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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사진(寫眞)

Led Zepplin 2008. 10. 7. 19:54

 

  내게는 70대 후반의 어머니가 계신다.

아버지는 젊은 나이의 어머니와 나어린 두 아들을 남기고 떠나신지 이미 오래 전이다.

지난 추석(秋夕)에 제사(祭祀)를 모시면서, 어머니는 우리 형제가 제(祭)를 지내는 뒤에 앉으셔서 무슨 말인지를 혼잣말로 중얼거리셨다.

제사가 끝나고 식사를 하면서 나는 어머니에게 여쭈었다.

"모처럼 마음을 모두고 제를 지내는데, 어머니는 뒤에서 뭐를 혼자 중얼거리셨어요?"하고 여쭈었더니,

빙그레 웃으시며 그냥 이것저것 서운하여 혼잣말로 아버지를 타박하셨다는 거다.

어머니가 서운한 게 많은 모양이라고 생각한 나는,

나중에 어머니 집에 다시 올 때에 어머니가 보시지 못한 내 앨범속에 있는 아버지의 사진 한 장을 확대하여 선물하여야겠다고 혼자 속으로 다짐하였다.

 

이러구러 시간이 흘러 나는 그 생각을 까맣게 잊고 지냈던 거다.

그러다 문득 휴가로 며칠 쉴 수 있는 시간이 생겨 어머니를 뵈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아버지의 사진이 떠오른 거였다.

나는 그날 밤 책장위에 높게 올려져 있던 오래된 앨범(Album)들을 내려 먼지를 털고 뒤적여 보는 기회가 생겼다.

실로 몇 년만에 뒤적여 보는 앨범에는, 중학시절 전학년이 모인 소풍의 장기자랑에서 사회를 보던 어설픈 사진에서 부터 학창시절 온갖 세상 걱정거리는 저혼자 다 짊어지고 우수에 젖은 듯 낯 뜨거운 사진도 있고 유럽으로 일본으로 뭐가 그렇게 목 말랐던지 무작정 껄떡거리고 쏘다니던 사진들로 가히 칠도갑이 되어 있었던 거다.

혼자 부끄러워 낯을 붉히다 혼자 웃다가 때론 뭔가 아련한 추억(追憶)에 젖어들기를 얼마간 반복하던 나는 문득 앨범을 내려온 목적을 깨닫고, 내게 남아 있는 아버지의 사진(寫眞)을 고르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진은 고르고 말고가 없었다.

본디 사진이 몇 장 없었기 때문이다.

그중 어머니와 함께 찍으신 조그만 사진이 눈에 띄어 그 사진을 앨범에서 떼어내기로 하였다.

그 앨범은 옛날 앨범인지라, 사진의 앞 면을 얇은 셀로판지로 전면을 밀봉시키는 방식으로 보관하는 앨범인 거다.

앨범이 이미 낡은 상태라서 조심스럽게 셀로판지를 벗겨내고, 바닥면에 이미 견고하게 붙어있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오래된 사진을 조마조마하는 마음으로 뒷 면에 얇은 칼날을 넣고 조심조심 밀어내자 사진은 떼어졌다.

그러나, 조그만 사진은 이미 낡고 부분적으로 퇴색하였으며 오염되어 제대로 보여지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우연히 무심코 나는 사진의 뒷 면을 보았다.

사진의 뒷 면에는, 옆으로 살짝 뉘어 멋을 부려 '때는 靑春... 1950年 正月 初一日... 結婚 그 즈음에...'라고 가로 세 줄로 만년필로 쓴 글이 있었다.

과연 정상적으로 확대될 것인지 하는 의아심을 갖고 그 밤을 보냈다.

 

이튿날 아침, 오후에는 어머니를 뵐 양으로 아침 식사를 마치고 부랴부랴 서둘러 인근의 사진관을 찾았다.

사진전문가에게 이러구러 어찌어찌 사진을 재탄생시켜 줄 것을 주문한 지 한 시간 남짓 후, 실로 두 장의 사진이 확대 재탄생되었던 거다.

사진 한 장은, 부모님 두 분이 다정하게 나란히 찍으신 사진이다.

어머니는 아버지 앞에 한복을 입고 비스듬하게 앉으신 약간은 부끄러운 듯 다소곳한 모습이셨고, 아버지는 멋진 연회색일 듯한 양털 모직 트렌치코트에 속에는 정장을 하고 둥글고 검은 뿔테 안경을 쓰시고 어머니 뒤에 뒷짐을 지고 비스듬하게 서서 찍으셨다.

다른 한 장의 사진은, 방금 전 그 사진속에 있는 아버지의 상반신만을 독사진으로 확대하고 뽀샵했던 거다.

