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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晩秋)에 떠나리라

Led Zepplin 2014. 10. 1. 00:09

 

                                                              (이왈종 화백 / 매화나무 아래서)

 

지난 봄 그리고 여름은 드라마틱했습니다.

 

: 3월에 4시간 반의 대수술을 통하여 죽음의 난관(難關)을 뚫고 나는 생존(生存)했으며, 4월과 5월 그 자연(自然)의 신비로움을 창()밖으로만 바라봐야 하는 안타까움과 어처구니없음에 몇 번이나 눈물을 쏟아야했습니다. 따뜻한 봄 햇살 가득했던 병원(病院)의 정원 향기(香氣) 가득했던 라일락 가지를 붙잡고 흐느껴 울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여름 : 하나 술 마시지 말 것/ 달리지 말 것/ 등산하지 말 것/ 노래하지 말 것/ 다섯 생선회를 먹지 말 것/ 여섯 - 국수를 먹지 말 것... 내가 좋아하는 것은 모조리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수술(手術)을 집도한 닥터의 절대적인 지시사항(指示事項)인지라 어쩔 수 없음입니다. 나름 생각한 방법(方法)이라곤 차()를 몰고 미친 듯이 전국(全國)을 헤매 돌아다니며 풀어낼 수 밖에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술과 회가 없는 여행(旅行) 또한 치즈 없는 피자이며 노른자 없는 계란후라이/ 줄 없는 가야금입니다. 작정없이 차를 몰고 홀로 떠난 여행길에서 석양의 노을을 만날 때 가슴을 적시는 음악이라도 흐르면, 나도 모르게 애수에 젖어 눈물이 흐르고 길이 잘 안보여 도로변에 차를 주차시켜 마음을 갈아앉히고 다시 노을을 바라보면 그렇게 마음이 평안(平安)할 수가 없습니다. 삶은 거역할 수 없는 복불복이며 각자의 복(福)이고 화(禍)라고 보입니다.

 

: 노란 개나리는 만개하여 떨어질 날짜를 기다리고 철쭉 또한 이미 색이 짙어 봄이 무르익은 어느 날 약간의 바람이 불면서 봄비는 소리없이 보슬보슬 내리는데 한영애의 봄날은 간다는 노래가 마침 나른하게 들리는 오후.. 이미 신비롭던 봄의 모든 꽃은 지고 녹음이 푸르게 짙어 14살 소녀가 스물 둘의 숙성한 모습을 보이는 여름날 오후 이른 장마비가 골목길을 촉촉히 적시고 어느 집에선가 부침개 지지는 냄새는 골목길을 후벼 파는데, 휴대폰 파는 가게의 스피커에선 임지훈이 쇳소리로 꿈이어도 사랑할래요를 읊어대 귓바퀴가 젖어오는 날.. 소주가 가엽도록 무쟈게 땡기지만, 나는 그저 닥터에게 욕만 퍼 부울 따름입니다.

 

달리기 : 나는 작년 가을부터 달리기에 취미(趣味)가 붙었습니다. 달릴수록 나와 아주 잘 어울리는 스포츠라고 생각됐습니다. 일단 달린다는 자체(自體)가 좋았습니다. 숨을 헉헉거리며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도 좋았고, 헉헉거리며 신체(身體)를 고통(苦痛)으로 몰아붙이는 것도 좋았습니다. 그 고통의 순간(瞬間)이 지나면, 쾌감(快感)의 시간(時間)이 온다는 것은 이미 오랜 등산(登山)의 경험속에서 산악(山岳)달리기를 해봤기 때문에 알고 있었습니다. 남보다 이른 시간에 출근(出勤)하여 아무도 없는 이른 아침의 신선(新鮮)한 공기 가득한 캠퍼스의 트랙을 달리며 Simon & Garfunkel‘The Boxer’ 산울림의 아니 벌써영화 마라톤의 주제가인 불의 전차등을 들으며 달리는 즐거움이란 하루의 선물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당분간 그것도 금기사항(禁忌事項)일 뿐입니다. 수술에 따른 모든 치료가 완료(完了)되면, 나는 다시 달릴 것입니다. 그 끝에 마라톤대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노래 : 지금은 아니지만, 이십여년전만 해도 나는 한 잔 마시고 노래방에 들어가 혼자서 세 시간 정도는 간단히 놀고 집에 올 정도로 노래를 즐깁니다. 젊어서 생맥주집과 커피샵에서 DJ를 했을 만큼 노래를 좋아한 이유도 있기 때문이겠죠. 노래 또한 술과 사시미의 삼박자가 동반되어야만 여법한 어울림이 된다고 보겠습니다!!!^^~. 소리없이 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날이면, 병동(病棟)의 통로 창가에 들어붙어 생각나는 노래를 의사의 지시를 상기하며 조용조용 부르다 보면 노래는 어느 새 나도 모르게 울음 섞인 울먹거림이 되어 이게 무신 청승인가 싶어 절로 뚝 그치게 됩니다. 암환자에게는 노래도 사치인가요.

