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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다시 돌아갈래

Led Zepplin 2017. 6. 2. 01:26



  한국 근로자의 연간 근무시간은 2,256시간. OECD 회원국 중 확실한 1위란다. 반면 여가 시간에서는 최하위를 기록했으며, 자살률은 놀랍게도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는 소식이다.

작금 우리나라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은 미래의 행복을 위하여 현재의 행복을 반납 또는 일시 보류하는 상황에 몰려있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하여 일하겠노라고 출발했는데 어느 새, 일하기 위하여 우선 당장은 대충 먹고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고 있는 거다. 그러나, 현재의 나의 일(직장/ 개인사업/ 자영업)에서 고삐를 늦출 수는 없다.

 

힘들다고/ 피곤하다고/ 지쳤다고 고삐를 늦추며 느슨해지는 순간에 나는 어디까지 추락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일에도 대체로 불안하고 쉬어야 하는 휴일마져도 아침에서 오후로 시간이 흐를수록 차차로 왠지 모르게 불안해진다. 일요일 오후가 되면, 이러느니 차라리 빨리 출근하는 게 낫다는 생각까지 들 지경이다. 월요일 아침 일찍 출근하여 바쁜 조회와 이런 저런 회의를 준비하고 서류를 챙기고 커피를 마시는 그 바쁜 와중이 오히려 행복한 순간이다. 이건 비극이 아닐런지... 나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국가를 운영하고 조율하는 책임자들.. 하급 공무원보다 오히려 고급공무원 계층들 일반직 검사보다는 오히려 상층부 검찰직 공무원과 차라리1/3로 그 수량(?^^)을 축소시켜 버리고픈 국회의원 등이 발생시키는 보신주의와 본인들만의 이익과 출세만을 위하여 골몰하는 여러 가지 추태와 부정부패/ 국가 안보의 위기/ 국정의 난맥상/ 일상생활 속에서 빈발하는 종류와 상상을 초월하는 각종 사건 사고 등이 너무도 자주 매스컴에 촘촘할 만큼 오르내리고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변해도 너무 안좋게 변해서 이 시대에 이 나라의 국민으로 도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참담하리만큼 회의가 생긴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은, 신라의 학자이며 글씨와 문장가로 당대에 이름을 날렸으며 경주 최씨의 시조이다. 경문왕 9년(868년), 당나라로 떠난 12세의 최치원은 6년 후인 874년 18세의 나이로 빈공과에 합격했다. 그냥 합격도 아니고 장원이었다. 빈공과는 당나라에서 외국인을 위해 실시한 과거로 이 시험에 합격하면 당나라에서 벼슬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귀국 후 출세길이 보장된 엘리트코스였다.

 

과거에 합격한 2년 뒤인 876년 현의 현위로 첫 관직에 올랐으나 이듬해 사직했고, 이후 회남 절도사 고변의 추천으로 관역순관이라는 비교적 높은 지위에 올랐다. 이 무렵 ‘황소의 난’이 일어났다. 소금장수였던 황소가 장안을 점령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하자, 고변은 이를 토벌하러 나가면서 최치원을 종사관으로 발탁했다. 당시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황소를 격퇴한 것은 칼이 아니라 최치원의 글이다.”라는 이야기가 떠돌았을 정도로 최치원의 글 솜씨는 당나라 전체를 뒤흔들었다. 황소의 난이 진압된 뒤, 황제는 최치원에게 자금어대를 하사했다. 자금어대는 황제가 정5품 이상에게 하사하는 붉은 주머니로 이것을 받았다 함은 그 능력을 황제에게 인정받았다는 의미이다.

 

884년 당 희종이 신라의 왕에게 내리는 조서를 가지고 귀국 당시의 나이는 28세였다. 신라의 헌강왕은 최치원을 ‘시독 겸 한림학사’로 임명했다. 신라 조정에서 당에 올리는 표문을 비롯한 문서를 작성하는 직책이었다. 헌강왕은 왕권을 강화하려는 노력의 하나로 당나라 유학생 출신들을 귀국시켜 학문적인 전문가로 측근에 두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세계적인 지식인으로 성장한 젊은 최치원에 대한 기대가 컸을 것이다. 최치원 또한 당나라에서 배운 학문과 기량을 고국에서 펼쳐 보고픈 강렬한 열망이 있었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최치원 선생은 진성여왕 시절에 자신의 개혁안을 제출하는바 그것이 [시무10조]이다. 여왕은 그의 시무책을 받아들여 최치원을 6두품 신분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아찬에 제수하고 그의 제안대로 개혁 정책을 펼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시무10조]는 대단히 파격적인 개혁이었으며 중앙 귀족인 진골들 당시의 기득권층들이 우글거리는 조정에서 볼 때 그의 사상은 무척 불편하게 받아들여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최치원(崔致遠) 선생은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라는 간곡한 글을 올리고 가야산으로 들어가 나머지 인생을 조용히 살았으며, 지리산으로 들어가 죽었다고도 하고 또는 신발을 벗어놓고 가야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는 속설도 전해오고 있다.

