일찍 퇴근하여 어제 만나지 못한 원장의 방 앞에 줄을 섰다. 원장은 내 설명을 귀 기울여 듣더니 어제 찍은 사진을 곰곰이 바라보며 “큰병원에 가시죠. 아무래도 장의 움직임이 정상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의뢰서’를 발행해 드릴까요?”하였다. ‘역시, 그냥 지나칠 일은 아닌 것 같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에게는 “아닙니다. 제가 그냥 찾아가 진료를 받도록 하죠”하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배가 아팠지만, 오늘은 이미 금요일이다. 대학병원엘 간다한들 금/ 토/ 일 3일은 그냥 침상에 누워 천장만 바라본 채 멀뚱멀뚱하고 월요일 아침을 기다릴 것이 뻔했다. 또한, 조직의 수장으로써 월요일 아침에 ‘직원조회’를 하여 직원들에게 정상적으로 업무를 시작시키고 소속된 조직을 일상화시키고 대학병원으로 가서 입원을 해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2014년 3월 16일(일요일) 밤 12시 무렵
‘이 아픔을 참고 내일 아침에 차를 몰고 출근하여 직원조회를 마치고 대학병원에 간다고?’ 고통이 점점 심해지는 것 같다. 이 상태로 아픔이 진행된다면, 내일 아침에 출근을 위하여 차를 운전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듯싶다. 온몸에 진땀이 흐르며 기운이 서서히 빠지는 듯 힘을 쓸 수가 없어 도저히 자신이 서질 않았다. 어차피 내일 아침에 출근을 못한다면, 배는 뒤틀고 아프지만 아직 정신이라도 멀쩡할 때 지금 병원에 가서 절차를 밟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차분한 마음으로 옷을 챙겨 입고 차를 몰아 대학병원의 응급실에 도착하였다. 그렇게 병원에서의 시작은 순조로웠다.
2014년 3월 17일(월요일)
01:30분 무렵: 응급실의 침상에 누워 혈압과 맥박 등을 측정하고 피검사 등이 실시되더니 X-Ray와 CT 촬영 등이 분주히 진행되었다.
이른 오전: 의사가 떨거지들 두엇을 데리고 내 침상 앞으로 왔다. “좀 어떠십니까? 지금 장이 심하게 부어있으니, 장이 진정될 때 까지 휴식을 취하고 안정하시기 바랍니다”며 돌아갔다. ‘배가 뒤틀고 아파 죽겠는데, 휴식을 취하고 안정을 찾으라고? 어라.. 저런, 말 같지 않은 소리를 저게 의사라고?’
2014년 3월 18일(화요일)
시끄러운 응급실에서 응급병동의 병실로 이동함. 대장내시경 준비를 위하여 장을 비우기 위한 약을 지급받았으나 복부의 팽창감과 심한 통증으로 먹지 못하고 토해 냄. 먹고 토하기를 반복함. 관장을 하고 내시경을 투입하였으나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못하였으며 조직검사를 위하여 일부만 채취함. 검사후 조금은 편해진 듯싶었지만, 심야에 대변을 조금 본 후부터 통증이 시작됨. 대변을 보면 조금 나아질 것 같았지만 변은 나오지 않음.
2014년 3월 19일(수요일) AM 06시 무렵
통증이 심하여 진통제 주사를 맞고 잠이 들었으며, 오전에는 가는 대변도 조금 보았다. 오후에는 보다 더 극심한 복부팽창감과 통증이 왔다. 오전에 이어 오후에도 의사가 순회점검을 왔다. “이렇게 아픔이 심한데, 언제 수술하느냐?”고 의사에게 묻자, 의사는 “수술이 필요없는 병이니 수술은 안합니다. 장이 정상화할 때 까지 기다리시면 됩니다. 기다리다 보면 언제 그랬느냐 싶도록 장이 원활하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참고 기다리면 됩니다.” “선생님, 말씀은 고마우나, 내 병의 상태는 지금 선생님 말대로 되지는 않을 듯싶으니, 서둘러 수술 계획을 잡아 주십시오. 수술만이 방법일 듯싶습니다.”고 말했지만, 의사는 “수술은 안한다는 방침”이라며 잘라 말했다. 나는 의사에게 거듭 요청했다. “선생님, 제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십시오. 모래 밤 자정까지 나를 수술하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 제발 나를 수술할 수 있도록 계획을 잡아 주십시오!!!” 나는 나의 강한 예감을 말하였지만, 의사는 대답없이 돌아섰다.
