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344

〈몰트너〉가 되다

동창회에 가보면, 젊었을 때는 여럿이 한데 모여 왁자하게 떠들며 누구랄 것 없이 대개는 술 마시고 옛날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내다가 헤어진다. 차차로 나이가 들면서 업계를 떠나 은퇴하고 나서 동창회에서 만나면, 어느새 주류와 비주류로 구분이 되어 앉는 자리도 구분대로 모여 앉게 된다. 모임의 시간이 흐르면서 비주류는 점차로 분위기가 소곤소곤 조용해지는 반면 주류는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로 술기운과 함께 열기가 더해지고 왁자지껄 떠들썩하게 된다. 비주류의 동창들은 턱을 괴거나 팔짱을 낀 채로 왁자한 주류 쪽을 멍하니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으며 주류의 동창들은 비주류 그들의 시선은 아랑곳없이 벌건 얼굴로 웃음꽃이 만발한 채 자기들끼리 연신 부어라 마셔라 하며 신이 난 태도들이다. 그러나, 옛친구를 오랜..

카테고리 없음 2023.10.28

《봉우리》에서 만난 숲속 길

혼자였지 난 내가 아는 제일 높은 봉우리를 향해 오르고 있었던 거야 너무 높이 올라온 것일까, 너무 멀리 떠나온 것일까 얼마 남지는 않았는데 잊어버려 일단 무조건 올라보는 거야 봉우리에 올라서서 손을 흔드는 거야 고함도 치면서 지금 힘든 것은 아무것도 아냐 저 위에 제일 높은 봉우리에서 늘어지게 한숨 잘텐데 뭐 허나 내가 오른 곳은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 길은 다시 다른 봉우리로 거기 부러진 나무 등걸에 걸터앉아서 나는 봤지 낮은 데로만 흘러 고인 바다 작은 배들이 연기 뿜으며 가고 이봐 고갯마루에 먼저 오르더라도 뒤돌아서서 고함치거나 손을 흔들어 댈 필요는 없어 난 바람에 나부끼는 자네 옷자락을 이 아래에서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말야 또 그렇다고 괜히 허전해 하면서 주저앉아 땀이나 닦고 그러지..

카테고리 없음 2023.09.11

여름의 끝자락에서

(테르메 발스/ Terme Vals) 날씨가 아직도 무덥고 한낮은 따가움이 전해지는 햇볕이지만, 높이 솟아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적란운 뒤로는 가을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듯싶다. 가을이 있어서 그렇게 지루한 여름도 견딜만한 것은 아닐까. 요 며칠 사이에 저녁에는 바람도 제법 선선하여 식후에 사부작사부작 산책을 나설만하다. 이제부터 그저 시간이 흘러가면서 가을이 다가오는 걸 피부로 느끼며 느긋하게 가을을 즐기면 될 일이다. ‘절차탁마(切磋琢磨)’라는 말이 있다. 옥돌을 줄로 쓸고 끌로 쪼고 갈아서 빛나는 옥을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부지런하게 열심히 일하는 성실을 뜻하는 용어이다. 냉난방이 있는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무원이나 관리들의 용어라기보다는, 현장에서 구슬땀을 쏟으며 노심초사 진력하는 사람에게 더..

카테고리 없음 2023.09.04

이렇게 내달려 어디로 가는가

30대와 40대 초반 무렵에 전국의 영업소와 대리점 그리고 해외를 미친 듯이 뛰고 날아다니면서 일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밤/ 낮 그리고 주말이 없었습니다. 직전 직장인 직원 2만 5천 명의 세계적 조선소인 대우조선에서 한 개의 부품에 불과한 불만 가득한 공돌이 시절에 대한 복수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정신없던 어느 날 밤, 김포행 마지막 비행기 안에서 곯아떨어져 자다가 비행기가 곧 김포에 내린다는 안내 멘트에 문득 깨어나 창밖 아래 서울의 휘황한 불빛을 내려다보면서 “저렇게 개미굴 같은 미로 속에서 내가 허겁지겁 살고 있구나.” 하는 자각이 들면서 결국 산다는 것이 별것이 아닌데 이렇게 허둥지둥 살아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때렸습니다. 그날 밤 마지막 비행기의 어둠 속에서, 개미굴처럼 반짝거리던 도..

카테고리 없음 2023.08.29

'노회찬'이 그립다

“6411번 버스라고 있습니다. 서울 구로구 가로수 공원에서 출발해서 강남을 거쳐서 개포동 주공 2단지까지 대략 2시간 정도 걸리는 노선버스입니다. 내일 아침에도 이 버스는 새벽 4시 정각에 출발합니다. 새벽 4시에 출발하는 그 버스와 4시 5분경에 출발하는 그 두 번째 버스는 출발한 지 15분 만에 신도림과 구로 시장을 거칠 때쯤이면 좌석은 만석이 되고 버스 사이 그 복도 길까지 사람들이 한 명 한 명 바닥에 다 앉는 진풍경이 매일 벌어집니다. 새로운 사람이 타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매일 같은 사람이 탑니다. 그래서, 시내버스인데도 마치, 고정석이 있는 것처럼 어느 정류소에서 누가 타고, 강남 어느 정류소에서 누가 내리는지, 모두가 알고 있는 매우 특이한 버스입니다. 이 버스에 타시는 분들은 새벽 3..

