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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 이야기

Led Zepplin 2007. 8. 14.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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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렸을 적에, 방학이면 충청도 산골의 작은 아버지 집에 놀러 가곤 했다.

우리 집안 조상님들의 대를 이은 선산과 논밭이 있는 곳이었기에, 내가 어려서부터 본향에 익숙해지도록 하기위한 아버지의 배려였다는 것을 후일 커서야 알았다.

어찌 되었건, 어제 하루 종일 신나게 뛰어 놀았던 나는 새벽에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리면 짜증이 나곤 했다.

왜냐면, 닭이 우는 그 소리는 기상나팔 소리와 진배없었기 때문이다.

닭 울음 소리가 미처 귓바퀴에서 사라지기 전에 작은 어머니가 나를 깨우지는 않았지만, 나와 함께 자고 있는 내 사촌 동생들의 이름을 거듭 재촉하여 부름으로써 나도 어쩔 수 없이 깨어 일어나야 했던 거였다.

 

닭 울음 소리와 함께 잠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은, 어제 하루를 발 모가지가 빠지도록 허벌나게 뛰고 내달렸던 나로서는 증말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허긴, 그게 어디 나뿐이겠나..

나보다 덩치는 컸지만 한살 터울의 동생부터 서너살 아래까지 우리 집과는 달리 줄줄이 형제가 많았던 작은 집의 동생들은 서울에서 내려 온 오빠 또는 엉아의 빽을 믿고 방학이면 신나 빠지게 놀 수 있었던 거다.

나는 종손 큰집의 귀한 막내이자 둘째 아들로써 아버지의 고향 노인들도 알다시피 아버지의 사랑과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었으며,

시골집엘 가면 서울도령으로 대우가 만만치 않았던 거다.

물론, 그 배경에는 당시 서울에서 잘나가던 아버지의 엄하고 든든한 빽그라운드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인 거다.

 

어찌 되었건, 새벽에 닭 울음 소리가 들리면 그렇게 닭이 미울 수가 없었다.

잠에서 깨어 눈을 부시시 비비며 마당에 나온 사촌 동생들은, 구구거리며 마당을 지나다니는 닭이 눈에 띄기만 하면 냅다 뛰어가 발길질을 하며 닭에게 화풀이를 하곤 했다.

그럴 때면, 우리 둘째 사촌 누나(아... 내가 글케 좋아했던 그 누나)는 소여물죽을 쑤기 위하여 불을 때다가 닭이 꼬꼬댁하고 기겁을 하는 소리에 놀라 바라보다 동생들의 화풀이를 알고는 빙긋이 웃던 그 아름다운 미소가 지금 다 늙은 내 눈에 아직도 어제 일처럼 선하기만 하다.

누나는 “애들아, 어서 세수해라. 너희들 주려고 내가 여기 불속에 맛있는 거 묻어 놓았어. 어서 세수들 하고 와.”하며 우리의 심통을 풀어 주려고 했다.

 

철부지 소년 시절 우리의 안타까운 귀한 잠을 빼앗아 갔던 그 토종닭들의 투명하도록 청아한 소리를 이 청명하도록 차가운 겨울 신새벽에 들어 보고만 싶다.

방학이면 늘 다녀가던 소년은...

어느새 며칠만 지나면 코밑과 턱 아래가 거무스름해 지는 나이가 되어 역시 방학이면 시골에 나타나곤 했다.

어려서부터 또래의 정겨운 부랄 친구들은, 밤이면 등잔불 아래 내가 기타 치며 부르는 노래 소리를 재미있게 생각하며 즐거워했고, 내 노래를 따라 부르며 막걸리를 마시기 위하여 초저녁에 당번을 정하여 한 녀석이 면내의 술도가에 자전거를 타고 술통을 싣고 오곤 햇던 거였다.