2014년 3월 20일(목요일) 01시 무렵
배가 터질 것만 같은 팽창감과 배를 뒤틀고 쑤셔 파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통증이 찾아왔다. 새벽 6시 무렵까지 힘든 시간을 보내다가 진통제 주사를 맞고 잠이 들었다. 오후에 담당의사가 왔다. “선생님, 내일 밤 자정까지 수술하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 제발 꼭 좀 수술할 수 있도록 계획을 잡아 주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나는 강하게 받은 나의 느낌을 말했지만, 의사는 완곡하게 수술을 거부했다. “저런, 개새...!!! ”
2014년 3월 21일(금요일)
고통은 쉬지않고 거듭됐다. 아침에 담당의사가 회진을 왔을 때 다시 요청했다. “선생님, 오늘 밤 자정까지 나를 수술하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 제발 오늘 밤에 꼭 좀 수술하여 주십시오. 정말 부탁입니다!!!” 그러나, 의사는 “수술하지 않고도 낫을 수 있는 병을 왜 수술을 합니까?”하며 돌아갔다.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다. 저걸 의사라고~ , 개새...!!!
저녁 무렵: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복부팽창감과 통증으로 견딜 수 없었다. 죽는 것은 조금도 무섭지 않았으나 이렇게 죽기는 싫다는 생각으로 아픈 배를 움켜쥐고 병실의 통로를 걸어 나가 간호사들의 사무실 로비 앞으로 갔다. 나는 극심한 통증으로 이미 이성을 잃은 광란의 상태였다.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램프가 깜빡거리고 더러 합선의 스파크도 번쩍거리며 발생했다. 순간적인 판단으로 이런저런 상황 점검 결과, 나는 거칠게 나가기로 결심했다.
“야~ , 이 새끼들아!!! 의사 오라고 그래. 야~ , 인턴.. 뭘 봐. 이 새끼야!!!” 통증으로 아픈 배를 움켜쥐고 구부린 채 테이블을 붙잡고 거칠게 욕을 하며 고함을 지르자, 모든 간호사들과 모니터를 보고 있던 두어 명의 인턴들 그리고 지나가던 환자들이 미친놈을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야~ , 어서 담당의사 오라고 그래. 나 죽는 꼴 볼테니 어서 담당의사 오라고 해!!! 수술하겠다는데 왜 안 해 줘. 어서 의사 오라구 그래. 다 때려 부셔 버리기 전에 어서 의사 불러와~ 어서 불러 와~~!!!” 나는 배를 움켜쥐고 비틀거리면서도 거칠게 욕을 하며 당장이라도 집기비품을 때려 부술 듯이 행동했다. 잠시 후, 담당 인턴이 와서 달랬다. 수술의 절차에 내시경이 있으니 내시경을 먼저 하고 수술에 들어가자고 달랬다.
수술을 해주겠다는 말에 나는 숙지막하여 “틀림없지? 내시경하고 수술하는 거 맞지?”하고 거듭 확인을 했다. 인턴의 “틀림없다”는 말에 어딘가의 준비실에서 내시경을 시행했지만, 실패했다. 항문에 내시경이 들어가지를 않는 것이었다.
“ 자, 이제 내시경도 안되니.. 어서 수술 준비에 들어가자.. 됐지?” 그러나, 인턴은 “30분만 기다렸다가 다시 한 번 더 해 보고 그 때 수술에 들어갑시다.”하고 나를 설득했다.
터져나오는 욕을 참고 그의 주장대로 기다렸다. 30분후에 인턴이 왔다. 다시 내시경을 투입했지만, 항문이 꽉 막혀 결국 실패했다.
