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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소를 찾아서

Led Zepplin 2010. 6. 23. 22:45

 

 

  6월의 중순을 지나면서 사오십일간의 긴 장마가 시작되었다.

한밤중인 지금 비는 소리없이 때로는 흐드러지도록 내리고 있다.

내리는 빗속으로 초대하지 않은 지난 시절의 추억들이 나도 모르게 조용히 스며든다.

 

아버지가 떠난 중학교 2학년의 그 해 겨울부터 아픔같은 슬픔을 참기 위하여 눈에 띄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던 어느 날 부터인가 하나의 질문이 생겨나게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

그러나, 이 질문은 곧 이어진 진학과 학업, 사회의 진출, 해외로 떠도는 내게 주어진 매력적인 외국 문물과 문화가 주는 쾌락 그리고 직무의 적응, 결혼과 승진 등 세속적 욕망의 가치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 질문은 까마득히 잊혀져 갔다.

 

그렇게 서른 중반의 어느 토요일 오후 저녁 무렵, 퇴근을 위하여 자동차의 시동을 걸고 엔진의 워밍(Worming)을 위한 그 짧은 기다림의 순간 문득 눈앞에 펼쳐진 석양을 바라보다 나는 왈칵 울음을 쏟았으며 가슴속 깊은 곳에 침잠(沈潛)되어 있던 그 화두(話頭)는 제어(制御)할 수 없는 부력(浮力)으로 떠올라왔던 것이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로 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오래 전 어느 수행자(修行者)가 물었다.

“그대 젊은이여,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것과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찾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소중한가?”

아픔을 참기 위하여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시절은 다시 시작되었으며, 종잡을 수 없는 해답(解答)을 찾기 위한 몸부림은 여러 가지 운동으로 그리고 술로부터 시작하는 탐닉적 유혹으로 젖어들었고, 수년의 시간이 흘러 그 일련의 종착점(終着點)처럼 나는 산(山)에 빠져들었다.

우리나라의 명산을 두루 떠돌던 나는 어느 겨울 마침내 미루고 미뤄두었던 지리산을 찾아 출발하였던 거다.

 

‘지리산(智異山)’

그 겨울의 늦은 오후, 화엄사(華嚴寺)의 사하촌(寺下村) 어느 민박집에 여장을 내린 나는 열어놓은 한지(韓紙)로 바른 낡은 방문(房門) 밖으로 부는 바람과 뒹구는 낙엽을 바라보며 휴대용 가스버너로 끓인 라면을 안주삼아 30도 소주 한 병을 나발불고 방문을 소리나게 닫은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를 잤을까, 소주가 깨면서 소변을 보고 방으로 돌아오는 움츠린 어깨너머로 눈발이 성기게 내리기 시작했다.

 

콩을 볶는 듯한 기총사격을 등 뒤로 받으며 파르티잔들을 따돌리고 계곡을 뛰어 내달리던 황급한 달음질이 천길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면서 “아버지~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른 나는 내 비명에 놀라 잠을 깨었으며 놀라 가쁜 숨을 몰아쉬고 방문을 벌컥 열자, 신새벽의 마당엔 하얀 눈이 마루 위까지 수북하도록 쌓여 있었다.

 

다시 라면 한 봉지를 빈 속에 끓여 채우고 화엄사 계곡을 통한 노고단(老姑壇) 정상을 향하여 눈발을 헤치며 올라갔다.

노고단 정상까지 초행길의 거친 산행(山行)을 마치고, 화엄사 일주문(一柱門)을 들어와 고단한 다리를 쉬려 대웅전(大雄殿) 앞 적묵당(寂黙堂)의 툇마루에 주저앉은 나그네는 엄청난 눈이 내렸음으로 관광객이 거의 없는 한가로운 탑 마당과 폭설임에도 불구하고 바람 한 점 없이 따사롭게 내려 쪼이는 햇살을 유유히 음미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심코 사찰 기둥에 적혀있는 불가(佛家)의 글귀를 읽어 내려가던 중.. 그 몇 글자가 가슴 깊은 곳을 꿰뚫어 찌르고 지나가는 그 순간 대웅전 앞 탑 마당에서 워낭소리를 철렁거리며 천천히 지나가는 커다란 흰소를 눈으로 가슴으로 직접 보았던 거다.

 

이 일은 초기 기독교의 포교(布敎)와 신학(神學)의 주춧돌을 놓은 바오로(바울)가 다마스커스에서 겪었던 경험과 유사(類似)한 것일런지도 모르겠다.

