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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그람시의 동화(童話)

Led Zepplin 2007. 6. 11. 11:33

 

 

  "어린 아이가 마루에서 우유가 든 병을 옆에 둔 채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작은 생쥐 한 마리가 나타나서 그 우유를 먹어 버렸습니다.

아이는 잠에서 깨어 우유병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울고 말았습니다.

 그 울음을 듣고 난처해진 생쥐는, 양에게로 달려가 젖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양은 젖이 말라서 우유를 줄 수 없었습니다. 신선한 풀을 먹지 못했기 때문이죠.

생쥐는 다시 들판으로 뛰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들판에는 물이 말라 신선한 풀이 없었습니다.

다시 생쥐는 우물에게로 뛰어 갔습니다. 아름답고 튼튼했던 우물은 이젠 허물어져 바닥에도 물이 없었습니다.

또다시 생쥐는 석수장이에게 우물을 고쳐달라고 졸랐습니다. 하지만, 그 석수장이는 적당히 알맞은 돌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생각다 못해, 생쥐는 산(山)으로 달려갔습니다. 산은 생쥐의 말을 외면하였습니다. 나무가 모두 사라진 산은 이미 민둥산이었기 때문입니다.

생쥐는 산에게 부탁 하였습니다.

지금 산이 돌을 내어주면, 나중에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어 산에 벚나무도 심고 소나무도 심을 거라고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산은 결국, 돌을 생쥐에게 주었습니다.

그런 결과로, 아이는 우유를 양껏 풍족하게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먼 훗날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었을 때, 아이는 산에 나무를 많이 심었습니다.

마침내, 산이나 들판에서 흙이 씻겨 내려가는 일이 없게 되자 땅은 기름지게 되었습니다."

 

이 동화를 쓴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그람시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들이 정권을 잡자 맑스주의 혁명가라는 이유로 1926년 35세의 젊은 나이에 체포되어 죽을 때까지 10년간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혁명의 좌절/ 투옥이라는 절망적 현실/ 가족과의 이별/ 몸을 괴롭히던 질병과 고통 속에서 1937년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가족에게 보낸 어느 편지에서 아직 만나보지 못한 나이 어린 둘째 아들에게 자신의 고향 마을 사르데냐에 대해 들려주고자 이런 아름다운 한 편의 동화를 적어 보낸 것입니다.

 

이 동화는 혁명의 꿈은 사라지고 가족과 동지들도 모두 흩어지고 몸은 병들어가던 극도의 공포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쓴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게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평생을 저항운동에 바쳤던 그람시는 자신의 어린 아들에게 모든 존재가 얼마나 신비롭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왜 다른 존재의 고통과 슬픔이 덜어지지 않고는 나의 운명(運命)도 결코 나아질 수 없는지를 뛰어난 시적 상상력(詩的 想像力)을 통해 아름답도록 설명해 주고 있죠.

예를 든다면, 청명(淸明)한 맑은 강물을 들여다보고 감탄을 했던 사람이라면 그 물속에 시멘트를 쏟아 부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단 한 그루의 나무일지라도 5년이나 10년쯤 정성스럽게 기르면서 자라는 것을 두고두고 지켜본 사람이라면 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르던 강아지나 고양이가 죽어가는 눈을 오래 들여다보고 눈물 흘린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정녕코 산이나 들에 덫 따위는 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또 다른 존재(存在)를 처음 사랑했을 때의 그 가슴 뛰는 설렘을 기억하고 있다면,...

결단코 다른 존재의 고통과 슬픔에 대하여 외면(外面)하기는 어려운 것이죠.

그리하여 불의(不義)에 대한 저항(抵抗)이란, 바로 자신(自身)에 대한 사랑이자 다른 존재에 대한 존중(尊重)에 다름 아닐지도 모릅니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고향인 사르데냐 섬은 본래 울창한 숲을 자랑하는 곳이었지만...

19세기에 벨기에와 프랑스의 자본기업(資本企業)들이 돈벌이를 위해 광물 자원을 약탈하고...

이탈리아 본토의 공업화(工業化)에 따라 목재 수요가 늘어나면서 점차 황폐해지기 시작했는데...

이런 자연의 황폐는 물론 사르데냐 주민들의 억압(抑壓)적인 상황과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아마 그람시는 땅과 나무와 물과 인간이 모두 같은 운명임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저항이고 혁명이라고 본 것이리라 짐작해 봅니다.

 

이 동화는.. 결국 홍수를 조절하고 가뭄을 막는 것은, 거대한 부패(腐敗) 고리로 쌓아 막아 올린 대형 콘크리트댐이 아니라...

바로 나무가 잘 자라고 우물이 마르지 않으며 양의 젖이 풍족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발전(發展)이고 건설(建設)임을 우리에게 알기 쉽게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엔 보통 사람들의 보통 상상력(想像力)이 필요(必要)한 것이고 그것만이면 되는 것일 뿐이죠.

 

사물(事物) 또는 매사(每事)를 오래 집중해서 들여다보면 그 존재를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게 되면 우리의 태도를 정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무를 베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무를 심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을 막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길을 터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상처(傷處)를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상처를 돌봐주는 사람도 있구요.

약자(弱者)들의 등을 떠다 밀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들의 약한 운명을 지켜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쪽의 방향에 서야 하는지는 너무도 자명(自明)해 보입니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우리는 길/ 방향이 명확하게 보일 때 중립을 취하는 것이...

결코 보다 나은 미래(未來)를 재건(再建)하기 위한 도덕적 성실성(道德的 成實性)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 야만(野蠻)의 세상에서 우리가 조금이라도 나아지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코 이런 '상식적인' 신념(信念)으로 무장된 사람들의 덕분일 것입니다.

 

                                               

                                                   비온 뒤의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강화도의 목비고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