“자 , 이제 수술하는 거 맞지?” “아뇨, 수술을 어떻게 제 마음대로 결정합니까. 의사선생님의 결정을 기다려봐야죠” “야~ , 너 아까 한 말하고 다르쟈나? 이런 개새끼들.. 야 이 개자식들아.. 의사 오라구 해. 나 오늘 죽는 꼴 볼려고 그래? 나 오늘 수술 못하면 죽는단 말야!!! 어서 의사 오라구 해!!!”
20: 30분 무렵: 우여곡절 끝에 나의 우격다짐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수술이 시작되었다. 수술대에 올랐으나, 마음은 차분했다. 짧지않은 삶에서 즐거움이 더 많았다고 생각되었다. 여기서 끝장나도 후회는 없었다.
2014년 3월 22일(토요일) 01: 00 무렵
수술이 끝났다. 수술까지 이르기에는 환자인 나의 집요한 주장과 막무가내로 인하여 예정에 없던 수술을 하게 되었던 거다.
나를 집도한 외과의사는 수술 후 와이프에게 말했다. “대장의 일부가 지나치게 많이 붓고 막히고 손상되었으며, 일부는 대장이 파열되어 장내의 분비물이 복강으로 쏟아져 흘러들어가서 복강 내부의 세척에는 엄청나게 많은 세척약품과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으며, 상태가 워낙 심각한 관계로 대장전체의 4/5 정도를 잘라냈다”는 거였다. 조직검사의 결과가 나와야 암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고 하나, 암으로 봐도 무방하다는 것으로 판단함. 응급병동의 중환자실로 이송됨.
2014년 3월 23일(일요일) ~ 4월 20일(일요일)
열이 나고 통증이 거듭되어 진통제와 해열제 주사를 맞으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그 무렵 비몽사몽 속의 꿈을 꾸면, 뜨거운 태양이 내려쪼이는 열사의 사막속에서 낙타인 내가 느리게 걷고 있었다. ‘좀 더 빨리 걷지!’ 하는 자문자답의 안타까움만 있을 뿐 눈에는 눈물을 가득 담은 채 눈만 꿈벅거리며 느리게 걷는 낙타인 내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3월 27일(목요일):
이미 30대 후반부터 등산을 좋아했으므로 전국의 명산에 두루 올랐으며, 최근에도 수원의 광교산은 집에서부터 출발하여 서너시간이면 종주를 마치고 집까지 도착할만큼.. 내리막은 걷지만 오르막은 거의 달리다시피 뛰고 달리며 지리산의 파르티잔(빨치산) 수준의 산타기 솜씨를 즐기던 나. 나이 들어가면서 불어나는 체중을 조절하기 위하여 지난 가을부터는 한겨울에도 거르지 않고 출근후 직장의 축구장을 아침마다 좋아하는 하드락을 이어폰으로 들으며 5Km씩 뛰고 달리며 병이 시작되던 3월 7일 전날까지도 거침없이 내달렸던 나의 생활은 대장암이라는 병명에 설득되지 않았던 거다.
입원한 날로부터 수술이 끝난 열흘 만에 처음 미음을 먹었다. 10일을 물 한 모금 없이 굶어 본 것은 처음이다. 7층 병실의 창으로 내려다보는 봄은 너무 아름다웠다.
4월 1일(화요일): 의사의 성급함 판단으로 퇴원.
4월 4일(금요일): 극심한 오한과 식은땀과 발열로 인하여 응급실로 재입원하다.
4월 12일(토요일): 다시 9일 만에 물을 마셨다.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도 아니거늘 물을 보고도 마시지 못했다. 병실 통로의 끝, 햇살이 눈부신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봄속을 질주하는 차안의 드라이버가 너무나도 부러웠다.
4월 15일(화요일): 열하루를 굶은 끝에 미음이 주어졌다. CT보다 정확하다는 PET CT를 촬영하고 조직검사 결과와 비교 검토한 결과, CT의 사진만으로는 ‘대장암 2기’라고 볼 수 있으나.. 종합적으로 본다면 ‘3기 반’ 정도의 대장암으로 결론이 났다.