한 패거리는 화투를 치고, 한 패거리는 노래를 부르고, 교대로 술잔을 주고 받으며 시골 집 사랑방의 겨울밤은 등잔불의 끄시럼과 함께 그렇게 왁자하게 지나가곤 했던 거였다.

 

작은 아버님은 저녁만 드시고 나면, 일부러 내 방엘 오셔선 “종일 엎드려 책만 읽는다고 세상일을 다 알게 되는 건 아니다.

밤에는 친구들 하고 재미있게 놀기도 해야 한다.

화투를 칠 줄은 아느냐? 그런 것도 배워봐야 하는 게 세상이란다.. 대문 밖에 녀석들이 기웃거리는 게 너를 찾아온 모양이더라. 나가 보거라” 고 하시곤 마당엘 나가서 작은 누나를 소리쳐 부르곤 일부러 나 들으라고 “종분아, 내 건너 마을 김 서방네 갔다가 낼 닭 우는 소리에 건너 올 터이니 늦지 않게 아침 준비해 놓거라, 알았느냐?” 하시며 나가시곤 했다.

밤에 작은 아버님이 오실지 모르니 조심스러워 하며 쫄지 말고, 흔쾌하게 놀아도 된다는 배려인 거다.

 

어찌 되었건, 그렇게 항상 즐거운 어느 날 밤 이였다.

그날도 한 패거리는 화투를 치고 한 패거리는 노래를 부르며 분위기를 돋우면서 막걸리 잔을 비우던 참이었는데...한 녀석이 화투 점수가 잘 안나던 모양인지 화투를 집어 던지며 재미가 없으니 닭서리나 하러 가자는 거였다.

순간, 사랑방 실내엔 찬물을 한 바가지 퍼 붓은 모양으로 일순간 조용해지더니.. 동시에 한 목소리로 “닭...서...리?”하는 거였다.

나를 포함한 녀석들의 눈과 표정에는 긴장과 스릴 엔드 서스펜스가 넘치고 있었다.

우리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화투짝과 기타를 내동댕이치고는 “ 야야..막걸리 한 잔 따라 줘 봐라”고 씨부리며 한잔씩들 숨 가쁘게 마셔대고는 김치 쪼가리를 우적우적 씹어 대면서 눈알을 또록또록 뒹굴리면서 각자의 작전에 빠져 들었던 거였다.

 

이러구러 마침내, 목표는 결정되었다.

산너머 새텃말 점순네 닭장을 털기로 합의가 되었다.

그 이유인 즉슨 이렇다. (점순네 노친네 두분이 초저녁 잠들이 많다더라)(아버지는 가는 귀가 먹었다더라)(점순이는 밤 마실을 자주 다녀서 집에 좀체로 없다더라 --- 이 부분에 대하여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그럼, 밤에 점순이는 어디를 쏘다니는 거냐.. 애인이 있는거 아니냐... 누구라더라... 웃기지 마라, 그놈은 내가 잘 안다. 갸는 면사무소에 다니는 영님이럴 짝사랑한다던데 그게 말이 되냐)...

좌우간, 우리는 출발전에 누나에게 거사 이후의 부엌에서 행하여야 하는 대소사에 관한 모든 준비를 부탁하였으나, 누나는 일이 잘 못되었을 경우에 내일 아침 참고인으로 면내 지소에 불려 다니기 싫다는 이유로 가련한 아우들의 뼈저린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던 거다.

아니, 여지껏 같이 화투치고 같이 입을 뫃아 노래 부름시롱.. 조개껍데기 묶어 모가지에 걸어 놓고 불가에 마주 앉아 밤새워 눈깔 빠지게 인생을 이야기하자문서... 음매, 으찌 글케 야멸찰 수가... 내 그때 일찍이 여자가 겁~~ 나게 차가운 사람임을 알았어야 했거늘...

 

그런 비극적인 배신도 있었지만, 우리 악동들은 결연한 의지로 다시 한번 필승을 다짐하며 운동화 끈을 단단히 질끈 동여매고 대문을 나섰던 거다.

