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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빠진 개에 대한 단상

Led Zepplin 2016. 12. 4. 22:58


                                 ---  이왈종 선생/ 제주생활의 중도(中道) ---


중국에는 오래 전부터 전하여 내려오는 말에 “물에 빠진 개는 때릴 필요가 없다.”는 말이 있다는 거다. 패배한 자를 공격한다는 것은 페어플레이 정신에 어긋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중국의 존경받는 사상가이며 소설가였던 루쉰(魯迅)은 물에 빠진 개를 때린다는 것은 페어플레이의 문제가 아니라면서 물에 빠진 개를 때릴 것을 주장하였다. 루쉰은 “개의 성질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으며, 물에 빠졌다고 불쌍히 여겨 내버려 두었기 때문에 제멋대로 기어 올라와 숨어 있다가 2차 혁명시기에 갑자기 뛰어나와 숱한 혁명가들을 물어 죽였다.”고 역설하였던 거다.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는 청산하지 못한 불행한 역사가 있다.

우리는 광복 이후에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으며 그로 말미암아 일제에 기생했던 세력은 광복 이후에도 떵떵거리며 살았고, 이승만의 하야 이후 ‘민주화’ 열망의 틈새에서 박정희가 군화발로 헌정을 유린하였으며.. 박정희가 사살당한 후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탱크를 앞세워 다시 집권하였고, 바통을 이어받은 노태우가 집권/ 쿠데타 세력과 손잡은 김영삼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박정희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재벌의 정경유착은 대를 이어 청산되지 못하고 유지된 탓으로 이번에도 엄청난 청경유착(靑經癒着)이 벌어졌다. 박근혜를 정리하면서 이참에 아예 ‘대통령에 대한 국민소환법’과 함께 ‘재벌기업의 정치유착금지법’을 개헌대상에 적시하여야 한다고 본다는 거다.


‘허탈(虛脫)’이라는 단어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느 시대부터 쓰였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흔하게 쓰는 한자임에는 분명하며, 일본에서는 2차대전 패망 이후에 생긴 단어라는 거다. 미국의 역사학자 '존 다우어'는 그가 쓴 책 <패배를 껴안고>에서 ‘교다쓰(허탈/虛脫/きょだつ)’가 일본을 새로 태어나게 한 큰 밑거름이 된 단어라고 적었다. 2차대전에서 패배를 하고 그 절망감이 허탈의 지경으로 몰아간 뒤에 그들이 스스로를 부추겨 재기하게 된 힘이 되었다는 거다.

사랑을 잃고 허탈에 빠져 삶이 송두리째 망가졌다는 사람도 있다던데, 역시 일본은 그래서 강한 것인가.

 

최근 신문지상에 주말마다 벌어지고 있는 촛불집회에 대하여 ‘이문열’ 작가와 ‘황석영’ 작가가 쓴 대조적인 글이 실려 새삼 눈길을 끈다.

젊어 한 시절 문학청년 아니었던 사람 그 누가 있었겠나만은.. 둔재 또한 한 시절 이문열 작가와 황석영 작가를 모범답안처럼 생각하던 무렵이 있었다.

 

이문열 선생은 6·25전쟁 때 공산주의자인 아버지가 월북한 이후 남겨진 가족들과 힘겹게 학창시절을 보내야만 했다는 거다. 일찍이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나자레를 아십니까>가 입선되었고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새하곡>이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짜임새 있는 문학적 수준이 높은 대중적 호응과 사랑을 받는 대표적 소설가라 할 수 있겠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금시조> <황제를 위하여> 등의 대표작이 있다.

 

황석영 선생은 만주에서 출생했으나 8.15 해방 이후 서울에서 성장했으며, 고교 재학시절에 이미 <사상계> 신인상에 <입석부근>이 입선된 후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 <탑>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본격적 창작활동을 재개했다. 장편소설 <객지>를 발표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파란(波瀾)한 삶에서 일군 사회성 짙은 소설들로 민족문학의 대표작가로 알려져 있으며, 문단의 별명인 ‘황구라’답게 대단한 입심을 바탕으로 한 걸출한 역작 <객지> <장길산> <한씨연대기> 등의 대표작이 있다.

 

이문열 선생은, 신문의 글에서 《-- 전략-- 그중에 100만이 나왔다고, 4500만 중에 3%가 한군데 모여 있다고, 추운 겨울밤에 밤새 몰려다녔다고 바로 탄핵이나 하야가 '국민의 뜻'이라고 대치할 수 있는가. 그것도 1500단체가 불러내고, 매스컴이 일주일 내 목표 숫자까지 암시하며 바람을 잡아 불러 모은 숫자가, 초등학생 중학생에 유모차에 탄 아기며 들락날락한 사람까지 모두 헤아려 만든 주최 측 주장 인원수가.