4월 20일(일요일): 마침내, 퇴원했다. 3/17일 처음 입원하고 창밖으로만 바라보던 그 조촐하면서도 화려하며 신비스러운 수원의 봄 34일이 지나갔다. 7층 암병동에서 내려다보는 창밖으로 개나리가 피고지고 목련이 피고지고 철쭉이 피고지고 내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라일락이 피고 졌다. 바람이 멈추고 햇살이 좋았던 오후, 와이프의 부축으로 대학병원 장원에 나가 피어있는 라일락꽃내음을 맡으며 햇살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나는 라일락꽃나무 꽃가지를 움켜쥐고 울었다. 흐느끼며 울었다. 어처구니없이 정말 어처구니없어서 울었다.
김형!
7월 1일(화요일): 6월 28일(토)~ 30일(월), 2박3일간의 ‘5차 항암치료’를 마치고,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 있는 ‘두타산자연휴양림’에 다녀왔습니다. 고산(高山)의 숲속 오두막에서 하루를 보내고 나니, 온몸에 배어있던 울렁거리며 넘어올 것 같았던 지독한 약냄새와 통증이 어느 정도는 증발한 것만 같습니다. 나머지 7차의 항암치료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횟수가 진행될수록 치료의 고통이 증가함을 느낍니다. 4차까지는 병원에서 식사를 하였지만, 5차부터는 병원에서 항암치료중에는 식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식당의 밥차가 오면 밥냄새와 함께 이상한 약품 냄새때문에 구토가 올라와 식사를 할 수가 없었으며 식판의 밥과 반찬의 냄새도 역겨웠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견딜만합니다. 수술하자는 데도 안해줘서 고통스러웠던 시간들에 비하면 이건 약과이고 다행이기 때문입니다. 병원을 나서면 식사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김형!
어느 절 마당 따사로운 햇살아래, 6월과 7월 사이에 화려하게 꽃을 피워 금비가 내리는 것 같다하여 ‘Goldenrain tree’라는 영어 이름을 갖고 있는 모감주나무의 그 꽃이 노랗게 물들고 있습니다. 지금 저의 시간은 여름을 시작하려는 장마를 맞이하고 있으며, 부러진 제 삶의 시간은 이미 오후 다섯시를 넘어서 있습니다.
저는 이미 오래 전 정오 그 뜨거운 격정의 시간에서 멀어져 왔지만, 그러나 어두워지기 전까지는 아직 약간의 시간이 남아 있으니 해가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다시 한 번쯤은 허락(許諾)하시리라는 어리석으리만큼 막연한 기대(期待)도 아직은 있나이다.
지나간 해의 그 긴 겨울 그리고 신비로웠던 지난 봄, 제가 눈 내린 편백나무숲과 다람쥐와 늙은 매화와 라일락꽃을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보낸 시간이 얼마나 고단했던지 바람과 꽃과 나무들이 알고 있으므로 대지가 고요한 손을 들어 증거(證據)하여 줄 것이라 믿습니다. 아직 내게는 얼마쯤의 시간이 남아 있을까요, 시간은 이미 오후 다섯 점을 넘었거늘...
김형!
인생은 뜻대로 되지않더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변수도 의외로 많은 경우인 저는 그만큼 더 불행한 것일까요?
가끔은 불행이 찾아오는 것도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느닷없이 찾아온 그 불행이야말로 내 영혼의 ‘멘토’일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만큼의 나를 키워준 것도 그 멘토의 덕분에 더욱 분발하여 열정을 끌어올리고 고군분투하였기 때문에 비록 이룬 것은 없지만 이나마도 명을 부지하고 살아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리하여, 찾아든 불행을 원망하고 저주하기 보다는 감사까지는 아니더라도 반갑지는 않지만 그 또한 내 삶의 안타까운 동반자라며 보듬어안아야 하지 않을까 조용히 오늘을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나그네가 광야를 가고 있는데 갑자기 사방에서 사나운 불길이 일어났습니다. 불길에 둘러싸여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고 있는데 갑자기 미친 코끼리 한 마리가 나타나 그에게 사납게 달려드는 것입니다. 코끼리를 피하려고 죽을힘을 다해 도망을 가던 중 언덕아래 우물이 있고 그 옆에 등나무 넝쿨이 우물 안으로 늘어져 있었습니다.
