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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야(除夜)」에 부치는 글

Led Zepplin 2012. 12. 17. 15:15

 

 

K형!

그다지 대단치 못한 일을 하면서도 부산스럽기만 하여 자주 소식을 전하지 못하고 세월만 축내다가 어느 새 각종 송년회에 참석하느라 바쁜 12월을 맞았습니다. 이제 2012년도 보름 남짓밖에는 남지 않았습니다그려. 요즘은 거의 하루걸러 한 번 씩 오랫동안 모셨던 어르신, 여러 경로에서 만나뵙게 된 선/ 후배님들 그리고 직장 동료, 친구, 가족 등의 크고 작은 모임이 행사처럼 이어지고 있습니다. 18대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올해는 참으로 잘 보내고 잘 맞아야 하는 중요한 시점이라고 보입니다. 새로운 5년, 혹은 그 이상의 우리 삶과 미래가 이번 2012년 임진년을 보내고 2013년 계사년을 맞이하는 송구영신에 달렸다는 것이겠습니다.

 

K형!

참으로, 힘들고 그야말로 다사다난 했던 한해였습니다. 즐거울 때도 혹간 있었지만, 고통과 고난이 계속 되기도 하고 끝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불평을 하게도 되었고, 원망도 많이 하였습니다. 대다수의 우리 모두들은, 수입은 그대로인데 지출은 늘어나 가계 빛이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선거철인 올해의 송년회는 세상 이야기를 안주삼아 폭주를 많이 한 것 같습니다. 아집과 편견으로 한 해를 보냈지만, 그래도 오늘 한번은 지나온 일 년을 뒤돌아보고 싶습니다. 직장에서 과연 나는 성실하였는지 가족과는 원만히 지냈는지 친구들과는 또 어떻게 통했는지, 한번쯤은 지는 해를, 산마루에서든 아파트 베란다에서든 골목길어귀에서든지 간에 잎사귀 떨어진 나뭇가지에 걸린 노을을 잠시 바라보며 정리할 때입니다. 잠시 잠깐만이라도 스스로를 냉정하게 성찰하여 잘못된 일은 반성하고 잘했고 좋았던 일은 더욱 다듬어 내년을 기약하고저 할 따름입니다.

 

K형!

‘핑크대왕 퍼시’는 핑크색을 유난히 좋아하는 왕이랍니다. 그는 어느 날 자기가 입고 있는 옷은 물론 궁전의 모든 것을 핑크색으로 칠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그는 만족스럽지 못하였답니다. 세상에는 핑크색이 아닌 것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본인의 권력으로 백성들에게 명령하여 왕국의 모든 것들을 핑크색으로 바꾸도록 하였습니다. 바뀐 세상을 보니 퍼시대왕은 너무 좋았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파란하늘 이었죠. 퍼시대왕은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파란하늘을 핑크로 바꿀까 고민하다가 왕국제일의 현인(賢人)을 찾아갔습니다. 현인이 해결책을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핑크색 안경을 끼고 하늘을 보라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자, 비로소 하늘이 핑크색으로 보였습니다. “프레임”이라는 심리학책에 나오는 동화입니다. ‘프레임(Frame)이란 ’세상을 보는 마음의 창‘이란 의미가 담겨있다고 합니다.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도 달라진다는 뜻이겠습니다. 긍정과 확신의 마음으로 한해를 정리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봅니다.

 

K형!

또 세월이 무심하게도 한 해의 언덕을 늬엿늬엿 넘어갑니다그려. 세월의 마디가 우리 인간에게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새해를 맞는 제야(除夜)에는 항상 희망보다는 아쉬움으로 가득합니다. 빼놓을 수 없는 제야 행사에는 보신각 타종이 있습니다. 서른세번 울리는 송구영신(送舊迎新)의 소리에는 종소리가 울릴 때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뭉클한 회한이 나락처럼 내려앉으며 작은 소망 또한 기쁘게 담아봅니다. 한해를 마감하는 종소리에 소망을 담는 것은 서양도 마찬가지처럼 보입니다. 영국시인 알프레드 테니슨은 ‘저 하늘까지 종소리 크게 울려라/ 낡은 것을 울려 보내고 새로운 것을 맞으라/ 진실과 정의의 사랑을 맞으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낡았다는 것이 비단 흘러간 세월만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지난 세월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흔적들, 상처와 고통, 용서받고 싶은 실수들은 훌훌 털어 버리고 소중한 것은 간직하고 싶을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인간의 감정 중에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있습니다. 여기에다 애오욕(愛惡欲)을 덧붙여 ‘칠정(七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요즘처럼 바쁜 세상에서는 그냥 희비(喜悲)라고 줄여서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누구나 그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두루 경험하게 되는데 어쩌면 그 것이 사는 맛일 수도 있겠습니다. 흰색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검은색이 있기 때문이며 긴 것은 짧은 것이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늘 좋은 일만 있다면 오히려 삶이 따분해질 수도 있기에 변화나 자극도 때에 따라서는 필요한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K형!

