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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Led Zepplin 2009. 5. 11. 20:18

 

 

 당신을 부르기 전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부르기 전에는
 아무 모습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아닙니다.
 어렴풋이 보이고 멀리에서 들려 옵니다.


 어둠의 벼랑 앞에서
 내 당신을 부르면
 기척도 없이 다가서시며
 “네가 거기 있었느냐”고
 물으시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달빛처럼 내민 당신의 손은
 왜 그렇게도 야위셨습니까.
 못자국의 아픔이 아직도 남으셨나이까.
 도마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나도
 그 상처를 조금 만져볼 수 있게 하소서
 그리고 혹시 내 눈물 방울이

 

  위에 떨어질지라도 
 용서하소


 아무 말씀도 하지 마옵소서
 여태까지 무엇을 하다 너 혼자 거기에 있느냐고
 더는 걱정하지 마옵소서
 그냥 당신의 야윈 손을 잡고
 내 몇 방울의 차가운 눈물을 뿌리게 하소서

                                                   ----- 이어령 /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2

 

 

 

 

 

 

 

  이 50프로 독한 합성주(合成酒)의 도취에서 우리 모두들 깨어나야겠다.

 창부의 웃음, 지폐처럼 흔한 그 창부의 웃음이 있는 답답한 골목길에서 어서들 빠져나가야겠다.

 하나의 담배꽁초만도 못한 시시한 생활 앞에서, 이 억울한 죄악의 형벌 앞에서 다시 한 번 우리 분노해 보자.

 봄만 되면 피어나는 꽃송이들, 그런 삼동 추위의 온실에도 있다.

 동상으로 부푼 소녀의 손가락과, 후발찌를 앓는 소녀의 목덜미와, 화장한 노파의 얼굴과, 스펀지로 캄플라치한 처녀의 유방과······.

 결국은 모두 눈물 같은 것, 화류병(花柳病) 환자처럼 육체는 썩어지는 것, 거짓말같이 우리를 괴롭히는 데이드림을 망각해 보자.

 사막이라도 있으면 싶다.

 짠 바닷물이라도 있으면 싶다.

 아무래도 이 허공 속에선 살기 어렵다.

 춘화도를 보듯 그러한 감격이라도 좋으니, 무슨 기적과  같은 오늘이 왔으면 싶다.

 비누 물방울, 오색영롱한 비누 물방울, 늬는 어느 바람 속에서 사라졌느냐?

 지푸락 같은 목숨을 지키다가 무척 피로했구나.

 무척 울다가 돌아섰구나.

 발가벗은 어린이처럼 살고 싶었다.

 눈치도 부끄러움도 없이 발가벗은 채로 살고 싶었다.

 옛날의 궁전 같은 엄청난 사치와는 외면하면서 솔잎 같은 것하고 벗하며 살고 싶었다.

 어쩌다가 사과를 따 먹었느냐?

 뱀의 혓바닥은 독이 있는데, 어쩌다가 사과를 따 먹었느냐?

 향기 짙은 그 붉은 껍질을 저미어 물고, 그래도 후회는 하지 말아라.

 옷을 벗어라.

 천치처럼 옷을 벗어라.

 발가벗은 살덩이에 햇볕이 묻고, 하늘이 묻고, 눈치 없는 어린이처럼 살고 싶어라.

 전쟁은 싫구나.

 해골같은 달이 뜨는데, 전쟁은 싫구나.

 낙엽은 그래도 행복하였다.

 계절도 없이 죽어야 하는 우리는 아무래도 성처럼 영원할 수 없다.

 전쟁은 싫구나.

 카키색 전쟁 앞에서 찢어진 자명고처럼 울 수도 없이 눈을 가리고, 눈을 가리고 태양을 본다.

 저 구약 시대 신은 어린 양들의 생혈(生血)을 빨고 비대하였다.

 인간이 저 손을 벌리고 고아 같은 표정으로 무엇인가 바랄 적에, 신은 목상木像의 얼굴로 침묵하였다.

 풍금을 울리지 마라, 지친 탕아(蕩兒)가 돼도 버리고 온 고향일랑 찾지 말아라.

 이제는 잡아줄 양조차 없어 오늘의 제신(諸神)은 굶주렸는데, 홍수가 나도 다시는 노아의 방주를 만들지 마라.

 해초가 되어 먹탕 같은 흙탕물 속에 해초가 되어 흐느적거리며 살아야 한다.

 피리 소리를 내자.

 그 고운 목소리로 피리 소리를 내자.

 산도 바다도 머리 풀고 울도록 구성진 북소리도 울려보아라.

 노을이 오면 하루살이처럼 죽게 되는데, 그만한 노래쯤은 있어야 한다.

 꼭두각시 모양으로 춤을 추다가, 훨훨 타오르는 불꽃이 되어 어둠에 묻힌 밤을 밝히어보자.

 너무 늦었다.

 그렇게 되기에는 너무 늦었다.

 광장의 고독이 기둥 같은데 우리 참 너무 늦었다.

 한 마리 학이 되어 구름 밖을 날기에는, 한 송이 꽃이 되어 향내로 살기에는 너무 늦었다.

 이 50프로 독한 합성주의 도취에서 우리들 모두 깨어나야겠다.

 밝은 정신으로 , 벌집같이 구멍 난 인간을 보라.

 못쓰게 만들어놓은 병든 사지를, 야위어가는 병든 사지를.

 다음으로 찢어진 깃발을 꽂고 우리의 패배를 서러워하자.

 인간들끼리, 약한 인간들끼리 최후의 만찬처럼 음식을 차려놓고 헤어지자.

 모두들 헤어지자.

                                                                           ----- 이어령 / 수인영가(囚人靈歌)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십심도
 영하 이십도 지상에도
 온몸을 뿌리 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받는 몸으로, 벌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몸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오도 영상 십삼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 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  황지우 /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