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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가을을 앓다

Led Zepplin 2011. 10. 7. 12:02

 

 

 여름이 막바지 기승을 부리던 9월초, 밤에 술을 제법 마시고 창문을 활짝 열고 자던 새벽 무렵에 감기에 걸렸다.

언제나처럼 별 거 아니라고 가볍게 여겼던 감기가 차도를 보이기 시작할 즈음의 일요일 신새벽에 산에 올라 거친호흡을 즐겼던 나는 그 날 오후 다시 된통 감기를 겪어야했다. 그렇게 악순환의 반복을 겪고 나서야 주말산행을 포기하고 감기에 순응하자 비로소 녀석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통을 툭툭 두들기며 “앞으론 지금처럼 미리감치 알아 기면서 살아라잉~” 하고 떠나갔다. 녀석의 종주먹이 아니더라도 나도 이제는 나이가 들었던 거다. 그렇게 아픈 9월이 지나고 내게도 가을이 왔다.

 

찬란했던 청춘을 통과하지 않은 중년은 없다. 청춘시절에는 더러 실패도 있었다. 그러나, 중장년에게 실패는 큰 아픔이다. 아픔을 아픔이라고 말하지도 못하는 척박한 고통의 시간이다. 청춘의 아픔이 미지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좌절이라면, 중장년의 아픔은 현실적이고도 실존적인 고통이다. 서슬 시퍼렇게 쫒아와 몸으로 직접 막아 설 수밖에 없는 세월 앞에 속수무책 당할 뿐인 것이 중장년의 아픔이다. 아니 어쩌면 고통스러워 할 여유마져도 사치스럽고 하소연할 대상도 없는 것이 중장년의 아픔인 거다.

 

경제/ 아이들/ 건강/ 일/ 부부 그리고 나.. 어느 것 하나 빠트릴 수 없는 절박하지 않은 대상은 없다. 이런 절박함 속에서도 무심한 세월은 속절없이 흐르고야 만다. 독한 쏘주 한 두 잔을 털어넣음으로 속을 가시고, 숙였던 고개 들어 하늘 한 번 바라다보는 것으로 추슬러야 하는 중장년의 고독과 모멸감은 이미 썩어문드러진 속으로 삭이는 것 말고는 별다른 묘책이 없다. 현재의 생활에 밀리고 세월의 거친 숲속에서 우리 중장년은 오늘도 자아를 잃고 세월의 끝도 모른 채 떠밀려 흘러간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를 되뇌던 순박하고(?^^) 철없었던 문학청년은 이미 세월에 허옇게 쇠어 가고 있었던 거다.

잠 아니 들던 불면의 밤을 보냈어도 그 인생이 탄실한 결실을 맺고 꽃을 피웠다면 지난날의 불면이야말로 다시 한 번의 찬란한 아름다움일 수 있겠다. 그러나 꽃 다 피우지 못하고 열매 맺지 못했던 내가 쏘아올린 수많은 화살들은 어찌 하오리...

지난 청춘의 봄에 벌렸던 왁자한 파티가 부끄러워 이 가을 나는 산으로 숲으로 쏘다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은 문득 당신의 목소리가 그립다. 그다지 달콤한 목소리가 아니라도 좋다. 그윽하게 나를 매료시키는 목소리가 아니라도 좋다. 내게 늘 용기를 주던 당신의 다정한 목소리가 그립다. 달착지근하게 사랑을 말하는 목소리가 아니라도 좋다. 가슴속엔 온통 나만을 담아두고 있다는 입에 발린 말이라든지 머릿속에는 온통 내 생각뿐이라고 말을 안 해도 좋다. 그냥 늘 그렇고 그런 일상을 들려주는 목소리가 오늘은 왠지 그립다. 오늘은 뭘 했느냐 어디가 아프지는 않느냐 밥은 먹었느냐고 그냥 친구가 말하듯이 던지는 당신의 그런 목소리가 저녁노을 가득한 이 저녁에 그립다.

 

중년이 되고 보니 가을엔 더욱 가슴에 담고 싶은 것이 많다. 한나절을 하염없이 그리움으로 해매일 때도 있다. 누구라도 하고 싶은 말은 너무나도 많지만, 가슴속에 묻어둔 그 말을 다 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못할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아니 그런 척 하는 것일 뿐 마음은 여전히 아프다. 지금은 아파도.. 아프지 않는 척 하는 것일 뿐이다. 어느 덧 중장년이 된 이 나이, 찬란한 삶을 살아내지는 못했어도 그래도 남에게 허투로 보이지는 않도록 살아왔다. 오늘도 아픔의 고통은 그대로 남아있지만 아프다고 말하지는 않고 살아간다. 중년의 가을, 세월을 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