길을 가면서도 우리는 작전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주의 사항도 점검하였다.

밖에서 망을 보는 녀석들은 사람이 나타났을 경우에는 “뻐꾹!! 뻐꾹!!”을.. 우리가 뭔가에 의심이 들어 조용하면 별일 없으니 계속 하라는 뜻으로는 “소쩍!! 소쩍!!”을 외쳐 주기로 하였던 거다.

닭장 안에는 경험이 있는 세 명이 잠입하기로 했다.

나를 포함한 촛짜 세 명은 밖에서 망을 보기로 했다.

가장 덩치가 큰데도 불구하고 겁이 많은 한 녀석은, 바로 닭장 앞에서 중간에 암호의 전달 역할을 시키기로 했다.

 

드뎌 마침내 바야흐로 그리하야 결국 데어포어, 우리는 점순네 집 앞에 도착하였다.

각본대로, 우리 셋은 삽짝 문 앞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허리를 약간 구부리며 팔은 살며시 벌린 전후 좌우를 살피는 자세로 좌 우 중간에 포진하고, 한 녀석은 닭장 앞에, 나머지 세 명은 납작 엎드린 채 일본의 사무라이 은자처럼 닭장 안으로 소리없이 잠입하였던 거다.

그런데, 잠시 후 어느 순간 느닷없이 “뻐꾹!! 뻑꾹!!”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후다다닥 거리면서 중간에 서 있던 녀석이 삽짝 문을 달려 나오더니... 이어서 닭장 안으로 들어갔던 세 명도 다 같이 후닥닥 뛰어 나오는 거였다.

대문 밖에서 망을 보던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냅다 같이 뛸 수밖에 없었다.

정신없이 냅다 뛰다가도 웃기는 것은, 그 중간에 서 있던 키 큰 녀석이 우리들중 맨 앞에 뛰어서 골목길을 달려 나가면서도 계속하여 “뻐꾹!! 뻐꾹!!” “뻐꾹!! 뻐꾹!!”을 거듭 외치는 거였다.

나는 달리면서도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잡히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얼마를 뛰었을까... 우리는 동시에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멈추게 되었다.

 

숨을 몰아쉬면서 어찌 된 영문인지 자초지종을 점검해 보니, 닭장 안에서 한 명은 소리없이 성공적으로 닭 모가지를 날개쭉지 속으로 꺾어 움켜쥐었고, 두 번째 녀석이 시도하는 순간 어설프게 건드리는 바람에 닭이 놀라서 닭장 밖으로 튀쳐 나가자, 바로 닭장 앞에 서 있던 키 크고 겁 많은 녀석이 깜짝 놀라는 바람에, 괜찮으니 계속 하라는 뜻으로 “소쩍!! 소쩍!!”을 외쳐 주기로 하였던 것이 놀라고 다급하자 암호가 순간 뒤바뀌어 “뻐꾹!! 뻐꾹!!” “뻐꾹!! 뻐꾹!!”를 거듭 외쳤고.. 그 소리에 모두 혼비백산 하여 냅다 튀었던 거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 키 큰 친구는 모두의 멸시와 지청구를 감당해야만 했고, 그 날 이후로 친구의 별명은 키다리에서 뻐꾸기로 바뀌었다.

 

집으로 돌아 온 우리는 작은 집 닭장의 닭을 두 마리 꺼내서 세 마리를 볶아 맛있게 먹었던 거였다.

다음날 아침 밥상머리에서 나는 작은 아버지에게 어제 친구들하고 놀다가 출출해서 닭을 두 마리 잡았음을 말씀드렸다. 닭서리 이야기는 쏙 빼고..

작은 아버지께서는 잘했다 그러지 않아도 깡술만 마시지 말고 서너 마리 잡으라고 한다는 것이 늘 잊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 그런디, 어제 내가 건넌말 김서방네 갔더니 김서방이 자꾸만 새텃말로 가자구 혀서 같이 새텃말에 가서 놀다 왔다만...여름두 아니구 겨울밤에 뭔 “뻐꾹!! 뻐꾹!!” “뻐꾹!! 뻐꾹!!” 뻐꾹새가 글케 울어 싼는지 모르겠더구나...”

