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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벽화(金堂壁畵)의 진실(眞實)

Led Zepplin 2010. 4. 16. 15:33

 

 

  "목탁 소리가, 비늘진 금빛 낙조 속에 여운을 끌며 울창한 수림을 헤치고 구릉의 기복을 따라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무성한 숲과 숲, 스며드는 습기로 바위의 이끼는 변함 없이 푸른데, 암수 서로 짝지어 어르는 사슴의 울음은, 남국적인 정서로 이국의 애수를 돕는 듯했다.

담징은 바위에 앉은 채 움직이려 하질 않았다."

 

소설가 정한숙(1922~1997)의 단편소설 '금당벽화'는 위와 같이 전개되며...

1955년《사상계》에 발표된 그의 대표적인 문학작품이다.

작품은 고구려의 스님 담징이 금당벽화를 그리면서 느끼는...

사바 세계에 대한 욕망과 종교적 예술혼의 표현이라는 미묘한 관계를 유려하게 표현하고 있다.

아쉬움이라면, 정한숙의 소설에서는 파란 만장한 스토리가 없다.

또한, 가슴저린 사랑의 파문(波紋)도 극적인 광태(狂態)도 없다.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장편소설 '금각사' 이거나 김성동의 '만다라'처럼 말이다.

다만, 깊고 잔잔한 호수와도 같은 정적미(靜寂美)가 있을 뿐이다.

 

담징(579 - 631)은 고구려의 승려이자 화가로서 학문과 그림 솜씨가 뛰어났으며...

일본의 초청으로 610년에 백제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종이/ 먹/ 공예/ 채색 등의 기술을 전수하였다.

또한 일본의 호류지(法隆寺)에 머물면서 왜인들에게 불법과 학문도 가르쳤다.

당시 고구려는 수나라와 전쟁을 치르고 있던 중이라 담징의 마음은 매우 혼란스러웠는데...

고구려가 크게 승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감사와 기쁨의 마음으로 호류사의 금당에 '아미타정토도'등의 그림을 그린 거다.

담징은 일본에서 종이와 먹의 시조로서 오늘날에도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

 

호류지(法隆寺)는 일본의 아스카 시대(飛鳥時代, 594~710년)인 서기 607년에 쇼토쿠태자(聖德太子)가...

부처의 힘으로 병석에 누운 부친 요메이 왕의 쾌유를 기원하며...

백제에서 유명한 건축가와 장인을 초청하여 건립한 1400살이 넘은 대사찰이다.

쇼토쿠 태자는 백제 왕실과 인연이 깊다.

백제의 아좌 태자(阿佐太子)가 바로 쇼토쿠 태자의 초상화를 그린 스승이었으며...

쇼토쿠 태자 자신도 사실은 백제계라는 것이 후대의 논리이다.

 

아스카 시대(飛鳥時代)는 선진문화인 한국과 중국의 제도, 문물 등을 수입해 일본 국내의 체제를 개혁한 시대이며...

쇼토쿠 태자의 섭정시대를 중심으로 한 시대라는 설이 통상적이다.

쇼토쿠 태자는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고 관료제를 정립했으며, 유교의 철학을 바탕으로 헌법을 만들어 천황의 절대적 지위를 확립했다.

'천황(天皇)'이라는 칭호도 쇼토쿠태자의 시대부터 쓰였다는 설이다.

쇼토쿠태자가 존재하던 아스카 시대(飛鳥時代)의 왜(倭)에는...

유교와 불교를 비롯해 건축/ 조각/ 회화 등의 대부분이 한반도에서 건너간 학자/ 승려/ 백제의 유민(遺民) 등에 의해 전수됐다.

호류지(법륭사)는 아스카 시대(飛鳥時代, 594~710년)를 대표하는 일본의 문화유산이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고 일본이 자랑하는 불교예술의 정점이다.

 

호류지에는 여러 건축물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인 금당에는 고구려의 스님 담징이 그렸다는 벽화가 있다.

'금당 벽화'로 더 유명한 이 그림은 경주의 석굴암/ 중국의 원강 석불과 함께 동양의 3대 미술품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49년 1월 내부 보수공사 도중에 전기 취급 부주의로 화재가 일어나서 원래의 그림은 크게 손상되었지만...

1968년 일본의 최고 거장 14명의 화백이 1년여간 지극한 노력으로 완성하여 금당에 봉납 정밀 복제(불탄 원화는 수장고에 보관 중)하였다.

