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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Led Zepplin 2015. 5. 20. 02:58

 

 

 “저 쉬임없이 구르는 윤회의 수레바퀴 잠시 멈춘 자리/ 이승에서, 하 그리도 많은 어여쁨에 홀리어 스스로 발길/ 내려놓은 여자, 그 무슨 간절한 염원 하나 있어, 내 이제/ 사람으로 태어났음이랴 (중략) 잠든 가지마다 깨어나며 빠져드는 어리어리/ 어지러움증, 산아래 돌부처도/ 덩달아 어깨춤 추는 시방/ 세상은 첫사랑 앓는 분홍 빛 봄” (유안진/ )

 

지방소도시의 주차단속원 다림(심은하)은 사진관 주인인 정원(한석규)에게 한 발자국 다가서지만 정원은 다림에게서 두 발자국 물러선다. ‘초원사진관에 걸린 사진 한 장으로 남은 다림의 모습에서 정원의 소박한 사랑이 가슴 시리게 전해오는 허진호 감독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8월보다도 12월보다도 5월에 더 보고 싶은 영화이다.

 

번역서 그리스 로마신화〉〈그리스인 조르바로 유명한 작가 이윤기의 단편 봄날은 간다에서 시간과 세월에 저항하는 인간에게 말없이 흘러가는 봄날은 처참하다. 시간에 저항하는 인간에게 봄날은 간다만큼 잔인한 노래는 없다. 세월로부터 진급을 보장받지 못하는 인간들, 세월로부터 퇴직금도 연금도 약속받지 못하는 인간들이 누구인가? 시간에 방울을 달지 못한 인간들이다. 시간의 유한성을 이야기하며 자연의 순리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이 삶의 본질적 가치라는 작가의 말은 이 봄에 별로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 나무지?/ 벚나무 아래서 그녀와 만나는 것을 지켜본 옛 친구는/ 시들한 내 첫사랑을 추억한다 (중략) 벚나무 아래서 만났던 첫사랑 그 소녀도 없다./ 터질 것처럼 뛰는 가슴을 가졌던 열일곱 나도 없다/ 돌아보면 화무십일홍/ 잔치도 끝나기 전에 꽃이 날린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삶에 그냥 스쳐 지나가는 구경꾼일 뿐이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우는/ 누구에게도 그런 알뜰한 맹세를 한 적은 없지만/ 봄날은 간다/ 시들시들 내 생의 봄날은 간다” (정일근/ 봄날은 간다)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신작로 위에는 흙먼지, 더러운 비닐들/ 빈 들판에 꽂혀있는 저 희미한 연기들은/ 어느 쓸쓸한 풀잎의 자손들일까 (중략) 봄날이 가면 그 뿐/ 숙취는 몇 장 지전 속에서 구겨지는데/ 몇 개의 언덕을 넘어야 저 흙먼지들은/ 굳은 땅 속으로 하나둘 섞여들는지“ (기형도/ 봄날은 간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중략)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 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피천득 선생은 수필에서 "잃었던 젊음을 다시 가져보게 하는 봄은 헤어졌던 애인을 만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라 하였으며, 롱펠로우도 "처녀들이여5월은 오래 머무르지 않으니 마음껏 젊음을 누려라. 청춘의 향기를 마음껏 사랑하라"고 노래함으로써 봄을 찬미했지만, 우리 앞의 봄은 허무하도록 짧다. 마치 우리들의 삶을 조롱하듯이 말이다.

 

나이 들어가면서, 봄을 맞이하는 설레임과 기쁨을 표현하는 글보다 봄을 떠나보내는 아쉬움과 서글픔을 노래하는 싯귀가 더욱 마음에 절절하게 와 닿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인지 "봄을 붙잡으려 하나 머무르지 않으니/ 봄이 가고 나면 사람도 쓸쓸해지네 (留春 春不住春歸 人寂寞)"라고 노래한 백거이의 글은 꼭 내 마음을 미리 알고 쓴 시처럼 느껴진다.

 

살다보니 언제부터인가 최근에는 봄이 허망할 정도로 부쩍 짧아진 것을 느끼고 있다. 정말 봄을 도둑맞은 기분이다. 이것은 필경 문명에게 도둑맞은 것이 자명하다. 봄은 그 고운 눈웃음으로 나의 애간장을 다 녹이며 내 곁에 오래 머무르겠다고 약속을 해놓고는 어느새 토라져버린 애인처럼 휙 돌아서서 마주잡던 술잔을 놓고 붙잡을 틈도 주지 않고 저만치 달아나 버린다.

 

점심을 먹고 식당 밖을 나오니 봄비가 오신다. 이 봄비 속으로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듯이 봄날은 속절없이 떠나가고, 누구라서 피할 수 있겠나 우리 또한 하릴없이 나이 들어간다. 다시 돌아오는 내년 봄에는 피천득 선생의 말처럼 젊음을 느끼면서 다시 만나는 봄을 감격스러워 하며 찬미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늘,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를 바라보며 한영애의 봄날은 간다노래를 들으면서 낮술로 은근하게 취하고픈 마음 간절하다. 이렇게 봄날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