다급한 나그네는 넝쿨을 붙잡고 미친 코끼리를 피하여 우물 속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우물의 바닥에는 커다란 이무기 세 마리가 그가 내려오기만 하면 잡아먹을 듯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넝쿨을 붙잡고 위를 올려다보니 우물 벽 틈으로 독사 네 마리가 혀를 낼름거리며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려가지도 올라오지도 못하고 있는 그는 점점 넝쿨을 붙잡고 있는 팔에 기운이 빠져 갑니다. 설상가상, 칡넝쿨 윗부분을 흰 쥐와 검은 쥐가 넝쿨을 갉아 먹고 있습니다.
“이제 죽는구나!” 싶은 그 진퇴양난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에 달콤한 향내가 나는 액체 한 방울이 얼굴로 떨어집니다. 혀로 핧아보니 꿀입니다. 우물 밖 나무위에 지어놓은 벌집에서 꿀이 한 방울씩 흘러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허기도 지고 갈증이 심하던 나그네는 방금까지의 그 두려웠던 상황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떨어지는 꿀 한 방울을 받아먹으려고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설화는 인간의 삶을 비유합니다. 들판에 번지는 불길은 우리의 삶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욕망의 불길(欲火)을 뜻하며, 미친 코끼리는 언제라도 부지불식간에 닥칠 수 있는 죽음의 운명이고 살귀(殺鬼)라고 생각됩니다. 무상(無常)을 비유한다고도 하죠. 넝쿨은 목숨입니다. 이 목숨을 세월을 뜻하는 두 마리의 쥐(해와 낮을 뜻하는 흰 쥐 그리고 달과 밤을 뜻하는 검은 쥐)가 잠시도 쉬지 않고 하루하루를 갉아 먹습니다. 그래서 우물의 밑바닥은 황천입니다. 세 마리의 이무기는 탐진치의 삼독(三毒)을 뜻합니다. 네 마리의 독사는 우리 몸의 구성요소인 지·수·화·풍의 4대(四大)를 뜻하며, 사람이 죽으면 다시 이 네 원소로 돌아가게 된다는 겁니다. 꿀은 재욕(財欲)•성욕(性欲:色欲)•음식욕(飮食欲)•명예욕(名譽欲)•수면욕(睡眠欲)의 오욕락(五欲樂)을 상징합니다.
결국, 인간이란 탐진치(貪瞋癡) 삼독의 번뇌에 빠져 무상의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채 다가오는 죽음앞에서도 오욕락의 꿀 한방울에 연연하며 살아가는 안타까운 존재임을 비유하는 것일테죠. 유한한 우리네 인생에 최고의 가치란 과연 무엇일까요.
김형!
비교적 성공적인 수술을 마친 저는 지금 회사에는 휴직계를 제출하였으며, 2주일에 한번씩 2박3일 일정으로 항암치료중입니다. 항암치료를 제외한 시간들이 얼떨결에 맞이한 한가로움으로 더러는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더러는 즐겁기도 합니다. 대수술을 마치고 교훈이 있다면, 누구를 막론하고 건강에 있어서 ‘방심은 절대 금물’이라는 겁니다. 대수술을 하고 나니, 돈 많은 노친네들이 나이들어서 소일하는 일과라는 것이 ‘병원순례’라는 우스개가 단순한 우스개가 아닌 것으로 들립니다. 이제 우리가 청춘이 아니듯이, 병원을 찾아 정기적으로 신체의 각부를 점검하는 것은 창피한 일도 부끄러워해야할 일도 아니란 것입니다. 저처럼 “아차~ !!!”하는 실수 아니라면 방심으로 큰 손상을 당하는 것보다는 조심스러운 자세로 성심껏 병원을 찾아 정기적으로 건강상태를 체크해야만 합니다. 잘 먹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운동이라면, 운동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신체 각부의 빠짐없는 정기적 점검이라는 사실을 잊지마시기 바랍니다.
김형!
생사의 갈림길 그 고통의 절정을 맛보던 어둠의 시간 속에서 나는 희한한 꿈을 하나 꾸었습니다.
