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향가(梅香歌)
벌써 3월 하고도 중순을 코앞에 두고 있습니다. 입춘이 지나고도 한 달이 넘었으며 경칩마져도 지났건만, 나는 아직도 여태껏 웅크리고 창밖만 내다보며 있습니다그려. 그렇지만 나는 마치.. 알짱거리며 찌를 툭 툭 건드리고 있는 수면하의 붕어를 바라보며 낚싯대로부터 한 뼘의 거리를 두고 손아귀에 진땀을 흘리며 낚싯대를 움켜 낚아챌까 말까 망설이는 붕어낚시꾼 마냥... 하지만, 내가 마냥 창밖의 구름만 바라보고 넋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눈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지만 기실은 바람의 간을 보고 있음입니다.
다시 말해, 스치듯 흘러가는 바람속의 온도를 맛보고 있음입니다. ‘조금 만 더’ ‘며칠만 더’ ‘이 비가 가고 난 뒤에’ 하고 혼자 중얼거리며 타이밍을 엿보고 있음인데 아직은 바람속의 온도가 맘에 들지 않는 겁니다. 나의 조바심보다 성가신 것은, 매스컴에서 봄이 왔다고 떠드는 것일 뿐 아니라 한 술 더 떠 피지도 않은 매화가 피었다고 떠들면서 작년 사진을 버젓이 올려놓은 채 소란을 부려.. 조용하고 한가로우며 따사로운 가운데 사뿐사뿐 즈려밟고 오셔야할 봄처녀의 정신이 산란할까 걱정입니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사람들에게 춘심을 불어넣으며 남도에는 꽃소식이 붕붕거리고 있음에 꽃과의 인연도 타이밍이라며 서울과는 다른 남녘의 봄을 즐겨보라고 호들갑을 떨면서 ‘금둔사’에 이미 매화가 피었고 ‘선암매’가 눈을 틔웠으며 ‘통도사’의 홍매가 피었다고 야단법석입니다. 그 호들갑의 속사정에는 수도권 사람들과 상춘객을 남도로 유혹하여 예년보다 어려운 경기를 띄워보고저 하는 얄팍한 상술과 관리들의 꼼수가 매스미디어와 쿵짝이 맞아 펌프질을 하고 있는 거겠죠.
물론 ‘통도사’의 ‘자장매’는 피었습니다. 그러나, ‘금둔사’의 ‘납월매’도 아직은 눈이 터지지 않았으며 ‘선암사’의 ‘선암매’도 봉우리는 맺혔으나 눈은 아직 터지지 않았습니다. ‘백양사’의 ‘고불매’와 ‘화엄사’의 홍매/ 백매 역시도 아직은 이고요. 천리 먼 길의 안부를 내 어찌 아랴만은, 지난 어느 날 한국불교의 ‘템플스테이’라는 프로젝트에 깊숙이 관여한 바 있는 인연으로 알음 알게 된 스님들과 사무장과 종무보살들께서 내가 매화를 좋아함을 알고 있기에 바람결에 실어 보내주는 소식에 있습니다.
나이는 들었다 하오나, 내 어찌 들썩거리듯 달뜬 연애감정같은 꽃몸살이 없겠나요. 시인 정호승은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하며 오래 묵어 더욱 수려한 우리의 절 선암사를 노래했으며 그 고즈넉한 절의 무우전 돌담길 한 켠에 우아하게 피어있는 홍매야말로 숨을 멈추게 하고도 남으며, 다소 과장섞인 납월(臘月) 즉 음력 섣달에 핀다하여 ‘납월매(臘月梅)’라는 애칭을 갖는 ‘금둔사’ 홍매의 고혹적인 아름다움을 소인이 감히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나요.
매화는 벚꽃처럼 화사하지도 않으며 낙하 이후의 목련처럼 부끄럽지도 않습니다. 화려하면서도 소박함을 잃지않으며 도도하도록 우아하면서도 따스함을 안고있으니 과연 ‘꽃중의 꽃’이라하기에 부족함이 없기로 안목 높은 선비들의 총애를 받지 않았겠나요. 고매의 수령은 최소가 300~ 400년으로 500년 정도는 예사인 겁니다. 말라비틀어진 고목에서 그토록 아름다운 꽃이 피어난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대단한 일이지만 향기 또한 믿기지 않을 만큼 매혹적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내고 있는 최고급 향수도 흉내낼 수 없는 그 향취는 아마도 천상의 샹그리라의 향기가 이러하지 않겠는가 싶다고 하겠습니다.
어찌하였건, 꽃소식이 들려옴에도 아직 행랑을 챙기지 않음은 남도 먼 길을 떠남에 있어서 이왕이면 한 번 출행에 여러 곳의 꽃들을 함께 둘러보고픈 얄팍한 잔꾀가 있음을 감추지 못하겠나이다. ‘선암매’ 가 터질 무렵이면 비슷한 지역이기에 담양의 ‘명옥헌매’와 ‘죽림재’의 ‘죽림매’/ ‘독수정’의 ‘독수매’/ ‘계당매’/ ‘미암매’/ ‘하심매’도 함께 눈이 터져주기를 바라는 마음 가득하며.. ‘예담촌’의 ‘분양매’와 ‘단속사지’ ‘정당매’/ ‘덕산서원’의 ‘남명매’ 또한 ‘백양사’의 ‘고불매’와 함께 동시다발로 터져주기를 기도하는 마음도 한 몫을 하고 있음입니다.
마치 전설속의 꽃나무를 만난 것만 같은 기분이 가득한데 향기 또한 매혹적이니 그 향취가 오래도록 이어지려면 마음을 비우고 욕망을 내려놓아야만 할 것 같습니다. 자고로, 늙은 꽃나무에는 꽃의 만발을 기대하지 않아야하며 향기만을 조용히 음미하라 했습니다. 그러나, 꽃이 적게 피었거나 많이 피었거나 그 향기가 짙어 대강의 언저리만 맴돌다 와도 오랫동안 꿈결처럼 그 향을 잊지 못하게 됩니다. 그 느낌과 기운을 알기에 매화나무 꽃그늘 아래를 항상 오랫동안 서성이다 오기 마련인데, 눈물 가득했던 지난해를 보낸 올봄에는 또 얼마를 더 기웃거리다 오려는지 마음은 이미 그 꽃그늘 아래에 하마 머물러 있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