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형!
이루어놓은 일이라고는 회한(悔恨)속에서 술잔만 비워 소주 값만 올려놓은 것밖엔 없거늘...
이렇게 또 한 해가 지나갑니다 그려.
한 해를 떠나보내는 이 무렵엔 핑계삼아서 술을 많이 마시게 됩니다.
뒤돌아 본 아쉬움과 그리움을 한 잔의 술 잔속에 털어버리고 싶기 때문이 아닐런지요.
K형!
한 잔의 소주를 앞에 놓고, 젊은 시절의 노트를 펼쳐 바라보며 읊조려 봅니다.
기러기 떼는 무사히 도착했는지
아직 가고 있는지
아무도 없는 깊은 밤하늘을
형제들은 아직도 걷고 있는지
가고 있는지
별빛은 흘러 강이 되고 눈물이 되는데
날개는 밤을 견딜 만한지
하룻밤 사이에 무너져버린
아름다운 꿈들은
정다운 추억 속에만 남아
불러보는 노래도 우리 것이 아닌데
시간은 우리 곁을 떠난다
누구들일까 가고 오는 저 그림자는
과연 누구들일까
사랑한다는 약속인 것 같이
믿어달라는 하소연과도 같이
짓궂은 바람이
도시의 벽에 매어 달리는데
휘적거리는 빈손 저으며
이 해가 저무는데
형제들은 무사히 가고 있는지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쓸쓸한 가슴들은 아직도 가고 있는지
허전한 길에
씁쓸한 뉘우침은 남아
안타까운 목마름의 불빛은 남아
스산하여라 화려하여라.
기억하시겠지요, 김규동 선생(先生)의 ‘송년(送年)’입니다.
부끄럽게도 창비(創批)에 도전(挑戰)하던 그 무렵...
‘나비와 광장’을 주절주절 읊어대며 신촌의 뒷골목 술집들을 헤매고 몰려다니다가...
새벽에는 기어이 전봇대를 붙안고 “행님, 행님”하며 울부짖던 그 시절...
그 겨울날은 추웠고 달은 역시 아직도, 지금처럼 높다랗게 시리도록 아름다웠습니다.
술잔을 앞에 놓고, 이렇게 앉아있는 오늘같은 밤이면 떠오르는 한시(漢詩)가 있습니다.
旅館寒燈獨不眠 : 여관 차가운 등불 아래 홀로 잠 못 이루고
客心何事轉凄然 : 나그네 속마음 무슨 일로 이리도 처절한가
故鄕今夜思千里 : 고향서도 오늘밤 먼 곳의 나를 생각하리니
霜鬢明朝又一年 : 서리같은 흰 머리 또 한 해가 지나가는구나
만리타향 해외의 객창(客窓)에서 송년의 달을 바라보며 외로움을 달래야만 했던...
고적(高適;707-765)선생의 ‘제야음(除夜吟)’입니다.
우리 비록 지금은 박제가 된 맹수(猛獸)처럼 초라해 졌지만...
빛나고 아름답던 청춘(靑春)의 시절(時節)들은 가끔 떠올라...
그 눈부셨던 섬광(蟾光)이 통증(痛症)처럼 단말마적(斷末魔的)으로 되살아나곤 하더이다.
K형.
"우리 부족(部族)에게 이 대지(大地)의 모든 부분(部分)은 다같이 신성(神聖)하다.
모든 언덕, 모든 골짜기, 모든 평원(平原)과 숲은...
이미 사라져 버린 날들의 슬프고 행복(幸福)했던 사건(事件)들로 아로새겨져 있다.
최후(最後)의 붉은 사람이 사라지고 나면...
얼굴 흰 사람들에게 우리 부족(部族)의 추억(追憶)은 하나의 신화(神話)로 남을 것이다."
----- American Indian 스쿼미시족(族) 시애틀 추장.
하나의 신화(神話)로 남은 추억(追憶)을 그리워하며 가슴 아파하는 것이 어찌 저뿐이겠습니까 마는...
이 겨울엔 유난히도 더욱 그립습니다.
새로운 세기(世紀)가 시작된지도 이미 오래건만...
신성(神聖)한 계곡(溪谷)과 봉우리와 숲에서 쫒겨갔던 순졸(純粹)한 영령(精靈)과 피로 물들기 전의 천지(天地)의 신령(神靈)한 기운(氣運)이...
돌아온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습니다.
다만, 지난 세기말(世紀末)에 만난 노자(老子)와 장자(莊子)는 제 삶의 위안(慰安)입니다.
K형!
물신(物神)이 떠나간 천지(天地)에서 붉고 희고 까만 사람들이...
화목(和睦)하게 어울려 춤을 추며 노래할 수 있는 날이 설령 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EGYPT 왕자(王子)로 영화화(映畵化)한 모세의 신화(神話)보다...
졸본부여(卒本夫餘)를 건국(建國)한 해모수와...
명사(名詞)로서 존경(尊敬)받는 신(神/하나님)이 아닌...
형용사(形容詞)로서의 신(神/하느님)을 찿아 낸 최해월 선생(先生)과...
컴퓨터의 제왕(帝王) 빌 게이츠 보다는 숲을 노래한 쏘로우를 더 존경(尊敬)하며...
양인(洋人)들 스스로도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한 채 만들어 낸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보다는 부디즘(Buddhism)에서 새로운 철학을 발견해 내고저 하고...
역신(疫神)마져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처용의 낭만(浪漫)에 공감(共感)하며...
난생설화(卵生說話)를 꾸미며 새로운 질서(秩序)를 꿈꾸던 조상(祖上)들의 순진(純眞)함을 사랑하며...
초등학교(國民學校)를 졸업(卒業)하고 두 평 서점(書店)을 운영(運營)하는 사람의 삶이...
명문대를 졸업하고 유학을 다녀와서 비디오방(房)을 운영하는 사람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영원(永遠)이라는 시간개념(時間槪念)속에서 담배 피우고 30년 살다 죽은 사람의 삶이...
담배 안 피우고 100년 사는 사람보다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는 왜냐하면...
담배는 그 사람에게 있어서 외로운 인생(人生)의 귀(貴)한 위안(慰安)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언젠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이야기한 심연(深淵)을 즐겁게 맞이하기 위한...
내 인생(人生)을 불행 중 다행(不幸中多幸)이라고 감사(感謝)하는 마음입니다.
K형!
결국(結局), 언젠가는 모든 것들과 헤어져야만 하는 것이 인간(人間)의 길이건만...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한 해와 다시 또 이렇게 작별(作別)해야만 하는 제야(除夜)에는...
참으려 하면 할수록 착잡한 뉘우침이 앞을 가로막습니다.
그러나, 우리 지나온 길을 언제까지나 어루만지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깊고 푸른 이 밤이 지나고 나면 젊고 새로운 하루가 열리겠지요.
살아온 시간(時間)들이 지켜보고 있음을 알기에...
조용히 그러나 힘있게 달려가겠습니다.
폭풍(暴風) 또는 햇살이 반짝이는 미지(未知), 그 운명(運命)의 시간(時間)속으로...
내내 강건(康健)하시길 빌며 이만 총총.
2009년 12월 27일 무렵 憔隱堂 ALE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