이교도(異敎徒)였던 바울이 다마스커스의 여정(旅程)에서 돌연 예수의 가장 열성적이고 으뜸가는 사도(使徒)로 태어난 것처럼 나는 내 신앙(信仰)을 버리고 새로운 길로 저벅저벅 들어서기 시작했던 거다.

 

소치는 다니야가 말했다.

“나는 이미 밥을 지었고 우유도 짜 놓았습니다. 마히 강변에서 처자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내 움막지붕에는 이엉을 덮어 놓았고 집 안에는 불을 지펴 놓았습니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스승은 대답하셨다.

“나는 성내지 않고 마음의 끈질긴 미혹도 벗어버렸다. 마히 강변에서 하룻밤을 쉬리라. 내 움막에는 아무 것도 걸쳐놓지 않았고, 탐욕의 불은 남김없이 꺼 버렸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 불교 최초의 경전〈숫타니파타〉중에서

 

성경(聖經)을 통하여 울림을 받지 못했던 나는 오랜 천주교도(天主敎徒)였으며, 이대(梨大)를 나와 수녀(修女)가 된 누나의 아름다운 얼굴이 그 즈음엔 자주 떠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영혼(靈魂)의 문(門)을 강하게 두드렸던 불교(佛敎)의 경전(經典)들을 손에서 놓을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경이(驚異)로운 신세계(新世界)가 거기 그렇게 우뚝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만법은 한 곳으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눈썹을 곧추세우고 활활 타는 불덩이같이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으며

갈 때도 같이 가고 머물 때도 같이 머물다가

홀연히 의정이 생기거든 겁내지 마라

큰 싸움에 임한 듯 다른 것 돌아볼 틈 없이

맞는 경계 거슬리는 경계 만나거든 잘 조화시켜라

돌아갈 곳 모르겠거든 다른 일 해도 좋다마는

철위산을 때려부수고 나서 보물창고에 걸터앉아

눈 깜박거리고 눈썹 치켜뜨는 것에

모든 기연 다 나타낼 수 있으면

청주의 베옷은 일곱 근이지만

문앞의 복숭아는 여전히 천 그루라네...

----- 조주선사(趙州禪師)의 공안(公案) / 만법귀일(萬法歸一)

 

조주선사(趙州禪師/ 778∼897)는 20세 무렵 스승 남전선사(南泉禪師)에게 물었다.

“무엇이 도(道)입니까?”

“평상(平常)의 마음이 도이다.”

“그래도 닦아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든 하려 들면 그대로 어긋나버린다.”

“하려고 하지 않으면 어떻게 이 도를 알겠습니까?”

“도는 알고 모르는 것에 속하지 않는다.

안다는 것은 헛된 지각(妄覺)이며,

모른다는 것은 아무런 지각도 없는 것(無記)이다.

만약 의심할 것 없는 도를 진정으로 통달(通達)한다면...

허공(虛空)같이 툭 트여서 넓은 것이니,

어찌 애써 시비(是非)를 따지겠느냐...”

조주(趙州)는 이 말 속의 깊은 뜻을 단박에 깨닫고, 마음이 달처럼 환해져 오도송(悟道頌)을 읊조리며 쓸데없는 번뇌 망상을 쉬었다.

 

나의 몸은 본래 없는 것이요

마음 또한 머물 바 없도다

무쇠 소는 달을 물고 달아나고

돌사자는 소리 높여 부르짖도다

(我身本非有 心赤無所住

鐵牛含月走 石獅大哮吼)

----- 조계종(曹溪宗) 10대 종정(宗正) 혜암선사(慧菴禪師)의 오도송(悟道頌)

 

나는 아직 돌사자의 울부짖음과 무쇠 소가 하늘을 나르는 소식을 깨닫지 못했으며...

노자(老子)와 장자(莊子)를 읽었음에도 아직 장주(莊周)가 나비 꿈을 꾸었던 도리조차도 알지 못한다.

영산(靈山)의 고찰(古刹)을 찾을 때마다 저잣거리의 탁한 홍진(紅塵)을 조금이나마 털어냈는지를 돌이켜 보지만...

털어내기는 커녕 수렁속에 깊게 빠진 두 다리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늘상 전전긍긍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제넘게도...

나는 미래의 어느 날인가 잃어버린 흰소의 고삐를 움켜쥐고 그 등에 올라타 버들피리를 불며 집으로 돌아가는 본래진면목(本來眞面目)을 꿈꾼다.

어느 겨울 변방의 바람부는 바닷가를 떠돌다 나무 그늘아래 고요히 잠든다 해도, 나는 영원토록 그 꿈을 버리지는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