현재 호류지 금당에 있는 12면 벽화는 소실 이후 일본인 화가들에 의해서 그렇게 복원 제작된 것이다.

불에 탄 벽화는 완전히 소실된 것이 아니며, 연기에 그을렸기 때문에 희미하게 벽화의 흔적이 남아있다.

 

벽화를 감상한 사람들은 대체로...

"성자와 미녀 그리고 미소년/ 인간과 신의 풍모가 오묘하게 조화된 극락세계의 신상들은 벽화 속에서 쉼없이 율동하여 생동감을 보인다.

살집이 만져질 듯 윤기 어리고 탱탱한 육체/ 모든 중생들의 깨달음을  말하는 관음/ 문수/ 보현 보살의 아름다운 자태...

우아한 얼굴/ 건실한 청년의 육체를 지닌 보살들은 섬세한 필선 속에서 해탈의 이상에 골몰하는 정심(精心)의 세계"라고...

긴장과 희열의 황홀감을 느끼게 된다는 거다.

모두 12폭의 벽화는 금당 동서남북 벽면에 각각 붙은 4개 부처의 사방 극락정토도와 8개 보살 그림으로 이뤄진다.

 

일본에서는 1980년 이후 그 금당의 벽화가 담징의 작품이 아니라 일본의 장인들의 솜씨라는 주장이다.

"호류지 금당이 서기 670년에 불이 나 뒷날 다시 금당을 재건했기 때문"이라는 거다.

호류지는 화재로 재건 한것이 아니라는 ‘비재건설’(非再建說 1905년)을 입증한 사람은...

‘고구려자’(高麗尺·고마샤쿠)로 금당 등을 실측한 도쿄대 건축학과 세키노 다다스(關野貞) 교수등이었다.

일본 정부 문부성 역사교과서(1924년)에서도 담징의 금당벽화를 인정했으며...

일본어 사전 ‘고지엔’(1963년)에서도 역시 ‘비재건설’을 뒷받침했다.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에는 7세기 초 고대국가 일본의 기틀을 닦은 쇼토쿠 태자가 호류지를 건립했으나...

원건물은 670년 큰 불에 탔으며 이후 다시 지었다는 내용이 있다.

논란의 핵심은 지금의 호류지 금당이 정말 새로 지은 것인지 원형인지를 둘러싼 것으로 벽화가 담징의 작품인지 와도 직결된다.

담징은 631년 사망했기 때문에, 재건설이 맞다면 벽화는 담징과 무관해진다.

한/ 일 미술사가들은 삼국시대 화풍이 벽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는 인정하지만, 담징 제작설에는 대체로 고개를 가로젓는다.

호류지 근방의 발굴 성과와 금당 부재에 대한 연대 측정 결과 때문이다.

 

1939년 현재 금당이 있는 서원 가람 동남쪽에서...

먼저 지어진 백제식의 초창기 절터인 약초가람(와카쿠샤 가람) 터가 발견돼 절을 다시 지었다는 결정적 근거가 성립됐다.

2004년 말에는 원래 절터인 약초가람 안에 그렸다가 불타 무너진 것으로 보이는 채색 벽화 조각들이 무더기로 발굴됐다.

고열에 변색되거나 그을린 파편들의 발굴로 절이 불탔다는 구체적 증거가 확보된 것이다.

금당 나무 부재의 연대를 정밀 분석해보니 벌채 연대가 650~660년대란 결과도 나왔다.

재건 연대 논란이 사라진 것은 아니나, 새 금당 건물을 짓고 벽화를 그렸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정설로 굳어졌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일부의 학자들은 "담징이 금당벽화를 그렸다는 것은 근거없는 말"이라고도 한다.

물론 호류지가 삼국의 영향을 받은건 확실하지만...

담징이 그렸다는 내용의 출처를 대보라고 일본학자들이 요구했을 때 그 어느 아무도 출처를 들이대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사료가 없기 때문이다.

 

하여, 금당벽화를 따라가는 나의 마음은 착잡하고 왠지 초조하다...

 

그래도, 한 번 더 짚어보자.

호류지의 금당은 670년에 소실되어 710년경에 재건된 것이다.

따라서 금당벽화는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에 다시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담징이 610년에 일본에 가서 631년 사망시 까지 체류한 것은 사실이지만...

700년대 초에 금당(金堂)이 완공될 당시에 벽화를 그렸다고 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호류지의 연대표를 보면, 다른 고구려 승려인 혜자와 백제 승려인 관록의 기록은 있지만 담징에 대한 기록은 없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다른 승려들의 기록은 있으면서도 담징에 대하여는 왜 기록하지 않았을까?