추사선생의 글 중에 ‘한나절은 책을 읽고, 한나절은 좌선을 한다’는 글귀가 있습니다. 그 뜻을 어떻게 삭이든 간에 생활에 쫓겨서 반성할 시간을 갖기가 어려웠던 것이 민초인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하루의 수레바퀴를 내가 돌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돌아가는 수레에 몸을 맡기고 한해를 보내야만 했던 지나간 세월이 아쉽기가 그지없습니다. 작은 일과 큰 일들이 하늘에 구름처럼 생겨났다가 없어 졌다가 하였습니다. 웬 쓸데없는 일이 그렇게도 많이 들락날락하는지 이것이 우리의 인생살이인가 봅니다.

생활속에서, 우리는 상대보다 내가 먼저 한발 양보해야지 하고 늘 생각은 하지만 막상 현실의 문제에서 부닥치면 나도 모르게 혹시 손해를 보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긴장을 하고 공격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한 발만 물러서 양보하면 편안할 것을 그 기회를 놓치고 '아차' 하는 사이에 격한 폭풍 속으로 휘말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소득도 없으면서 항상 몸과 마음만 다치게 되는 것이죠.

 

“이 숲이 누구 숲인지 알 것도 같다.

허나, 그의 집은 마을에 있으니

내가 자기 숲에 눈 쌓이는 것을 보려고

여기 서 있음을 알지 못하리.

말은 방울을 흔들어 댄다.

뭐가 잘못됐느냐고 묻기나 하듯.

다른 소리라곤 스치고 지나가는

숲과 얼어붙은 호수 사이에

바람소리와 솜털 같은 눈송이뿐.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다.

하지만 난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잠들기 전에 갈 길이 멀다.

잠들기 전에 갈 길이 멀다.”

                    ----- 눈 오는 저녁 숲가에 서서/ Robert Frost(1874~1963)

 

차갑고 흉포하며 거대한 기계장치의 작은 톱니바퀴로 태어나 살면서 항상 숨이 턱이 차 뭘 생각할 틈도 없이 바쁘게 살고 있지만, 가끔 가슴 한 가운데가 뻥 뚫린 것만 같은 허전한 느낌은 있습니다. “쓰벌, 이건 아닌데... ”하며 퇴근길 포장마차에서 쏘주 한 병을 비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나도 모르게 흘린 눈물 한 방울이 구두코에 떨어집니다. 어떤 날은 아예-이렇게 누워 잠들어 그냥 영원히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밤도 있더이다. 귀한 생명을 받고 태어났다고 어릴 적 교회당에서 듣기는 했지만, 이 누추한 삶이 과연 누구를 위한 귀한 생명이었더란 말입니까. 그러나, 힘들고 고단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에겐 나를 지켜보는 가족이 있고 내가 또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며 보이지는 않지만 나를 지켜보는 그 무엇이 있음을 우리는 감지합니다. 내가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용기를 내어 새롭게 하루를 시작해야 함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어쩌면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누군가 무엇인가와의 약속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이행하기에 때로는 고통스럽지만, 내게 부여된 삶을 충실히 살아가야 하겠다는 나 스스로와의 준엄한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킬 때까지 아직은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더 남아 있습니다. 그러한 약속의 한 해에는 좀 더 여유롭고 평안하며 건강한 삶이 되기를 간절하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제야(除夜)를 보내고저 합니다. 부디 강건하소서.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