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과 김상옥 열사(烈士)
관람객 천만명의 영화 《암살》은 일본군 사령관과 친일파를 암살하려는 독립군들의 비장한 이야기를 배우 이정재/ 전지현/ 하정우를 캐스팅하여 《범죄의 재구성》 《도둑들》의 최동훈 감독이 그린 영화이다. 영화 《암살》 속 ‘하와이피스톨’의 배우 하정우처럼 쌍권총의 달인이었던 실제의 인물이 있었으니 그 분이 바로 ‘상해임시정부’의 비밀결사단체인 ‘의열단’의 김상옥 열사이시다. 영화속 ‘하와이피스톨’의 캐릭터는 아마도 김상옥 열사가 그 롤모델이 아닐까 싶다. 열사께서는 일본 총독을 암살하려고 밀입국했지만, 추적하며 따라붙던 상하이 주재 일본 경찰로 인해 서울 한복판에서 수백명의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인 이야기는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마져 일으켜 뻥튀기가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싶을 지경이다. 그러나, 이것은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실화인 거다.
김상옥 열사는 1923년 국내로 밀입국 총독 사이토에 대한 암살 작전에 나섰으며, 그 해 정월에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 경찰은 열사를 용의자로 지목하고 추적했다. 일본 경찰은 열사의 은신처를 발견 20여명의 무장 경찰을 투입했으나, 열사는 쌍권총을 들고 서울 시내에서 총격전을 벌렸던 거다. 김상옥 열사는 총격전에서 일본 경찰 유도사범이며 형사부장인 다무라를 사살했고 지휘관 우메다와 이마세 경부를 포함하여 여러명에게 중상을 입혔으며, 대설이 쌓인 남산을 맨발로 걸어서 넘은 채 포위망을 뚫고 바람처럼 유유히 사라졌다. 민족지임을 자칭하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당시의 김상옥 열사를 ‘범인’ 또는 ‘중대범인’이라고 쓴 기사를 읽으면 쓴웃음만 나온다.
남산을 넘은 열사는 금호동의 암자 안장사에서 승복과 짚신을 빌려 변장하여 효제동 동지의 이혜수의 집에 은거하며 거사를 준비하던 중 발각됐다. 일본군은 거의 천여명에 가까운 기마부대와 무장 경찰을 투입해 포위작전을 벌였으며, 권총으로 무장한 형사들이 1선으로 이혜수의 집을 둘러싸고 2선과 3선에는 장총을 든 무장순사들과 기마 순사대가 배치됐다. 마지막 4선에는 헌병대와 경찰차들이 최종 저지선을 구성했다. 바야흐로, 한명 대 천여명의 전투가 전개된 거다. 당시 상황을 보도한 기사와 정황 등을 찾아보면 영화가 쪽팔린다. 김상옥 열사는 건물 지붕을 뛰어 넘나들며 수많은 일본 경찰들과 격전을 벌였는데, 이 장면은 영화 《암살》에서 전지현의 모습과 그대로 오버랩된다. 오직 ‘모제르 7연발’과 ‘브로니켈 12연발’의 쌍권총만으로 4시간에 가까운 총격전을 벌린 열사께서는 총지휘관격인 구로다 경부를 사살했을 뿐만 아니라 10명이 넘는 일본의 무장 검찰과 경찰도 함께 도매금으로 깨 팔러 보냈으며 부상자를 포함하면 숫자는 수십명까지 확대된다.
열사의 최후는 처절하다. 일본군이 쏜 총알 11발을 온몸으로 맞은 채 탄환이 떨어지자, 마지막 남은 총 한발을 가슴에 겨누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장렬하게 순국하셨다. 당시 열사의 의거를 보도한 호외는 김상옥 열사께서 “숨이 진 후에도 육혈포에 건 손가락을 펴지 아니하고 숨이 넘어가면서도 손가락으로 쏘는 시늉을 했다.”고 표현했다. 열사의 고귀한 죽음은 어느 영화보다도 그토록 장엄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상옥 열사의 의거는 해방 이후 15년 동안 정부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2급)’이 추서된 것은 1962년 3월 1일이다. 다시 한 번 김상옥 열사의 영전에 감사의 말씀을 바친다. 영면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