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향(梅香)의 봄에 쓰는 편지
K형!
얹그제가 1월이었는데 이러구러 어느 새 봄을 알리는 4월이 되었습니다그려.
봄볕이 화사한 오늘 낮 내가 좋아하는 막 피어난 자목련을 바라보다가 문득 중국 최고의 시선(詩仙)이라 불리는 당(唐)시절의 시인 이백(李白)이 지은 장진주(將進酒)의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그대 보지 못했는가,
황하의 물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세차게 흘러 바다에 이르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네.
또 보지 못했는가,
귀한 집에서 거울 보며 백발을 슬퍼하는 것을.
아침에는 푸른 실 같던 머리카락이 저녁이면 눈처럼 하얗다네.
살면서 뜻을 얻으면 즐기기를 다할지니,
금술잔을 달빛 아래 그냥 두지 마오.”
지난 겨울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듯이, 바다로 한 번 흘러간 황하의 물이 되돌아오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네 인간의 삶도 한 번 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하죠. 또한, 귀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귀와 권세를 누리는 사람 역시 가는 세월은 어찌할 수 없음입니다.
아침에는 푸른 실(靑絲)같던 검은 머리카락이 저녁에는 흰 눈처럼 백발이 되고 마니 사람의 삶이란 이렇게 허무하도록 지나가 버립니다그려.
가만히 바라보면 인생이 이렇게 허무하게만 느껴져 때로는 슬픔이 밀려오기도 합니다. 그러하니, 그 허무와 슬픔을 술로써나마 달래고 즐기자는 것이 시선 이백의 마음이 아닐런지요.
려말(麗末)의 중신(重臣)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께서 나이 듦에 대해 짧게 쓴 시 “짧은 머리 듬성듬성 빗을 대기도 미안한데(短髮蕭蕭不滿梳)/ 거울 속 마주한 이 남김없이 하얗구나(鏡中相對白無餘)/ 소년시절 모습은 모두 사라졌어도(少年風采都消盡)/ 호기는 아직 남은 것을 누가 알까?(豪氣誰知常未除)”라는 대목은, 부지불식 어찌어찌 세월이 흐르다 보니 호기는 아직 젊은 시절 못지않은데 나이는 이미 많이 들었다는 자탄에 나 또한 공감하는 나이가 되었더이다. 비록 나이는 들어가지만 아직 총명이 남아있어서 나머지 삶에 어리석은 아집과 편견이 없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마음입니다.
K형!
지난 일요일에는 내가 즐겨보는 TV프로 ‘복면가왕’에서 연승을 달리는 ‘음악대장’이라 불리는 가왕이 신중현의 곡 ‘봄비’를 대단히 애절하게 불러서 내 가슴을 서늘하게 적셔주었습니다. 이처럼 추억의 노래 한 곡에도 즉각 감동한다는 점이 또 나이 들어가는 나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어찌 ‘봄비’ 한 곡 뿐이겠는지요. 한 시절 우리가 즐겨 부르고 들었던 ‘가을비 우산 속’ ‘긴 머리 소녀’ ‘등불’ ‘웨딩 케익’ ‘촛불’ ‘하얀 손수건’이 있었고 ‘Beatles’ ‘Simon & Garfunkel’ ‘bob dylan’ ‘Eagles’ ‘Queen’ 등등이 떠오릅니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위장술로 공부를 하며 눈빛이 반짝이는 청년이었지만, 사실은 하드락에 몰두할 뿐 희망을 포기했던 나의 암울했던 젊은 시절.. ‘black Sabbath''Grand Funk Railroad''Led Zeppelin'에 심취하며 거의 인생을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보리밭’‘봄처녀’‘산타루치아’를 목청터지게 부르며 교과목의 클래식에 입문했던 까까머리 철부지들은 ‘베토벤의 월광소나타’‘5번 운명교향곡’‘바그너의 탄호이저 서곡’‘요한 스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등을 들으며 무게도 잡아봤지만 그저 그렇다는 심드렁할 뿐이었는데, 바쁜 직장초년생의 어느 휴일 날 방바닥에 누워 FM Radio에서 흘러나오는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바이젠’을 듣고는 문득“아, 클래식에도 이렇게 사람 가슴을 후벼 파는 대단한 음악이 있구나!!”하는 감탄이 온 이후에 차츰 클래식에 빠져들었던 것이죠.
청카바와 장발로 콧수염까지 기른 채 히피처럼 지내던 시절, 한국에 있는 미국법령의 지배를 받는 당시의 공식적인 미국영토이며 내국인 출입금지 지역인 미군진영의 장교클럽과 명동의 생맥주홀/ 여학생들이 바글바글 오던 제과점에서도 DJ를 할만큼 Pop Music에 몰두했던 저와는 다르게 오롯이 Classic에 집중했던 K형은 형의 집에 놀러간 저에게 귀한 Disc를 구했는데 한 번 들어보겠느냐는 호의에 그러마고 응낙을 하고는 턴테이블에 당시에 그 귀한 도이치 그라마폰의 오리지날 디스크를 올린 지 침묵의 5분도 채 안되어 “형, 그런데 우리 지난달에 소주 마셨던 그 낙지집이 어디쯤이었더라?” 따위의 집중력없고 무개념한 엉뚱깽뚱한 소리나 지껄여대던 나를 깔깔거리며 거리낌없이 대하여 주었던 모습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합니다.