화창하고도 드높은 하늘 그리고 유난히 맑고 짙푸른 바다, 희고 곱디고운 백사장/ 백사장 옆의 누런 흙무더기 언덕배기.. 그곳은 예전에 제가 가본 적이 있는 중동의 전형적인 어느 바닷가/ 성경속에 등장하는 바닷가 마을의 풍경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차를 몰고 그 바닷가 마을을 지나가는데, 바닷물이 넘실대는 조그만 다릿결에는 팔뚝만한 물고기들이 물반 고기반으로 넘실거리고 있었으며 마을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건져내고 주워 담고 있었던 겁니다.
싱싱한 물고기를 보자 군침이 동한 나는, 언덕 위 어느 아담하고 깨끗한 팬션에 여장(旅裝)을 풀고 바스켓 하나를 들고 바닷가로 달려 내려왔습니다. 하얀 백사장에는 파도가 밀려들 때마다 팔뚝만한 물고기들이 파도위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고기를 잡느라고 아우성이었으며 나 또한 땀을 뻘뻘 흘리며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다닌 끝에 예닐곱 마리 정도의 물고기를 잡고 희희낙락하다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저는 이 꿈을 전형적인 기독교의 ‘예지몽(予知夢)’이라고 판단합니다. 그 예지몽속의 예닐곱 마리의 물고기는 저의 남아있는 시간이 6~ 7일/ 6~ 7개월/ 6~ 7년 중 하나일는지.. 그도 아니라면, 67살까지의 나이일까요? 이 만큼의 건강이 회복되도록 여러모로 도와주신 가족 여러분들과 다니는 직장의 동료분들과 여러 모임의 선후배님들의 물심양면의 성원과 가슴 뜨거운 격려 그 모든 고마운 이들의 기도 폭격 덕분에 기적같은 꿈이 예지되었다고 본다는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 본다면, 아무 인연도 없는 소인을 예수께서는 돌보아주셨다는 의미라고 본다는 겁니다.
김형!
주검으로 아버지가 떠난 중학교 2학년의 그 해 겨울부터 아픔같은 슬픔을 참기 위하여 눈에 띄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던 어느 날 부터인가 하나의 질문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러나, 이 질문은 곧 이어진 진학과 학업, 사회의 진출, 해외로 떠도는 내게 주어진 매력적인 외국 문물과 문화가 주는 쾌락 그리고 직무의 적응, 결혼과 승진 등 세속적 욕망의 가치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 질문은 까마득히 잊혀져 갔습니다. 그렇게 서른 중반의 어느 토요일 오후 저녁 무렵, 퇴근을 위하여 자동차의 시동을 걸고 엔진의 워밍(Worming)을 위한 그 짧은 기다림의 순간 문득 눈앞에 펼쳐진 석양을 바라보다 나는 왈칵 울음을 쏟았으며 가슴속 깊은 곳에 침잠(沈潛)되어 있던 그 화두(話頭)는 제어(制御)할 수 없는 부력(浮力)으로 떠올라왔던 것입니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로 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지리산(智異山)’
그 겨울의 늦은 오후, 화엄사(華嚴寺)의 사하촌(寺下村) 어느 허름한 민박집에 여장을 내린 저는 열어놓은 한지(韓紙)로 바른 낡은 방문(房門) 밖으로 부는 바람과 뒹구는 낙엽을 바라보며 휴대용 가스버너로 끓인 라면을 안주삼아 30도 소주 한 병을 나발 불고 방문을 소리나게 닫은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얼마를 잤을까요, 소주가 깨면서 소변을 보고 방으로 돌아오는 움츠린 어깨너머로 눈발이 성기게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콩을 볶는 듯한 기총사격을 등 뒤로 받으며 파르티잔들을 따돌리고 지리산의 계곡을 뛰어 내달리던 황급한 달음질이 천 길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면서 “아버지~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른 저는 스스로의 비명에 놀라 잠을 깨었으며 놀라 가쁜 숨을 몰아쉬고 방문을 벌컥 열자, 신새벽의 마당엔 하얀 눈이 마루 위까지 수북하도록 쌓여 있었습니다.