금당벽화를 담징이 그리지 않았음을 왜곡하기 위하여 삭제하였을까 아니라면...

 

우리나라의 고추가루 버무린 김치는 일본에 가서 백기무치가 되었으며 총각김치는 다꾸앙이 되었다.

백제의 스님과 장인들이 지은 호류지의 금당과 5층탑은 그토록 오랜 세월에 흘렀음에도 백제 건축의 원형이 그대로 살아 있다.

처마의 곡선과 건축물의 비례 등 우리의 기능과 특징이 고스란이 남겨져 있다는 거다.  

 

억울해서가 아니라, 호류지를 좀 더 찬찬히 들여다 보자.

누가뭐래도 호류지(法隆寺)의 대표적 건축물은 오중탑과 금당이다.

오중탑 내부의 일층 모서리 네 곳에는 직각으로 두 면이 세워져 모두 여덟 면이 있는데...

이곳에는 관음/ 문수 등 여러 보살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들 벽화의 보살들은 금당벽화의 보살상과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거다.

 

금당은 중앙에 석가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석가삼존불 역시 백제 시대 작품으로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불상의 옷 주름은 지금도 존재하는 익산/ 부여/ 공주/ 서산 등 지역의 마애불상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똑같은 물결무늬로...

일본에는 전~ 혀 없는 것이다.

금당의 불상 위 천정에는 닫집이 있는데 그 닫집 역시 우리의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으로...

닫집의 '봉황장식'은 무령왕(501-523)의 무덤에서 출토된...

베게의 양 쪽에 장식한 봉황장식이나 그 유명한 '백제 금동향로'의 맨 꼭대기에 있는 봉황과 너무도 닮아있는 거다.

 

금당의 천정에서 벽까지 비천상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래 산 그림이 있으며...

더 아래에 그 유명한 담징의 벽화, 이름인즉 ‘사불정토도’가 있다.

금당벽화는 동서남북 네 벽에 모두 12면 벽화로 되어있는데...

이들은 석가정토도/ 아미타정토도/ 미륵정토도/ 약사여래정토도의 넷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칭하여, 이 벽화를 '사불정토도'라고 하는 거다.

각 그림의 복판에는 석가/ 아미타/ 미륵/ 약사여래가 그려져 있고 이들의 양 옆에는 호위하듯이 보살들이 중앙을 향하여 군집하고 있다.

보살들은 서로 대칭을 이루며 각각의 면 모두의 형태가 완벽 일치한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작은 물건이 있는데, 작은 것에 집착하는 니혼진(日本人)들에게는 대단히 소중한 보물(寶物)인 거다.

그 것은 다름 아닌 '옥충주자(玉蟲廚子)'인데...

간단히 말해서 부처님을 모셔둔 작은 찬장이다.

이 찬장은 나무로 만들어졌고 모서리 장식을 위해서 비단벌레의 등껍질을 붙였으며...

그 위에 청동판을 가늘게 뚫어서 비단벌레의 등껍질이 보이게 한 정교한 물건이다.

이 비단 벌레는 풍뎅이 비슷한 곤충으로 등은 검은 청색과 녹색으로 황홀할만큼 반짝거린다.

우리의 비단벌레가 일어(日語)로는 옥충(玉蟲) 즉 옥벌레이다.

찬장의 위쪽 지붕 아래 감실에는 부처님이 안치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데, 이 나무 찬장은 표면에 나전 칠을 했다.

나전칠기는 한반도의 낙랑 유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로 그 것이다.

그 당시 왜(倭)에는 아직 나전이 전해지지 않았을 때 만들어진 거다.

게다가, 찬장의 아래쪽에는 사신사호도(捨身飼虎圖)가 그려져 있는데...

호랑이의 사실적이며 권위에 가득찬 모습이 일품이다.

그 넓은 일본땅 어디에도 호랑이가 없기 때문에 일본 사람으로서는 흉.내.불.가.의 모습인 거다.

 

이렇게 호류지에는 여러 건축물과 각종 부처님들이 모셔져있으며...

중요한 건물과 불상은 모두 백제의 양식으로 제작되었음에도...

그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인 금당의 벽화만이 일본인의 그림이라는 이야기는 ‘대.단.히. 어.색.하.다.’고 나는 본다는 거다.

 

고구려의 승려 담징의 신화(神話)와 실제 벽화의 사이에 존재하는 진실(眞實)은 언제쯤 드러날 수 있을까...