 

말년에 그가 남긴 고적한 시 또한 넓은 세상에 홀로 외로운 싸나히의 심정을 엿볼 수 있는 명문이다.

 

   秋風唯苦吟 추풍유고음 (가을바람에 괴로이 읊나니)

   世路少知音 세로소지음 (세상에 나를 아는 이가 적도다)

   窓外三更雨 창외삼경우 (창밖엔 쓸쓸히 밤비 내리는데)

   燈前萬里心 등전만리심 (등 앞의 외로운 마음은 만 리 고향을 향해 달린다)

 

                                                                                                    -----   추우야중(秋雨夜中/ 가을 비오는 밤에)

 

또 한 분, 이 시대의 표상으로 삼아 마땅한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오류선생(五柳先生) 도연명(陶淵明)이다. 도연명(陶淵明) 선생은 중국의 대표적 시인이며 호는 오류선생(五柳先生). 그의 가문은 대대로 남방의 토착 사족(士族)으로, 북조로부터 내려온 귀족이 절대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당시의 남조 사회에서는 영달의 길에서 소외된 압박받는 계층이었다.

 

도연명의 첫번째 관료생활은 29세 때 자기가 살고 있던 강주의 좨주(祭酒:州의 교육장)로 취임한 것이었으나 곧 사임했다. 2번째 관료생활은 35세 때 당시 진(晉)나라 최대 북부군단(北府軍團)의 진군장군(鎭軍將軍)인 유뢰지(劉牢之)의 참군(參軍:참모)으로 취임한 것인데 이것 역시 곧 그만두었다. 3번째는 유뢰지의 휘하를 떠난 직후, 36~37세 무렵 형주(荊州) 자사(刺史) 환현(桓玄)의 막료로 취임한 것이다. 그러나 며칠 안되어 모친상을 당해 고향인 심양으로 돌아가 3년상을 치렀다.

 

도연명이 10여 년에 걸친 관료생활을 최종적으로 끝내고 은둔생활에 들어간 시기는 의희(義熙) 원년(405) 11월 41세 때였다. 그는 팽택 현령이 된 지 겨우 80여 일 만에 자발적으로 퇴관했다. 퇴관의 결정적인 동기에 관해서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해 말에 심양군 장관의 직속인 독우(督郵:순찰관)가 순찰을 온다고 하여 밑의 관료가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맞이해야만 합니다." 하고 진언했더니, 도연명은 "오두미(五斗米:월급) 때문에 허리를 굽혀 향리의 소인을 섬기는 일을 할 수 있는가?"라고 말한 뒤 그날로 사임하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거다. 이때 나온 작품이 그 유명한 〈귀거래사〉·〈귀전원거오수 歸田園居五首〉이다.

 

“돌아가자!(귀거래혜/ 歸去來兮)”로 시작하는 〈귀거래사〉는...

“돌아가자!/ 전원이 황폐해지거늘 어이 아니 돌아가리/ 지금껏 내 마음이 몸의 부림 받아왔으니/ 어찌 슬프고 서럽다 원망이나 하고 있겠는가/ 이미 지난 일은 돌이킬 수 없겠지만/ 다만 앞으로의 일은 올바로 할 수 있음이려니/ 실로 길은 어긋나 버렸으나 멀어진 건 아니로다/ 이제야 바른 길을 찾았으니 지난날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도다/ 물결은 흔들흔들 가볍게 배를 흔들고/ 바람은 이리저리 불며 옷깃을 흩날리는데/ 지나가는 이에게 앞길을 물어보며 가고자 하니/ 희미한 새벽빛에 한숨만 나오는구나.

 

--- 중략 --- 아서라/ 세상에 이내 몸이 얼마나 머무를 수 있으리오/ 가고 머무름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닐진대/ 무엇을 위해 어디로 그리 서둘러 가려 하는가/ 부귀는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며/ 좋은 시절 생각하며 혼자 이곳저곳 거닐다가/ 때로는 지팡이를 놓고 밭에 김을 매며 기운을 북돋기도 하고/ 조용히 동쪽 언덕에 올라 휘파람도 불어보며/ 맑은 냇가에 앉아 시나 읊어가며 지내리라.”하며 인간이 가야할 길이 자연임을 노래하였다.