다시 라면 한 봉지를 끓여 빈속에 채우고 화엄사 계곡을 통한 노고단(老姑壇) 정상을 향하여 눈발을 헤치며 올라갔습니다. 노고단 정상까지 초행길의 거친 산행(山行)을 마치고 되돌아 와, 화엄사 일주문(一柱門)을 지나 고단한 다리를 쉬려 대웅전(大雄殿) 앞 적묵당(寂黙堂)의 툇마루에 주저앉은 저는 엄청난 눈이 내렸음으로 관광객이 거의 없는 한가로운 탑 마당과 폭설임에도 불구하고 바람 한 점 없이 따사롭게 내려 쪼이는 햇살을 두 다리를 뻗고 툇마루의 벽에 기대어 유유히 편안한 마음으로 음미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심코 사찰 기둥에 적혀있는 불가(佛家)의 글귀를 읽어 내려가던 중.. 그 몇 글자가 가슴 깊은 곳을 꿰뚫어 찌르고 지나가는 그 순간 대웅전 앞 탑 마당에서 워낭소리를 철렁거리며 천천히 지나가는 커다란 흰소를 눈으로 가슴으로 직접 보았던 겁니다.
성경(聖經)을 통하여 울림을 받지 못했던 저는 오랜 천주교도(天主敎徒)였음에도 불구하고, 내 영혼(靈魂)의 문(門)을 강하게 두드렸던 여러 권 불교(佛敎)의 경전(經典)들을 손에서 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경이(驚異)로운 신세계(新世界)가 거기 그렇게 우뚝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순간 불심(佛心)이 일어 불법(佛法)에 매료된 지 어언 20여년, 이런저런 인연(因緣)으로 당대의 도인 몇 분을 알현하고 공부한 바 있는데.. 성철((性徹) 큰스님의 상좌(上佐·제자)이시고 한국불교의 세계화를 개척하신 선구자이시며 이미 입적하신 맏상좌 원명(圓明)스님을 비롯하여 아직도 성철큰스님의 자취가 깃들어 있는 백련암에 계시는 원택(圓澤)스님과 수행자로서의 정진 이외의 세속적인 삶의 가치를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 수좌이자 한국불교를 개혁한 모임의 장소가 되었던 한국불교의 성지(聖地)인 봉암사를 지키시는 원타스님/ 어딘가의 선원에서 선원장으로 주석하실 단아한 선비같은 원유스님 그리고 금오대선사의 제자분들이신 조계종 총무원장이셨던 따뜻한 송월주(宋月珠)스님과 조계종 중앙종회의장을 지내시며 대종사(大宗師)이신 사천왕 같으신 용모의 월서(月棲)스님이 계십니다.
죄 많은 소인이 입에 올릴 수 없는 스치듯 머무르듯 인연을 맺은 많은 고승대덕(高僧大德)들의 존명(尊名)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나요. 허지만, 안타깝게도 예수께서도 한 번 쯤은 돌봐주신 저를 오랜 인연의 부처께서는 어찌 일언반구도 없이 거들떠보지도 않으셨나이까. 그렇게도 쓸모없는 돌 볼 필요 없는 인간이었더란 말인가요 아니면, 부처님과의 인연이 다하였다는 말인가요. 어리석은 필부는 원망만이 앞섭니다.
김형!
하느님이건 예수님이건 부처님이건 알라이건 간에 신의 그 존재도 위대하고 신성합니다만 우리가 날마다 마주치는 그 일상도 신성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달려 가 보고 싶은 곳에 당도하여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보는 과정/ 먹고 싶은 음식을 맛볼 때 느끼는 감사함/ 공기 맑은 곳에서 심호흡을 할 때의 가슴 가득 차오르는 기쁨 등 살아있음의 행복은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인가에 감사함을 느끼게 하여 일상의 신성함을 깨닫게 합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비록 남루하고 가난한 못난 인생일지라도 삶과 우주가 우리에게 펼쳐보여 주는 것을 무심코 지나친다는 것은, 향기 가득한 음식이 놓인 테이블을 맛보지 못하고 눈으로만 바라본다던가 아름다운 그림이 걸린 벽면을 구경하지 못하고 달려간다던가 멋진 음악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앞에서 귀를 막고 바라보는 것과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봅니다.
