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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가을에 부치는 시(詩)

Led Zepplin 2008. 10. 5. 03:33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1985>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雪)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 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 최승자<1981년>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 최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