 

심하게는 그 촛불 시위의 정연한 질서와 일사불란한 통제 상태에서 '아리랑 축전'에서와 같은 거대한 집단 체조의 분위기까지 느껴지더라는 사람도 있었다. 특히 지난 주말 시위 마지막 순간의, 기계로 조작해도 어려울 만큼 정연한 촛불 끄기 장면과 그것을 시간 맞춰 잡은 화면에서는 으스스한 느낌마저 들었다고도 했다. -- 후략 -- [출처: 조선일보]》라고 적으며 백만 촛불집회를 슬며시 비꼬면서 폄훼하였다.

 

그리고, 글의 말미에 《죽어라, 죽기 전에. 그래서 진정한 보수의 가치와 이상을 담보할 새로운 정신으로 태어나 힘들여 자라가기를. 이 땅이 보수 세력 없이 통일되는 날이 오기 전에 다시 너희 시대를 만들 수 있기를.》라면서 보수에게 참담한 비수를 꼽으며 독한 재기를 독촉했다.

 

한편, 황석영 선생은 신문의 글에서 《-- 전략-- 80년 광주 도청 앞에서, 87년 6월의 시청 앞 광장에서 어떤 이들은 피를 흘렸고 어떤 이들은 세월을 살아냈다. 이들 수많은 동시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 거리에 서 나는 그들과 함께 착잡함과 뭉클함이 교차하는 심정으로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엄마들과 그 엄청난 함성 속에서도 평화롭게 잠든 아가들, 올망졸망 어린것들과 아내를 앞뒤에 세운 월급쟁이 가장들, 까마득히 잊고 살다 학생 시절 함께했던 동아리들을 불러 모은 중장년들, 조심조심 행렬의 가장자리에서 구호의 끝마디를 따라 하는 노부부와, 낭랑한 소리로 단호하게 외치는 중고등학생 소년 소녀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들에게 축제의 마당을 내주기 위하여 거친 숨결을 가다듬으며 뒷길로 물러난 노동자·농민·시민 단체들, 질서와 안전을 위하여 길을 안내하고 청소하며 즉석 자원봉사자가 된 대학생들, 이들 위대한 시민들을 보면서 나는 김수영 시인의 말투로 외치고 싶다. -- [출처: 중앙일보]》라며 국민을 향하여 따뜻한 위로를 건넸다.

 

그리고, 황석영 선생은 글의 말미에 《루쉰(魯迅)의 비유인 ‘물에 빠진 개 때리기’에 주저하지 말자. 물던 개를 건져주면 다시 우리를 물게 될 테니까. 페어플레이 대신 보내는 데 집중하자. 그것이 지혜로운 역사적 전례가 될 것이다.

바야흐로 우리 생애에 가장 큰 달이 떠오르고 있다. 광화문 빌딩 사이로 아직은 조금 모자란 달이 떠 있었고, 이제 곧 구름바다에 흰 달덩이를 탄 세월호의 꽃 같은 어린 넋들이 너울너울 춤추며 우리를 내려다볼 것이다.》라며 글을 마쳤다.

 

허탈(虛脫)하게도, 민주주의 세력에게 눈총을 받으며 눈물 젖은 땀으로 식은 밥을 먹으며 글공부를 했던 기억은 오래 전에 이미 잊었고 이제는 한국문학의 큰 작가로 출세하고 돈까정 많이 벌어 ‘신의 수저’ 한사람으로 환골탈태한 이문열 작가에게 많은 누리꾼들과 ‘더 불어터진 민주당’은 냉소적인 비난을 쏟아냈지만.. 살펴보면 그 또한 역사의 고단한 희생자였으므로 우리 모두가 부둥켜 껴안아야만 할 우리의 핏줄 형제인 거다.

 

이 불행한 역사의 그 시작은, 마치 ‘고구마줄기를 캐내려다가 무열왕릉을 발견’해 낸 이화여대 학생들이 그 단초를 제공했던 것이며 역사의 죄인이 된 박근혜 대통령은 이제 네 죄를 네가 알고 석고대죄로 허리를 조아리며 만백성앞에 용서를 구해야 맞다고 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녀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그 세치 혀로 뺑시리를 틀며 연탄불을 갈아 놓고 나가겠다느니 김장을 마져 끝내고 나가겠다느니 하며 시간벌기에 몰두하고 있음으로 이러려고 우리가 그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나 하는 자괴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예전엔 마른하늘에도 벼락이 자주 치던데 요새는 통 벼락도 안친다. 다른 사람들은 교통사고도 잘 나더만, 만인을 허탈(虛脫)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자에게는 교통사고도 피해 간다. 정녕 하늘이 우리 민족을 버림이신가. 글타면, 간절히 원하면 꿈은 이루어진다고 하였으니 다시 심기일전하여 오방색 종이꽃과 풍선을 띄워놓고 우주의 기운에나 간절하게 빌며 기도를 올려야만 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