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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생각나는 안토니오 그람시의 동화(童話)

Led Zepplin 2010. 9. 30. 04:51

 

 

 

  “어린 아이가 마루에서 우유가 든 병을 옆에 둔 채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작은 생쥐 한 마리가 나타나서 그 우유를 먹어 버렸습니다. 아이는 잠에서 깨어 우유병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울고 말았습니다.

그 울음을 듣고 난처해진 생쥐는, 양에게로 달려가 젖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양은 젖이 말라서 우유를 줄 수 없었습니다. 신선한 풀을 먹지 못했기 때문이죠.

생쥐는 다시 들판으로 뛰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들판에는 물이 말라 신선한 풀이 없었습니다.

다시 생쥐는 우물에게로 뛰어 갔습니다. 아름답고 튼튼했던 우물은 이젠 허물어져 바닥에도 물이 없었습니다.

다시 생쥐는 석수장이에게 우물을 고쳐달라고 졸랐습니다. 하지만, 그 석수장이는 적당히 알맞은 돌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생각다 못해, 생쥐는 산(山)으로 달려갔습니다. 산은 생쥐의 말을 외면하였습니다. 나무가 모두 사라진 산은 이미 민둥산이었기 때문입니다.

생쥐는 산에게 부탁 하였습니다. 지금 산이 돌을 내어주면, 나중에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어 산에 벚나무도 심고 소나무도 심을 거라고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산은 결국, 돌을 생쥐에게 주었습니다.

그런 결과로, 아이는 우유를 양껏 풍족하게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먼 훗날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었을 때, 아이는 산에 나무를 많이 심었습니다.

마침내, 산이나 들판에서 흙이 씻겨 내려가는 일이 없게 되자 땅은 기름지게 되었습니다.”

 

전남(全南)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나에게는 나주(羅州)라는 지방이다. 경상인이 한반도를 주무르면서 고립된 땅인 전라도의 나주를 업무 출장중 우연히 둘러 본 내가 충격을 받았던 적은 노태우 대통령 시절로 기억한다. 대리점과 영업소의 교육과 강의로 해마다 몇 차례 전국을 떠돌던 시절인지라, 경상도와 확연하게 비교되며 마치 60년대의 모습 그대로 전개된 거리 풍경이 그 당시로서는 충격이었다. 그 날 밤 소주병을 끌안고 나주의 여관방에서 모처럼 정치란 무엇일까를 골똘히 되뇌어 본 기억이 있다. 나는 그 후에 나주를 가 본 적이 없다. 분명코 대중이 엉아 시절을 거치면서 무쟈게 좋아졌으리라 생각한다.

 

전남 최초의 총리후보자라서 대체로 무난하리라 예상했던 김황식 총리후보자가 인사청문회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좋게 봤는데.. 속내를 들여다보니, 그 놈이 그 놈인 모양이다. 경상인이 득세하는 시대에 호남에서 태어나 관직에 올라 힘든 관리생활을 하면서 외롭지만 청렴을 자존심으로 소심해 보이지만 결백 하나만이 자신의 양심으로 살아오신 분으로 보였는데 그거이 아닌 모양이다.

 

해외 유학을 염두에 뒀던 분이나 지금 자녀를 해외에서 공부시키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두 자녀가 각각 8년간을 해외 유학을 했고, 딸이 결혼직전에 5억의 아파트를 구입했으며 딸에게 2억 3천 정도의 증여를 했는데도 증여세를 낸 부분이 미심적다는 의문을 사고 있으며..

5억의 아파트도 친척들이 십시일반으로 도와서 샀다는 데 나는 왜 그런 친척도 없는지 그 소식을 듣고 천출인 내 자신의 신세가 더욱 서글퍼 스스로 내 귀싸대기를 갈기고 싶은 심정이다. 공무원이 수입이 좋다고 소문을 들어 알기는 알지만 저렇게 수입이 좋은지는 몰랐다. 본인의 말 그대로 김황식 총리후보자가 백성의 공복인 관리로 벌어서 그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면 가히 가장 잘 나가는 어지간한 중견그룹 회장에 버금가는 수입이다.

 

최근 각종 정보매체이거나 청문회를 들여다보면, 우리 사회의 상류층과 보수계열의 인사들이 대체로 거의 타락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장전입’과 ‘병역기피’ 정도는 필수이며 ‘탈세’는 선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떻게 이렇게 불법과 탈법으로 타락한 사람들이 위정자가 될 수가 있는 것인지... 청문회에서 하도 털어대니까, 이제는 어지간한 사람은 장관이나 총리를 안 하겠다고 손사래를 친다는 거다.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저지른 불법과 탈법 등이 들통날까봐 그런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인간은 그나마 양심이 조금 남아있는 거다.

 

공자(孔子)의 제자인 자로(子路)가 “재상(宰相)이 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라고 스승에게 묻자, 공자 가라사대 “정명야(正名也)”라고 설(說)했다. 정명(正名)이란 명(名)과 실(實)이 일치(一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명과 실을 일치시키는 작업들은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아주 드물게 실행되었으며 근자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공정과 평등을 부르짖는 지금 우리 시대의 권력자들의 행보에는 공정이나 평등 그리고 소통과는 엄청난 거리가 있음이다.

 

하버드의 교수 마이클 샌델의 저서 <정의(正義)란 무엇인가>가 한국에서 40만부 이상 팔린 것도 이러한 사정 즉 정의에 목마른 민중(民衆)의 갈증(渴症)이 원인이라는 거다. 이번 추석의 선물로 1,000만원대의 양주, 수백만원대의 포도주가 상품으로 나왔다는 뉴스는 우리 시대의 정의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고가의 선물을 주고받는 것이 불법(不法)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속에 불평등의 요인은 분명코 존재한다. 정의(正義)는 법을 만들고 지키는 것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정의는 필수불가결의 조건으로 지도자들의 치열한 자기절제와 일반 구성원에 대한 양보의 미덕으로만이 지켜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야만(野蠻)의 세상에서 우리나라가 다시 ‘정의’를 되찾는다면, 그것은 분명코 이런 ‘상식적인 신념(信念)’으로 무장된 정치인과 관리들의 덕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