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晩秋)
봄이었다고 기억된다. 고등학교 일학년이었던가의 어느 날, 음악시간이었다. 얼핏 귓가로 들었던 새로 부임한 선생이 수업시간에 들어섰다. 적당한 키에 눈이 유난히 아름답고 입술이 귀엽게 생겼으며 긴 머리가 잘 어울리는 대학을 막 나온 새내기 선생님이었다. 치마 아래로 보이는 다리가 가지런하고 보기에 좋았다. 해벌쭉한 얼굴로 웅성거리는 녀석들에게 반장인 내가 “일동 차렷!”을 외치며 주의를 집중시키고 “선생님에게 경례!”를 외치며 인사를 하고 수업은 시작되었지만, 우리 모두의 또랑또랑한 눈망울들은 모두 새내기 여선생님의 일거수일투족에 시선이 끌려갔다 끌려오곤 하였다.
피아노앞에 앉은 선생님이 우리에게 나누어준 유인물 악보의 제목은 ‘애니로니(Annie Laurie)’였다. 모두들 조용히 하고 우선 잘 들어보라며 선생님은 잠시 호흡을 고르고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하였다. 곡이 좋은 것인지 연주 솜씨가 좋은 것인지 듣기에 아주 좋았다. 스코틀랜드민요라고 하였는데, 듣기에 구슬픈 곡조였지만 우리의 정서에 맞는 듯하였다. 연주를 마친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음악이 어떠냐고 물었으며 썩은 미소를 띈 채 연주를 들었던 우리들은 “아주~ 좋았습니다!!!”를 합창하며 히히덕거렸다.
연주를 마치고 피아노앞을 천천히 떠나 교탁 앞으로 이동한 선생님은 반장인 나를 불러 세우더니, 악보에 적힌 가사를 일어서서 소리내어 읽어보라고 하였다. “옛날 거닐던 강가에 이슬 젖은 풀잎/ 그리워라 애니 로리 언제나 오려나/ 그대와 만나던 세월 흘렀어도/ 그리워라 애니 로리 꿈속에 보이네./ 샛별 같은 그 눈동자 아름다운 얼굴/ 이 세상의 아무것도 비할 수 없어라/ 어여쁜 네 모습 나 잊지 못하리/ 사랑하는 애니 로리 길이길이 살겠네.” 조금은 촌스러운 가사였지만, 나는 일부러 조금 멋을 부려 읽었다. 다 읽어내자, 선생님은 입가에 미소를 띈 채 잘했다고 공치사를 하였다.
그 날 이후, 그 음악선생님이 있어서 나의 학교생활은 ‘내 맘에 외로움이 알알이 맺히고’ ‘태양이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더위가 푹푹 삶아도’ ‘거친 수업의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는 이제 즐거울 수 행복할 수 있었던 거다. 내 마음을 아는지 선생님도 나처럼 낯선 학교와 낯선 환경에서의 외로움을 나를 통하여 달래려는 것처럼 나에게 더없이 따뜻하고 다정하였다. 또 하나의 변화라면, 그동안 평소에 잘 어울려 다녔던 친구라면 친구였던 급우들이지만, 웬수가 아니면 하이에나와 같은 그들 짐승들과의 학교생활은.. 돌연 교정의 화단에 만발한 장미꽃처럼 인생은 아름다웠으며 감미로웠다.
선생님과 나는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시내의 식당에서 밥도 같이 먹고 선생님의 체취가 물씬한 자취하는 집에서 선생님이 해주는 요리도 먹어봤으며 방바닥에 같이 엎드려 책도 읽었다. 일요일에는 극장도 함께 들어가서 봤지만, 무슨 영화를 봤는지는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아프리카의 하이에나와 진배없는 내 친구들의 애절한 간청에 의하여 간혹 선생님과 함께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면 놈들은 넋을 놓고 침을 질질 흘리며 들었고 내가 조금만 과장하여 말을 하면 신음소리를 내며 끙끙거리고 들었던 거다. 과장을 하지 않아도, 우리들의 사랑(응?^^)은 찬란하고 아름다웠다.
‘한 송이의 장미같은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던 거다.
한 송이의 국화꽃같은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던 거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당신(?^^)이여...
아름다운 그대(ㅎㅎ)를 만나려고/ 지난 시간 동안엔 무서리가 저리도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그렇다. 선생님은 진정 나의 꽃이요, 그리움이요, 행운이며 거시기였던 거다!
그렇게 꿈과 같이 아름답고 달콤했던 봄과 여름이 가고 가을이 깊어가더니, 높은 산의 서리와 함께 만추가 왔다. 어느 철학자는 인생에 있어서 행복은 짧고 슬픔이 더 길다고 했다. 단막극처럼 로드무비처럼 아름다웠고 슬픈 현빈과 탕웨이의 만추도 미쟝센이 쓸쓸하고 우수 가득하였는데 나의 만추도 예외가 아니었던 거다. 만추와 함께 그토록 행복했고 다정했던 우리에게도 문득 슬픔의 시간이 다가왔다. 선생님은 가족들이 이민을 가더라도 한국에 남게 되었던 것인데, 갑자기 가족들과 함께 모두 호주로 이민을 가도록 변경되었다는 것이다.
‘발자욱을 봅니다/ 발자욱을 봅니다/ 모래위에 또렷한/ 발자욱을 봅니다.
어느 날 벗님이 밟고 간 자욱/ 못 뵈올 벗님이 밟고 간 자욱/
혹시나 벗님은 이 발자욱을/ 다시금 밟으며 돌아오려나.
님이야 이 길을 올 리 없건만/ 님이야 정녕코 돌아온단들/
바람이 물결이 모래를 씻겨/ 옛날의 자욱을 어이 찾으리.
발자욱을 봅니다/ 발자욱을 봅니다/ 바닷가에 조그만/ 발자욱을 봅니다.’
----- 별후/ 양주동
그렇게 만추는 나에게 슬픔으로 다가왔다. 어쩌면, 일찍부터 만추는 나에게 아픔으로 예정되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꽃도 빼앗기고 잎도 빼앗기고 사랑마져 빼앗긴 고통스러운 계절이 되고 말았던 거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만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그리고, 이제 다시 만추의 계절이 왔다.
지금도 나는 ‘애니로니(Annie Laurie)’를 들으면 그 선생님이 떠오른다. ‘지금은 어디에서 행복할까/ 외로운 내 가슴에 살며시 다가와서/ 언제라도 감싸주던 다정했던 사람/ 철없이 사랑인 줄 알았었네/ 지금도 보고싶은 그 때 그 선생님.’ 샛별같은 눈동자의 아름다운 얼굴 스코틀랜드의 민요와 함께 사랑을 키웠던 즐거운 시절들은 나의 가슴 깊은 곳에 행복한 추억으로 각인되어 있다. 차가운 바람 그리고 낙엽과 함께 외로움 가득한 가을이 왔지만, 이처럼 우리 모두에게 만추(晩秋)는 추억의 계절이다. 한 낮의 태양은 오곡백화를 꽃 피우지만, 별은 석양에 뜬 별이 가장 아름답다. 자연의 이치련가, 공교롭게도 석양은 만추와 잘 어울린다.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나의 계절도 이제 바야흐로 만추이다. 다시 한 번 더 이번 만추에는 또 다른 추억을 꿈꾸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