저는 존경하옵는 선사(禪師)님들의 명성과 확철대오(確徹大悟)의 말씀보다도 불교가 갖고있는 로맨티즘을 어쩌면 더 사랑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스님이 암자로 돌아가는 길에 냇가에서 매우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습니다. 스님들은 내를 건너야 했는데 여인은 물이 깊어 건너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 스님이 여인을 업어 내를 건네주었는데, 저녁 공양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동료 스님이 말했습니다. “자네는 스님이라는 신분을 잊었네. 스님이 어찌하여 여자를 등에 업을 수 있는가?” 듣고 있던 스님이 말했습니다. “이 사람아, 나는 그 여인을 냇가에 내려주고 왔는데, 자네는 왜 여기까지 그 여인을 데리고 왔는가?”
“어느 해 봄날, 갈매리 보현사에 머물던 스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일에 쫒겨 늘 바쁘던 나는 무슨 일인가 하며 전화를 받았다. "송암! 진달래가 우거진 꽃밭을 보았어. 어떻게나 야단스럽게 피었는지 흔치 않은 광경이야. 지금 와서 한 번 보렴." "스님, 오늘은 일이 많아서요. 내일 가면 좋겠습니다." "내일이면 늦으리!" --- '광덕 스님 시봉 일기'라는 저서로 한 때 불교계의 화제이셨던 그리고 제가 한시절 신세를 졌던 송암 지원 스님께서 스승이신 광덕 대스님과 어느 봄 날 나누신 대화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사랑합니다. “도 닦는데 방해가 된다고 그걸 잘랐어? 이 병신아, 그건 장애물이 아니라 열쇠야, 열쇠.” “확대경으로 보면 물속에 벌레가 우글우글한데요. 자, 갈증을 참을 거요, 아니면 확대경을 확 부숴 버리고 물을 마시겠소?” 소인배인 저를 깊은 감동으로 경악케 하였던 말년에 불교에 심취하였던 거인(巨人)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조르바의 입을 빌려서 한 이야기입니다.
“버스가 지리산 휴게소에서 10분간 쉴 때,
흘러간 뽕짝 들으며 가판대 도색잡지나 뒤적이다가,
자판기 커피 뽑아 한 모금 마시는데 버스가 떠나고 있었다.
종이컵 커피가 출렁거려 불에 데인 듯 뜨거워도,
한사코 버스를 세워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앉으니,
회청색 여름 양복은 온통 커피 얼룩,
화끈거리는 손등 손바닥으로 쓸며,
바닥에 남은 커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렇게 소중했던가,
그냥 두고 올 생각 왜 못했던가.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이고, 삶 깨기 전에는 삶은 꿈이다.”
----- 이성복 / 그렇게 소중했던가
PS : 요즘 저는 강원도를 비롯한 전국 깊은 산속의 물좋고 공기맑은 조용한 휴양림을 찾아다니며 몸과 마음을 쉬고있습니다. 뜻하지않은 휴식이 즐겁지만은 않지만, 싫지도 않습니다. 큰일을 겪고, 좀 무덤덤해 졌을까요. 수술(手術)을 마치고, 병실에 누워서 이 글을 쓰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퇴원하여 집에 돌아와 곰곰 생각하니 글을 쓸 자신도 없을뿐더러 부질없는 짓이란 생각으로 차일피일 하였답니다. 인생(人生)의 한 단락(段落)을 정리(整理)한다는 기분으로 써내려갔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Edith Piaf의 노래중에 나오는 가사 일부를 마지막으로 못난 저의 투병에 도움을 준 고마운 분들에게 그간의 소회(所懷)를 정리한 이 글을 올립니다.
Je ne regrette nen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Ni le bien, qu'on m'a fait
(내가 느꼈던 행복도 불행도)
Ni le mal, tout ça m'est bien égal
(내겐 모두 같은 것이었지요)
Je ne regrette nen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내내 강건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