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토목/ 기계/ 미술공예 부문의 용어에 ‘거푸집’이 있다. ‘거푸집’이란, 만들려는 물건의 모양대로 속이 비어 있는 모형이나 틀인데 그 안에 금속이나 PVC 알갱이 등을 고온으로 녹여 액상으로 속을 채운 후에 만들려는 모양대로 굳히는 틀을 말함이다. 2011 베니스 비엔날레 미술전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우리의 설치미술가(設置美術家) 이용백의 거푸집 작품에 ‘피에타-자기죽음’이 있다.
작품은 놀랍게도 거푸집이 자기 안에서 나온 속알맹이를 끌안은 채 바라보고 있는 미켈란제로의 피에타와 비슷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속에서 나온 또 다른 자기를 응시하고 있는 무광택(無光澤)의 무표정한 나 그리고 반질거리는 광택의 붉은 생살의 피부로 태어나 피투성이로 살아가야할 운명을 암시한 채 금방이라도 튀어 일어날 순발력을 소유한 것만 같은 또 다른 나, 그 둘은 과연 서로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미켈란제로가 만든 피에타에서 축 늘어진 예수를 안고 내려다보는 그윽한 연민의 눈을 갖은 마리아는 처연하도록 아름답다. 그러나, 이용백이 만든 마리아는 꺼칠한 피부에 무표정하고 연민(憐憫)의 아름다움도 없다. 내 속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저 끌어안고 바라볼 뿐이다. 자식에 대한 안타까움이 없다. 자식 또한 어미의 속에서 나왔을 뿐이지, 겉모습을 제외한다면 반질거리는 약삭빠른 자태(姿態)로 어미를 전혀 닮지 않았다.
어미도 자식에 대한 애틋한 연민이 없고 자식 또한 어미의 품에서 잠시 쉬고 있을 뿐이지 어미에 대한 애정이 없다. 자식은 오히려 어미의 품을 사용하여 자신에 더 몰입해 뺀질거리는 광택의 시간을 다듬고 있을 뿐이다. 마리아의 은총(恩寵)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태어난 피투성이 뺀질이는 오늘 우리들의 자화상(自畵像)으로서 참으로 민망하다. 1499년에 유럽에서 완성된 피에타는 인간의 세상을 그 시대 이전에 비하여 보다 아름답고 우아하고 편리하도록 진화시켰다.
그러나, 2011년에 한국에서 태어난 피에타는 가난을 뿌리치고 부(富)를 이룩했음에도 불구하고 끔찍한 성범죄(性犯罪)와 돈 비린내와 자살률로 오늘의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있다. 학교와 정치는 물론이고 사찰에도 교회에도 돈 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음이다. 세계가 놀라는 경제기적을 건설했다고 자랑하지만, 정작 우리 모두는 대부분 불행하며 오늘도 치열하고 획일화한 삶의 경쟁구도(競爭構圖)와 물질만능(物質萬能) 속에서 허덕이며 끝 모를 갈증(渴症)의 시대를 엮어내고 있는 거다.
신자유주의(新自由主義)가 범람했지만 우리들은 진정한 경제적 자유에 목말라 있으며, 이건희/ 안철수/ 김연아 등으로 대변되는 소수의 승자들이 오늘도 매스미디어를 도배하고 있지만 다수의 우리는 승리라는 단어가 이제는 낯설기까지 하다. 조금은 부유하지 못하더라도 성범죄와 청소년/ 노인의 자살이 없어 모두가 웃고 살 수 있으며, 경쟁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고 물질만이 모든 것의 목표인 작금의 불행한 현실을 타개할 새로운 이데아의 탄생(誕生)을 꿈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