두 장의 사진을 액자에 넣은 후, 어머니의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나는 내내 아버지를 생각했다.

정말 모처럼 아버지만을 염두로 오래 생각했었던 게 아닌가 싶다.

 

도착하여 선물이라며 어머니에게 사진을 보여드리자, 어머니는 잠시 호들갑스럽게 "아니 어떻게 네가 이 사진을 갖고 있느냐"고 환하게 웃으시더니 잠시 생각에 잠기시는 모습을 보이자마자 눈가에 이슬을 닦으셨다.

아버지 사진을 뵙자, 20대 중반에 청상이 되어 홀로 살아 오신 세월에 잠시 가슴이 먹먹해 눈물이 나셨을 게다.

나는 분위기를 바꾸려고 어머니에게 큰소리로 "아니, 새신랑을 구해 주었으니 쐬주라도 한 잔 줘야 되는 것 아니냐?"고 너스레를 떨었고, 어머니는 오냐 그러자며 주방으로 나가셨다.

어머니가 나가시고 나는 아버지의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사진 속에는, 만주로 홍콩으로 떠돌아 다니시던 갸름한 선비형의 잘 생긴 바람둥이 사내 한 명이 금방이라도 빙긋이 웃어 줄 듯이 나를 바라다 보았다.

이런 일이 있으려고 그랬던지 며칠 전 꿈 속에서, 무슨 일로인지 게릴라 활동(아버지는 생전 최후에, 한국전쟁 직후의 지리산 파르티잔 잔당들을 추격/ 생포하던 고위직 경찰이었다)의 높은 사람으로 일한다는 아버지를 만나러 각종 무기로 중무장한 사람들에게 안내되어 깊은 산 속과 들판을 억수로 오래 걸으며 동행한 끝에 마침내 아버지를 상면(相面)하자 나는 단하(壇下)에 엎드려 목놓아 울고 아버지는 '네가 그동안 이렇게 컸냐'면서 단상(壇上)에서 엎드려 나하고 맞절을 하면서 통곡하셨다.

그렇게 둘이 서로 목놓아 얼마나 울다가 그 울음 소리에 깼던 기억이 불현 듯 났고, 둘째이자 막내 아들인 내가 두어살 무렵에 아버지는 돌아 가셨기 때문에 나는 전혀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도 못하는 아버지의 사진을 빤히 쳐다보니, 아버지는 본래 유식하셨다지만 뿐아니라 잘 생기신 멋쟁이라는 사실이 차차로 느껴졌다.

아버지의 코트는 아마도 검은 색이 점점이 섞인 재회색인 듯 보이며 따스한 양모(羊毛)의 재질로 적당하게 절제된 깃의 각도를 보이고 있었고, 와이셔츠 칼라는 깃이 길죽하고 높은 세련된 하얀 와이셔츠였으며, 안경은 검은 색 뿔테 안경으로 보이고 그 옛날 당시로서 안경코와 연결된 부분에 둥글게 조그만 형상을 디자인하여 모양을 준 부분과 안경의 테 부분이 반원형을 갖추면서도 유려하여 예리하고 이지적인 아버지의 얼굴 모양을 좀 더 따스하게 꾸며준 형상의 안경으로서 그 안경을 구한 안목에는 자칭 심미안이라 자부하는 나도 자못 놀랍기까지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넥타이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아버지는 무늬가 복잡한 아름다운 넥타이를 매고 있었는데 그와같이 넥타이를 매는 방법은 내가 가장 즐겨 매는 바로 그 스타일(Style)이였던 거다.

넥타이를 매는 방법(方法)에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주변에서 나와 같은 스타일로 넥타이를 착용하는 사람을 본 기억이 아주 희미하다.

그 스타일은 넥타이를 매는 방법으로는 제법 세련된 넥타이의 멋과 모양을 보여주지만, 스타일의 결점(缺點)은 착용하는 방법이 일단 복잡하며 구성하면서도 세심하게 매만져 주어야 하고 착용중 자칫 옆으로 돌아 간다는 점이다.

아버지의 사진속에 넥타이도 옆으로 살짝 돌아가 있었던 거다.

실로 오십 몇 년 만에 아버지와 아들은 놀랍게도 서로 같은 스타일로 넥타이를 매고 조우(遇)한 거였던 거다.

그날 밤 나는 어머니와 형님에게 아버지를 만난 꿈을 '리얼하고 유장하게' 이야기하면서 쐬주를 마셨고, 아직도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서운함이 남아 있으신 어머니는 오래 잠을 이루지 못하시는 듯 하셨다.

이 가을이 가기 전에 어머니를 모시고 어머니의 고향인 군산엘 다녀와야겠다.

군산항 안쪽 금강하구 뚝방가에는 갈대가 아름답게 흐느끼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