카테고리 없음 2023.08.15

팔자를 고치는 방법

저잣거리에 떠도는 말로 “타고난 ‘팔자(八字)’는 죽는 날까지 떼어놓지 못한다.”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팔자’란 ‘사주팔자’의 줄임말로 알고 있습니다. 하늘을 뜻하는 ‘갑을병정...’이 어쩌고 땅에 있는 네 개의 기둥을 말하는 ‘자축인묘... ’가 어쩌고는 접어두고 사람이 태어날 때, 어머니의 탯줄을 자르는 순간의 ‘음양오행’에 따라 그 사람의 길이 인생이 결정된다는 겁니다. 하여, 타고난 팔자는 바꿀 수 없다는 것이 동양철학의 학자와 도인들의 결론입니다. 흔히 말하는 ‘팔자소관’의 예를 보겠습니다. 강원도 원주 시내의 이름 없는 학원에서 국어 강사였던 ‘이외수’가 어느 날 갑자기 유명작가가 된 것이라든가 ‘정대철’ 현 헌정회장이 ‘YS’가 대통령 당선 후에 당시 명동 퍼시픽 호텔에서 ‘YS’가 직접..

카테고리 없음 2023.08.06

I Love Coffee

영국의 ‘윈스턴 처칠’ 경이 정계를 은퇴하고 어느 파티에 참석하게 되었다. ‘처칠’의 젊은 시절 유머 감각을 기억하는 한 부인이 야릇한 질문을 했다. "어머 총리님. 남대문이 열렸어요." 그러자, 파티에 참석한 여러 시선이 일제히 ‘처칠’에게로 향했으나 ‘처칠’은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부인. 이미 ‘죽은 새'는 새장 문이 열렸다고 해서 밖으로 나올 수는 없으니까요." 역시, '처칠'이다. 영국 의회 사상 첫 여성 의원이 된 '에스터' 부인은 '처칠'과는 매우 적대적인 관계였다. 그녀는 "내가 만약 당신의 아내라면 망설임 없이 당신의 커피에 독을 타겠어요."라며 독설을 토하자, '처칠'은 태연히 대답했다. "내가 만약 당신의 남편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그 커피를 마시겠소.” 요즘이야 거리 곳..

카테고리 없음 2023.07.30

우리들의 추억

추억은 아무래도 기억과는 좀 다르다. 우리들의 추억이라는 단어에는 막연하나마 슬며시 저며오는 아픔이라든지 아스라한 미련이랄까 까닭 모를 애틋함이랄지 아무튼 그런 어떤 서정이 있다. 추억이라는 것은 내가 누군가와 사랑했었던 기억/ 누군가를 짝사랑했던 기억/ 재수를 결심하면서 맥 빠지고 쓸쓸했던 기억/ 사회에 진출하기 위하여 반드시 합격해야 하는 시험에서 탈락했던 순간의 암담한 기억/ 처음 입사한 회사의 두렵지만 새 출발로 설레었던 기억들이 있지만, 역시 아무래도 그 누군가 때문에 혼자 아파하며 무작정 걸었던 그때의 풍경과 그 순간들의 기분 등이 문득 어느 순간에 또는 아주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을 때 떠오르는 바로 그것이 추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요즘처럼 비가 주룩주룩 또는 소리도 없이 내리면 추억의 ..

카테고리 없음 2023.07.20

연꽃을 스치는 바람처럼

젊어서부터 ‘연꽃’은 남다른 꽃이었다. ‘연꽃’은 많은 꽃 중의 하나로 보기에는 단순하지 않은 꽃이었으며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 정겹고 아름답게 보인다. 한 시절 욕망의 시선으로는 ‘연꽃’만의 고즈넉한 연분홍 품격은 이 세상에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오랫동안 부질없이 헤매다 먼 길을 돌아와 이제 삶을 되돌아볼 나이가 되니 여름의 열기 속에서 누구에게도 내세우지 않는 그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연꽃’의 품격과 미모를 다시금 보게 된다. ‘연꽃’의 미모와 품격을 처음 느껴본 곳은 아무래도 〈부여〉의 〈궁남지(宮南池)〉일 것이다. 오래전 〈궁남지〉는 관광명소가 아닌 그저 평범한 시골의 큰 연못이었다. 다만, 못 한가운데에 왠 정자가 문득 있었을 뿐이었다. 못 한 가운데 〈포룡정〉이라는 정자와 정자까지 연결되는 아..

카테고리 없음 2023.07.14

달콤한 인생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단 한 조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대여섯 살이던가 외삼촌에게 손목을 잡혀 외할머니 집에 왔다. 식구들과 같이 밥을 먹을 때에 나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음식을 흘렸을 때이거나 맛난 반찬을 먹을 때에는 어른들로부터 따가운 눈총과 질책은 있었다. 학교의 공부는 나의 적성에 맞지 않았고 재미도 없었다. 부모와 함께 손을 잡고 걷는 아이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 적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혼자 세상을 원망하였으며 초등학교 졸업을 겨우 마친 이듬해 이던가 서울에 왔다. 번화가의 큰 이발소에서 심부름을 했다. 구두도 닦았다. 구경도 못 해 본 돈이 날마다 생겼다. 난생처음 음식을 양껏 먹어봤으며 먹고 싶은 음식과 옷을 마음대로 사 입었다. 같은 업종의 친구들과 세상 무서울 ..

카테고리 없음 2023.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