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주말에 어머니를 모시고 고궁 비원의 봄을 호젓한 마음으로 천천히 구경하였다. 언제 와서 봐도 눈이 즐겁지만, 고궁의 안이나 밖이나 봄햇살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얹그제 비가 오셔서 더욱 청명한 듯 보였다. 공기도 상쾌한데 햇살마져 좋으니 더욱 기분은 즐거워졌다. 서울 사대문 안에서 이렇게 공기좋은 날이 며칠이나 되겠나 말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살아있다는 재미를 자족하며 고궁 방문을 마치고 길 건너편에 세워 둔 자동차로 가기 위하여 횡단보도의 앞에 섰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경찰은 호루라기만 삑삑 불면서 오고가는 차들을 통제할 뿐 횡단보도 앞에 선 사람들을 건너게 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시간은 십여분을 넘겨 횡단보도 앞에 수십여명의 사람들이 모였건만, 교통경찰은 아직도 차만 통행시키고 있다. 더 얼마를 기다리자 어느 순간에 검정색 세단 몇 대가 쏜살같이 지나가고 나서야 우리들은 그 횡단보도를 건널 수 있었다. 누군가의 권자(權者)가 지나갔던 거다.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불쾌를 넘어 화가 치솟았지만 경찰을 나무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우리나라의 권력은 국민을 졸(卒)로 보고 있는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지금도 이와 유사한 일은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벌어진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원 때문에 십원 때문에 일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우연한 일로 살인을 저지르고 4년의 복역을 마친 주인공 조드는 고향집이 있는 오클라호마로 돌아오지만, 오클라호마에서는 이미 전국을 휩쓴 경제 공항의 여파로 살 길이 막연해지자 온가족이 농장 지대인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기로 결정한다. 거의 전재산을 털어 구입한 중고 트럭에 모포와 취사도구만을 싣고, 2천 마일의 길을 가기 위해 산맥을 넘고 사막을 횡단했다. 그동안 조부모를 차례로 잃었으나, 매장할 여유도 없이 시체를 차에 실은 채 가야만 했다. 그들 가족이 겨우 캘리포니아에 도착했을 때에는, 그야말로 돈 한 푼도 없는 빈털터리가 되었다. 화려한 기대를 가지고 도착한 곳은 수십여만 명의 떠돌이 농민들이 각지로부터 모여 있었다.
노동력은 구인의 숫자에 비해 십여 배나 남아돌았고, 임금은 대지주들의 뜻대로 내려 깎여 있었다. 온 식구가 온종일 쉬지 않고 뼈가 부러지게 일을 해도 한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수입밖에는 되지 않았다. 막연한 단결 투쟁의 의식이 싹트기도 했지만 그것은 곧 사상적 불온으로 몰려 한층 더 심한 박해가 가해질 뿐이다. 굶주림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그들 앞의 익은 포도는 이미 아름다운 열매가 아니었다. 그것은 노동자들에게 ‘분노의 포도’일 뿐이다. 노동자들의 분노는 무르익은 포도송이처럼 커지고, 설상가상으로 농장에는 홍수가 밀어닥친다. 그 와중에서 딸 로사 샴(샤론의 장미)은 사산(死産)을 한다. 그리고, 강물이 범람하고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속에서 그녀는 아기에게 먹였어야 할 젖을 굶어 죽어 가는 한 나이 든 노동자에게 먹이며 신비로운 미소를 띄운다.
미국의 소설가 존 에른스트 스타인벡(1902∼1968)은〈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 1939)〉로 잘 알려져 있다. 1962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며, 1968년 12월 20일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소설가 스타인벡은 주로 프롤레타리아들을 다룬 1930년대의 자연주의 소설로 부터 풍부한 상징구조를 만들어내고 등장인물을 통해 신화적/ 원형적 요소를 전달하였다. ‘분노의 포도’는 경제공황과 산업화라는 큰 사회변혁기 속에서 소외되어 가는 인간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 주고 있다. 인간은 더 이상 존재하는 것만으로 그 목적을 가질 수 없게 되며, 어떠한 경제적 이익을 위한 수단과 부품으로 밖에 존재 할 수 없음을 아프게 이야기 하고 있는데 지금의 시대적 상황도 그 당시와 별반 다르지않다. 소설이 아닌 1940년 개봉된 영화에서는 존 포드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으며, 헨리 폰다가 주인공 톰으로 등장한 129분의 사회성 짙은 서사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