 

도시인으로 살면서 갈망하던 명예와 경쟁 그리고 목표의 달성과 승리로 대변되는 성공일변도로 편성된 산업사회가 일군 허점을 갈파한 위대한 스승으로는 노자(老子)를 꼽을 수 있겠다. 선생은 성공을 위한 매진이야 말로 인간을 힘들게 만들고 정신세계를 피폐하게 만드는 부질없는 짓이라고 지적하였다. 누구나 성취를 위한 꿈을 꾸며 더 많은 이윤이 남는 장사를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노자는 물질과 성공의 이득을 과감히 포기하고 얻는 마음의 고요가 훨씬 남는 장사라고 가르치고 있다. 비움의 미학은 무위, 무형, 무용이라는 3무사상으로 대변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無爲以無不爲)”고 말하고 있다.

 

꿈꾸고 있는 불꽃이 화려할수록 그 그림자도 짙다. 불꽃이 사그라지고 나면 결국에는 싸늘한 재만 남는 거다. 시도는 해보되 애초의 내 뜻과 다르거나 만만치 않다면,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성과 위주의 삶으로부터 과감하게 벗어나야만 한다. 그건 도태가 아니라 용퇴임을 자각해야만 한다고 본다. 나는 당초의 꿈과 바램이 성공하지 못했으므로 완성차의 부품으로 채용되지 못한 채 자동차 생산현장의 콤베어 라인 주변에 버려진 떨거지 부품조각으로 남겨지기 보다는, 차라리 40대 중반 6년의 그 아름다웠던 날들처럼 숲으로 다시 돌아가 오두막을 짓고 빈둥거리며 멍~ 하니 바람이 불어오던 대숲을 바라보고 책이나 읽으며 소일하고 다리가 근질거리면 산으로 들로 나물이나 채취하러 다니는 것이 낫겠다 싶다.

 

“땅의 살이 굳어지면/ 길이 된다/ 많이 밟힐수록/ 좋은 길이 된다/ 어머닌 굳은 손으로/ 뜨거운 냄비를 덥석 집어 올리나/ 난 아직 뜨거운 밥그릇 하나 들지 못한다" --- 모과/ 안명옥(1964~ )

땅도 길이 될 뿐 아니라 밟힐수록 좋은 길이 되며 어머니는 자식을 위하여 뜨거운 냄비도 번쩍 드시는데, 나는 이 오랜 시간동안 먹고 놀며 구경만 하고 살았다. 어머니와 타인을 위하여 보탬이 되어 본 일도 없었다. 돌아보면 부끄러움만 가득한 삶이다. 모과조차도 시간이 지나 굳어가면서 향기가 진하게 변한다는데, 능력 아니되는 자가 도시에서 쓰레기나 만들고 먼지만 일으키며 도시를 더욱 분다하게 만드는데 일조하느니 차라리 조용히 숲으로 다시 돌아가자.

 

아침부터 요란하게 지저귀는 텃새들의 재재거리는 소리를 털어내고 일어나 한 뼘 텃밭을 일구다가 점심을 먹고 툇마루에 잠시 누워 깜빡 잠이 들었다가 얼핏 두 귀로 들려오는 대숲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 배를 깔고 엎드려 책을 보다가 내리던 비가 그친 후에 처마 밑에 똑똑 떨어지고 있는 빗방울 소리를 들을 수도 있으며/ 이른 아침, 내 손으로 뿌린 씨가 땅을 헤치고 솟아나 이슬을 머금고 푸르른 떡 잎 두 손을 펼치고 돋아난 장관을 볼 수 있는 한가로운 숲으로 말이다. 더러는 쿨재즈가 감미롭게 흐르는 ‘스타벅스’의 굳스멜이 풍기는 분위기가 그립기도 하며 달콤한 팝콘을 씹으면서 대형스크린에서 벌어지는 인간과 에어리언의 사투를 입을 쩍 벌린 채 간을 졸이며 구경하고픈 욕망도 일겠지만, 여기쯤에서 표표히 숲으로 난 길을 따라서 찾아들어갈 차비를 차려야 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요즘엔 부쩍 든다. 물론, 성격상 문득 압구정동의 ‘스타벅스’이거나 ‘CGV’의 개봉관에 기다리던 영화를 보러 뜬금없이 나타나기도 할 것이다. 먼 길을 달려오는 수고도 있겠지만, 어차피 인생이란 길고도 짧은 그 길을 지루하기도 하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달려가는 것 아니겠는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