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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가는 겨울

Led Zepplin 2013. 2. 22. 12:39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 것.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앞으로 갈 것. 꽃·나무·바다·하늘·애인·햇살 같은 희망적인 어휘는 버리고, 침묵·허무·술잔·절망·이별·권태 같은 쓸쓸한 어휘에 익숙해질 것. 어깨는 바로 펴고 시선은 전방을 향한 채 걸을 것. 닳은 구두 뒤축을 탓하지 말고, 한 벌뿐인 양복을 탓하지 말고, 양심을 탓하지 말고, 빈 주머니를 탓하지 말고 가급적 큰 소리로 웃을 것. 그러다가 불면에 잠 못 이루고 남몰래 술잔을 기울이는 밤이면 그때는 뒤를 돌아다볼 것.

                                                                                                              ------ 김세완 / 불혹

 

그 곳이 어느 곳이었던지 갈 곳 없는 이보다는 원하여 갈 곳이 있는 사람이 보다 더 행복하며 우리네 인생(人生)에는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는 길도 더러는 있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하지 않았던 그 길을 다시 가야 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고통이 되겠지만, 우리의 인생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그 수많은 길 가운데 어는 곳인가를 선택(選擇)하여 걸어야만 합니다. 우리들 자동차에는 내비게이션이 있지만, 우리들의 인생에는 그 흔한 내비게이션이 없습니다. 인생은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두려움속의 그 길을 떠나야 하는 한 편의 로드무비(Road-Movie)입니다.

 

주어진 시간(時間)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나라는 존재(存在)이지만, 그 시간의 발자취를 만드는 것은 바로 추억(追憶)입니다. 내가 걸어온 길의 발자취는 내가 살아온 삶의 궤적(軌跡)이고 길 위에 아로새겨진 상처(傷處)는 존재의 상처 그 자체입니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 또한 누군가의 궤적을 나 또한 따라 밟는 것입니다. 허지만, 나는 그 궤적 위에 나만의 추억을 첨가하는 것일테죠. 홀로 외롭게 존재하는 길처럼, 내가 나로써 독립적으로 존재하려면 가끔은 텅 비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나이들면서 이 비어있음의 의미를 더러 곰곰 되새김해 봅니다.

 

지난 주말 모처럼 먼 길을 출행(出行)하면서 어느 시골 간이역(簡易驛)에 잠시 머무르며 겨울답지 않은 한낮의 햇살을 편안하게 즐긴 적이 있습니다. 봄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남녘에는 이미 봄이 저 길 끝에서 망설망설 주춤거리며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외진 시골 간이역에서 만났던 기차는 다시 천천히 움직여 역을 출발(出發)하였으며, 편안한 속도로 덜컹덜컹 흔들리며 강(江)을 끼고 달리고 터널을 지나 산야를 꼬불꼬불 가로지르며 사람과 사람을 태우고 또 다음역을 향하여 내 곁을 떠나갔습니다. 햇살을 받으며 안개와 바람을 가르며 달린 기차는 종착역(終着驛)을 알리는 방송과 함께 종착역의 플랫폼에 사람들을 쏟아낼 것입니다. 그리고, 흔들리며 느리게 달려온 기차는 또 다른 출발을 준비(準備)할 것입니다.

 

나의 고단한 삶도 어제와처럼 그렇게 항상 숨 가쁘지만은 아니하며 더러는 느리게 느리게 통일호 열차(列車)처럼 가고 싶습니다. 천천히 간다고 해서 종착역이 천천히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압니다. 그래도 나는 돌아보면 아픔뿐인 지나온 간이역을 잠시 잊고, 앞으로 만날 간이역마다 잠시 내려서 봄도 한껏 들이마시면서 느리게 느리게 그리고 천천히 덜컹거리면서 나에게 주어진 나머지 길을 웃음 가득 안고 떠나가고 싶습니다. 설령, 그 길의 끝 바람부는 바닷가 모래밭 어느 나무 그늘아래 외롭게 외롭게 잠든다 할지라도 나는 그 길없는 길을 즐거이 여행(旅行)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