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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便紙)

Led Zepplin 2016. 10. 11. 01:13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 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 아네스의 노래/ 이창동

 

K형!

그처럼 위대한 여름이 가고, 올 것 같지 않았던 가을이 비바람과 함께 마침내 왔습니다그려.

낮은 아직 볕이 따사롭지만 조석(朝夕)으로는 쌀쌀하여 창을 열고 지내기가 조금 염려스럽습니다.

지나간 여름, 그 엄청난 더위에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나요.

아프리카와 열사의 중동을 헤매고 돌아다녀 본 적이 있는 저 역시도 지겹도록 질긴 무더위를 모처럼 대단하게 시달려 봤습니다.

덕분에 엄청난 전기료에 화들짝 한 번 더 놀랐지만 말입니다.

상기의 시(詩)는 나어린 여학생의 시신이 강여울로 떠내려 오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창동 감독이 2010년에 만든 윤정희 주연의 영화 〈시〉에 등장하는 이창동의 시 ‘아네스의 노래’입니다.

영화 〈시〉는 시와 같은 영화라기보다는 소설같은 영화에 가깝지만, “시를 쓰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시를 쓰는 마음을 갖는 것이 어렵다”라는 대사는 어쩌면 삶이란 살아가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살아가려는 마음을 갖는 것이 어렵다는 의미를 말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런지요.

윤정희가 등장하고 ‘시’라는 단어가 영화에 채용됨으로 하여금 선입견으로 시적인 아름다움을 상상했던 관람객의 긍정적 이미지를 처음부터 삶을 견뎌내지 못하고 죽어 떠내려가는 여학생의 시신과 꽃말이 ‘고통(苦痛)’인 붉은 꽃의 등장으로 인한 저의 유추입니다.

고통스러웠던 여름을 떠올리면서, 저도모르게 이창동의 영화 〈시〉가 떠올랐으며 노을이 지는 서늘한 저녁공기 때문에 영화에 등장하는 한 웅큼의 눈물같은 ‘아네스의 노래’라는 시가 오버랩으로 생각났습니다.

 

K형!

어느 날 제자들이 소크라테스에게 물었답니다.

"인생(人生)이란 무엇입니까?" 그 말을 듣고 소크라테스는 그들을 사과나무숲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숲에는 사과가 무르익는 계절인지라 달콤한 과육향기가 코를 자극했는데,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에게 숲의 끝에서 끝까지 걸어가며 가장 마음에 드는 사과를 하나만 골라오도록 했답니다.

제자들은 사과나무숲을 걸어가면서 유심히 관찰한 끝에 각자 마음에 드는 가장 크고 좋다고 생각되는 사과를 하나씩 골랐겠죠. 제자들이 도착한 사과나무숲의 끝에는 소크라테스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각자 제일 좋은 열매를 골랐느냐?"고 물었지만, 제자들은 서로의 것을 비교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자기가 고른 사과가 만족스럽지 못하느냐?"고 묻자, 제자들은 다시 한 번 더 고를 수 있는 기회(機會)를 달라고 했습니다. 한 제자가 숲에 막 들어섰을 때 가장 크고 좋은걸 봤지만 더 크고 좋은걸 찾으려고 따지 않고 지나쳤으며, 다른 제자는 정반대로 숲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좋다고 생각되는 사과를 골랐는데 나중에 더 좋은 사과를 만나기도 했다는 거죠. 제자들은 후회스럽다며 한번만 기회를 더 달라고 이구동성으로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단호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이다. 인생은 언제나 단 한 번의 선택에서 결정나는 것이다."

살면서 수없이 많은 선택(選擇)의 갈림길 앞에 마주 서지만 기회는 누구에게나 한번뿐입니다.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책임은 모두 자신이 스스로 감당해야 할 뿐이죠. 가을이 오니, 새삼 그 동안 내가 생각없이 스쳐 지나쳐 온 그 크고 달달했을 사과들이 떠올라 아쉬움이 많습니다. 그러나 어쩌겠나요. 그 것이 나인 것을...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간다 할지라도 그 사과를 차지하고 행복(幸福)해 할런지는 못내 자신이 없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 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K형!

이탈리아의 북부 ‘토리노 박물관’에는 희안한 조각작품이 있는데 그 조각상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누구라도 본인도 모르게 비웃음이 나온다고 합니다. 바로 ‘카이로스(Kairos)’라는 조각상인데, 그를 '기회의 신(神)' 이라 한답니다.

‘카이로스’는 외모가 독특한데, 그의 앞머리는 길고 무성한 곱슬머리이며 뒤에서 보면 뒷머리는 머리카락이 없는 대머리이고.. 왼손에는 저울과 오른손에는 날카로운 칼과 발뒷꿈치와 등에는 날개가 달려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군요.

그 조각상 밑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나의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사람들이 나를 보았을 때 쉽게 붙잡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고,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내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는 나를 붙잡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며.. 발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그들 앞에서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함이다. 나의 이름은 '기회' 이다.”라고 말입니다.

그가 들고있는 ‘저울’은 기회가 앞에 있을 때 그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판단하기 위함이고, ‘칼’은 옳다고 판단할 때 칼같이 주저없이 결단할 것을 촉구하기 위함이랍니다.

 

K형!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떤 일이나 행동을 하기에 가장 좋은 때나 경우’를 ‘기회’라고 하더군요. 우리가 놓친 그 기회들은 지금 어디쯤 누구의 품에 안겨 그 사람에게 행운과 즐거움을 주고 있을런지요. 돌이켜보니, 세상을 떠돌며 살아온 지 어언 60년이 지났습니다그려. 규각(圭角)이 없어졌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나이에 따르는 관록도 아직은 없으며 재물을 귀하게 여기지 않은 탓으로 소위 만종록(萬鍾祿)도 없을 뿐 아니라 재기(才氣)로 번뜩이던 눈빛도 떠돌이 방랑인의 장난스런 긍지와 치기(稚氣) 그 또한 모두 사라졌으니 만 가지 기회를 놓친 아쉬움만 나이만큼 가득 남았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모든 것을 돈으로만 말하여야 하는 신산(辛酸)한 세상에서 돈을 위하여 새장속에 갇혀 노래를 불러야 함에도 새장속에 갇혀 노래할 수는 없다는 고집으로 새장을 박차고 나온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으며 훗날의 어느 날 변방의 나무그늘아래 고요히 잠든다 하여도 저만이 간직한 그 이슬은 다시 해가 뜬다 하여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반짝이는 햇살속에서 영롱한 빛으로 거듭 태어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지난 여름의 그 긴 하루를 생각하면, 요즘의 하루는 무척이나 짧으며 옷깃으로 스미는 서늘한 바람으로 더욱 허전하고 외로워 유난히 가을을 심하게 타는 저의 계절임을 절감합니다. 조석으로는 날이 차갑습니다. 뵙는 날까지 부디 건강하소서.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