순박한 민족주의 관점만으로는 벽화의 진가(眞價)를 완전하게 평가할 수 없다.

'사불정토도'에는 서아시아 아잔타 석굴의 연화보살과 중국의 돈황 및 원강 석굴과 닮은 보살상이 대부분.

그러한 묘사의 기법은 6/ 7세기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의 국제적 양식의 관점으로 판단해야만 원만하다.

'벽화(壁畵)'라는 국제적 양식은, 불법(佛法)을 온세상에 전파하고 싶어한 그 시대 불교도들의 애절한 염원이 승화한 예술적 선물인 거다.

그러한 세계적 벽화를 소유한 호류지는 1993년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그래서.. "조랑말일지언정 가는 길만 알고있다면, 천리마보다도 빠르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아쉽지만, 숙제는 연구하여 언젠가 우리가 풀기로 하고...

금당벽화(金堂壁畵)가 1400년전 아시아 불교미술의 숭고한 선물이라는 사실 그 자체에는 감동하도록 하자.

 

                                        (금당의 벽화중 일부)

 

 

호류지 사찰의 중심부에는 '건축의 진주'라고 불리는 팔각형의 유메도노(夢殿)가 있는데...

세계 어디에도 자랑할만한 아름답고도 유려한 최고의 건물이다.

이 유메도노는 쇼토쿠 태자가 기거했던 곳으로...

태자는 백제의 학승 혜충과 고구려의 혜자를 스승으로 삼고 유년시절부터 불경을 공부했다.

유메도노에는 일화가 있다.

백제 27대 위덕왕이 선왕을 그리워해 존상인 '구세관음상(일본의 국보)'을 만들어 일본 왕실에 보냈으며...

아스카지방의 어느 사찰에 두었다가 다시 호류지로 옮겼는데...

오랜 세월동안 그 행방을 아무도 몰랐다는 거다.

 

1884년 미국인 동양사학자가 유메도노의 한 구석에서 먼지에 쌓인 큰 보따리를 발견했는데...

사찰에서는 그 보따리를 풀면 부처의 노여움을 받는다고 금기시하며 두려워하여...

짐을 묶어 싼 천을 풀 때 승려들이 혼비백산 했다고 한다.
그 유메도노에서 1200년의 잠을 깬 구세관음상은 높이 179.9㎝의 녹나무로 조각하여 금각을 입힌 불상이다.

광배 부분에 조선식 금동 조각으로 된 관과 보석을 흩뿌린것 같은 여러 줄의 긴 영락들이 늘어져 있어...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일본 불교예술의 최고로 인정한다.

그 것 역시도 백제의 불상인 거다.

 

 

이 건물이 금당(金堂)이다.

얼마나 귀티나게 웅장하고 정교하며 우아한가...

일층의 기와 지붕과 2층의 기와 지붕을 자세히 보자.

아래의 오층탑도 마찬가지이다.

일층 기와지붕의 끝은 밋밋하게 하늘로 덜 솟았지만 2층이상의 지붕끝은 날아갈 듯이 하늘로 향하여 있다.

날아갈 듯이 하늘로 향하여 있는 그 약간의 차이가 '백제풍'이라는 거다.

일층의 지붕끝이 밋밋하게 하늘로 덜 솟게 된 것은 후대의 일인(日人)들이 개보수를 하면서 '일본풍'으로 수리를 했기 때문이다.

물론 기술력의 차이를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탑이란 원래 스투파(卒塔婆)라고 하여 석존의 유골을 봉안하기 위해서 만든 구조물인데...

우리는 오층탑이라고 하는데 일인들은 오중탑이라고 한다. 

이 탑이 일본 탑과 다른 것은 탑의 각 층별 처마의 길이가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진다는 점이며...

이런 형태가 '백제탑의 특징'이다.

 

고로, 이 탑 역시 백제 사람이 만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거다.

백제인들은 백제의 익산(예전엔 '이리'/ 더 그 이전에는 '솜리')에 삼원 삼탑의 대사찰 '미륵사'를 만들었으며...

중앙의 목탑은 대략 높이가 110미터였다고 한다.

후대에 지어진 것으로는 임진년 왜란 뒤에 사명대사가 다시 지었다고 하는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이 백제의 기법으로 지어진 건축물이라 한다

 

       * 호류지 금당과 5층탑 복원도(원래의 모습을 그렸음)/ 종이에 먹펜/ 김영택화백/ 2009년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