 

생선회 :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개는 생선회를 즐깁니다. 내가 생선회를 배운 것은 30대의 직장인 시절 다니던 회사의 부산대리점장과의 어울림에서였습니다. 부산으로 출장만 가면 그 대리점장이 횟집으로 이끌어 술판을 벌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바다와 오랫동안 연을 기대고 살았던 시절의 추억도 사시미를 즐기는 이유일 것입니다. 팔딱팔딱 뛰는 싱싱한 생선 한 마리를 주의깊게 회를 떠서 맛있는 고추장과 초를 적당히 섞은 뒤에 잘 갠 와사비를 추가로 섞어서 회 한 점에 찍어 입안에 넣고 소주 한 잔을 마져 털어 넣는다면 천국이 부럽지 않음입니다. 여름이 깊어지기 시작하자 전어회의 계절(季節)은 전개(展開)됩니다. ~ , 지금 나는 입술이 부르트도록 고인 침을 삼키면서 인동초(忍冬草) 고통(苦痛)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대수술이 끝나고 12회차의 항암치료(抗癌治療)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주일마다 23일간 병원에 입원하여 항암주사를 연속적으로 맞고 퇴원(退院)하는 프로그램입니다. 그러니까, 한 달에 두 번 있는 셈이죠. 토탈 6개월이 소요됩니다. 영화에서 봐 왔고 소문으로 들은 항암치료의 과정(過程)은 정말 피하고 싶었습니다. 항암치료의 과정중에는 머리카락이 모두 빠지고 입술이 부르트며 뼈만 남도록 앙상하게 몸이 마르고 음식을 먹지 못하며 음식의 냄새만 맡아도 토하기 일쑤이고 심한 경우엔 손발톱도 변형이 온다는 것입니다. 항암제 주사(注射)속의 액체는 암()을 이루고 성장(成長)시키는 세포(細胞)와 세균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인체의 건강에 도움을 주는 이로운 세포와 건강(健康)한 몸을 지탱해 주는 세균(細菌)조차도 무차별적으로 섬멸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구러 12회차중 11회차를 끝냈습니다. 머리카락 숱이 조금 빠졌으며, 고생을 해서인지 흰머리카락이 보다 늘었습니다. 프로그램을 마치고 퇴원하면 어떤 날은 중풍 초기 환자처럼 몸 전체가 앞뒤로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약기운으로 퇴원한 하루 동안은 술 취한 녀석처럼 얼굴이 벌겋게 된 채로 지낸 날도 있었으며, 손끝과 발끝은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항상 찌릿찌릿 거립니다. 최근에는 걸음을 걸으면 발바닥에 스프링이 달린 것처럼 꿀렁꿀렁 거리는 느낌 때문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옵니다. 시력(視力)은 조금 떨어지고 후각(嗅覺)이 예민(銳敏)해졌습니다. 입원중에는 음식냄새만 맡아도 속이 울렁거려 식사를 거르기 일쑤입니다. 육식을 좋아하지 않는데, 항암제(抗癌劑)를 극복(克復)하기 위하여 보신탕과 오리탕과 삼계탕을 자주 먹었습니다. 나름의 살기 위한 발버둥이라 하겠습니다. 6회차를 마치고 Pet CT촬영을 했지만, 암세포의 전이(轉移)나 확장(擴張)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12회차가 끝나면 다시 촬영(撮影)을 할 것입니다.