누나와 내 동생 그리고 나는 그 순간 하마터면 숟가락을 떨어트릴 뻔 하였다.

순간적으로 눈을 마주 친 우리 세 범인들은 얼른 밥숟갈을 다부지게 움켜쥐고는 못 들었다는 듯이 겁나게 우악스럽게 밥을 입으로 몰아 넣었던 거다.

 

말 나온 김에, 닭...어떻게 잡는지 이 참에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일반적인 닭 잡는(도축) 법은,

닭의 두 다리를 묶고 닭을 거꾸로 매달아 일시적으로 질식시킨 뒤, 산채로 뜨거운 물에 풍덩 집어넣어 털을 뽑아내고, 그 고통 끝에 닭의 목을 벤 다음, 흡착기를 통해 내장을 털어내서 닭고기를 생산하는 방식이란다.

 

한국의 닭고기 공급업체도 거의 비슷한 방법으로 닭을 잡고 있단다.

그러나, 동물 보호 단체들은 “닭은 두발이 묶여 거꾸로 매달린 채 뜨거운 물에 담겨진 뒤, 모든 털이 뽑히고 목이 잘리는 일련의 과정을 거의 확실하게 의식하면서 죽어간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잔인하게 그렇게 하지 말고 공기 중에 있는 산소를 질소나 아르곤 가스로 서서히 바꾸면서 고통없이 닭을 죽이는 방법을 써야 한다는 게 동물 보호 단체들의 입장이란다.

 

세계적인 불교 지도자 틱낫한 스님의 설파 내용을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틱낫한 스님은 그의 책 ‘화(火)’에서 “사람이 고기를 먹으면 죽을 때 화가 난 동물을 먹기 때문에 몸속에 그 화를 간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도 이렇게 말할 주제는 못되지만, 정말 그렇다면 이 얼마나 잔인한 이야기인가... 가엽고 애처러우며, 모골이 송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다.

닭고기를 안 먹을 수 없다면, 먹을 때마다 그들을 위한 짧은 기도라도 해야만 하지 않겠는가.

어디 닭고기뿐이겠나.. 소고기 돼지고기도 마찬가지이지!!!그래서 결국, 종교인이 아닐지라도 식사 전과 후에는 감사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이렇게 있는 것이다.

 

동물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고통없이 죽어야 함이 당연하듯이... 인간도 고통없이 인격적으로 자연스럽게 죽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거지로 고통스럽게 숨을 몰아쉬며 살고 있는 불쌍한 환자들이 병실에 있을 것이다.

병원의 이익을 위하여.. 국가의 법이 그렇게 되어 있음으로.. 살아 있는 가족들의 어떤 계산에 의하여 인격적인 죽음을 맞지 못하고 있는 가엾은 영혼들을 위하여 우리는 조용히 기도해야만 하고, 국가와 병원과 개인들은 환자의 인격적인 죽음을 위하여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

 

굳이, 헨리 D. 쏘로우의 위대함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 자신이 자연 앞에서 겸손해 지지 않는다면 자연과 인간의 아름다운 공존은 영원히 돌아 올 수 없을 것이다.

닭의 해를 맞이한 정초에, 고백하건대 그 동안 내가 목 비틀은 닭들과 목숨을 빼앗은 모든 동물들(붕어/ 빠가사리/ 잉어/ 토끼/ 밟혀 죽은 개미를 비롯한 일일이 기억하지 못하는 온갖...)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바치고, 영혼들의 아픔에 고개 숙여 용서를 빈다.

 

2005년 1월 6일 잠 못 이룬 신새벽 4시경에...

                                                                  

                                                              수원에서 憔隱堂 Ale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