나이들면서 오페라를 좋아하게 된 저는 최근 피에트르 마스카니가 작곡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Cavalleria Rusticana>에 몰입되어 ‘2015년 잘츠부르크 부활절 페스티벌 최고 화제작 공연실황’으로 구경하였습니다. 내용은 대부분의 오페라가 주로 다루는 성악적인 기교가 아닌 드라마틱한 극의 구조와 또한 우아하고 고급스런 귀족과 왕실의 이야기가 아닌 서민의 일상을 그린 배반과 복수라는 단순한 막장 치정극이며 제목은 ‘촌뜨기 기사도’이지만, 그 내용만큼은 21세기 최고 성악가로 추앙받는 독일의 스타 테너 '요나스 카우프만'과 세계적인 지휘자 '크리스티안 틸레만'과의 완벽한 합동 공연으로 아름답고 우아하기로 유명한 아리아와 간주곡이 있었기에 그 막장 치정극은 예술로 승화되었다고 보여지며 더욱 놀라운 점은 여러 차례 이어진 커튼콜입니다. 우리나라 무대에서 보여지는 왠지 속보이는 관객들의 박수세례가 아닌 진실로 마음속에서 우러난 진심어린 박수갈채가 끝도 없이 이어짐을 보고 그들의 오페라가 국민들에게 깊숙이 녹아들어 있음을 절감하였다는 것입니다.
K형!
우리나라는 작금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 그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공자께서는 정치를 "바른 마음과 자세로 세상을 바르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궁극적으로 백성들이 굶지 않고 마음 편히 생업에 종사하며 행복을 누리는 세상을 구현하는 것이 정치의 목적이라는 것이죠.
촌철살인(寸鐵活人)의 명언을 많이 남겼으며 프랑스를 두 번 구한 전략사상가인 지도자 샤를 드골은 “정치는 기술이고 봉사이지 이용해먹는 게 아니다. 정치는 현실을 통하여 이상(理想)을 지향하는 행위이다(Politics, when it is an art and a service, not an exploitation, is about acting for an ideal through realities.)”라고 말했답니다.
서양의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보다 뛰어난 이론과 실천을 결합한 내가 존경하는 경세가(經世家) 정도전의 민본사상은 ‘군주(君主)보다는 나라를, 나라보다는 민(民)을’ 우위에 두었습니다. 백성은 곧 나라의 근본이자, 곧 군주의 하늘이라는 거죠. 통치의 모든 정당성을 오로지 민심에 두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민심의 소재는 예나 지금이나 바로, 경제에 있는 겁니다. 정도전 선생은 “백성은 먹는 것이 하늘이다. 사람이란 의식(衣食)이 족해야 예(禮)를 아는 법이다”라고 말합니다.
선생은 항상 실천이 전제되지 않는 사상은 죽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강조하였으며, 자신의 학문을 옛사람의 덕을 밝히고 만민을 새롭게 하는 실학(古人明德新民之實學)이라고 할 정도로 실천궁행(實踐躬行)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선생은 자신이 속한 당파의 이익보다는 민족과 백성이 처해있는 아픈 현실과 모순을 외면하지 않았으며 비록 이루지는 못했지만 고구려의 고토(古土) 회복이라는 큰 꿈을 꾸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동/ 서양간의 다양한 종교를 통합하여 하나의 독창적 철학인 ‘씨알사상’을 만든 함석헌선생은 “정치란 선악을 판단하는 종교행사가 아닐세. 덜 나쁜 놈을 골라 뽑는 과정이라네. 그래야 ‘더 나쁜 놈들’이 점차 도태돼, 종국엔 ‘덜 나쁜 놈’이 좋은 사람으로 바뀌어 갈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나쁜 놈보다는 보다 덜 나쁜 놈을 골라 뽑아야 하는데, 안질에 걸린 못난 이 놈의 눈에는 저 놈이나 그 놈이나 그 놈이 그 놈만 같은 현실이 답답할 따름입니다.
K형!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저는 지난 늦은 겨울부터 오늘 오후 이 봄까지 고매화를 비롯한 봄꽃들을 구경하러 남도를 떠돌고 봄의 향취를 만끽하고 돌아와 방금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아직도 시골 간이역의 플랫폼을 서성대며 열차가 도착하기까지의 그 잠시의 망설임 속에서 열차를 기다릴 때의 설레임과 떠나려는 자의 아쉬움이 생생합니다. 목적지를 향하여 출발할 때는 계획과 꿈을 안고 출발하지만, 목적지를 떠나 올 때는 항상 아쉬움과 미련으로 플랫폼을 서성이게 됩니다. 인생과 사랑도 이와 같아서 떠날 때가 점차로 다가오면 보다 아쉬움과 미련이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것이 아닐런지요.
“추억이라는 열차에 동전을 넣는다
좌석표에는 몇 가지 이름이 있다
아픔, 미련, 향수, 고독, 가난, 열정, 웃음
추억이라는 이 열차에는 그래서
일등석이 없다
모든 좌석들이 희미하게 열려진
풍경들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 ”
----- 한용섭의 시 ‘내 가난한 여행’중에서
형의 책장속에 간직된 추억에는 어떤 좌석표들이 도열하고 있는지요.
색이 고운 날실과 씨실로 짜여진 아름다운 봄날이 되시옵기를 진실로 바랍니다.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