 

나는 봄 못지않게 가을/ 만추(晩秋)를 좋아합니다. 단풍이 화려한 가을은, 왠지 좋은 시절(時節)을 흠씬 만끽(滿喫)하며 보내고도 못 다 푼 젊음이 아쉬워 온갖 치장으로 가꾼 채 종종걸음으로 더 추워지기 전에 사랑을 찾아 헤매는 여인의 모습 같아서 오히려 애처로워 보이기에.. 보다는 그 마져도 모두 포기하고 내려놓은 낙엽(落葉)이 모두 떨어진 늦은 가을 초겨울 직전의 휑하다싶을 만큼의 황량한 정서(情緖)가 한결 마음에 듭니다. 이브 몽땅의 ‘Autumn Leaves-Les Feuilles Mortes(고엽/枯葉)’도 내가 말하는 계절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어떻게 그대를 잊을 수 있나요/ 그 때 그 시절 인생(人生)은 그렇게도 아름다웠고/ 태양은 오늘보다 더 작렬했었지요/ 그대는 나의 가장 감미로운 친구였어요/ 하지만 나는 후회 없이 지내고 있답니다/ 그리고, 그대가 불렀던 그 노래를/ 언제나 언제까지나 듣고 있을 겁니다.”

 

그렇게 가을이 소리없이 무르익어 낙엽이 떨어지며 시간(時間)이 흐르면, 나는 남도(南道)의 고매화(古梅花)나무를 보러 갈 것입니다. 수백년의 시간의 흘러 이미 가지는 마르고 늙어 비틀어져 있지만, 주변 근동 마을 모두를 취하게 할 만큼 가득 품었던 신비로운 향기(香氣)와 단아하면서도 화려하며 기품있는 아름다운 꽃을 보여주었던 늙은 매화나무를 보러 갈 것입니다. 곧 맞이할 한겨울의 북풍설한(北風雪寒)을 견디고 봄이 찾아온다면, 고매화나무는 신비로운 향기와 함께 아름답고도 온화한 미소(微笑)와 같은 꽃을 피워낼 것입니다. 다시는 꽃을 피워낼 수 없을 것만 같은 몸매를 하고도 고매(古梅)는 반드시 다시 꽃과 향()을 피워낼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설사 봄이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 하여도 고매(古梅)는 슬퍼하거나 고통스러워하지 않으며, 아름답고도 즐겁고 화려해서 슬펐던 추억(追憶)을 간직한 채 그 겨울을 기꺼이 맞이하여 바람이 불면 부는대로 흔들리며 허허로움을 즐기고 순금(純金)으로 빛나는 별과 달을 친구삼아 지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달이 휘영청 밝은 날이면 술동이를 옆에 끼고 친구를 기다릴 것입니다.

 

당신 없이도 또 봄날이어서

살구꽃 분홍꽃 저리 환합니다.

 

언젠가 당신에게도 찾아갔을

분홍빛 오늘은 내 가슴에 듭니다.

 

머잖아 저 분홍빛 차차 엷어져서는

어느 날 푸른빛 속으로 사라지겠지요.

 

당신 가슴속에 스며들었을 내 추억도

이제 다 스러지고 말았을지 모르는데

살구꽃 환한 나무 아래서 당신 생각입니다.

 

앞으로 몇 번이나 저 분홍빛이 그대와 나

우리 가슴속에 찾아와 머물다 갈 건지요.

 

잘 지내 주어요 더 이상 내가 그대 안의

분홍빛 아니어도 그대의 봄 아름답기를...”

 

                                            -----    봄안부/ 강인호

 

만추(晩秋)가 올지라도 이토록 봄은 나의 마음속 가득할 것입니다. 매서운 바람이 세차게 불고 찾는 이조차 없어도, 고매(古梅)는 비록 늙고 말라 비틀어졌지만 초연히 버티고 서서 나머지 세월(歲月)을 유유히 즐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