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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몽(梅花夢)

Led Zepplin 2013. 4. 5. 14:51

 

- 조선 중기 30세의 나이에 요절한 천재화가로 일컬어지는 고람(古藍) 전기(田琦/ 1825~1854)선생의 매화초옥도(梅花草屋圖)-

 

꿩도 아닌 것이 파랑새도 아닌 것이 자태가 무척 아름다우며 게다가 맑고 고운 소리를 내는 이름모를 새의 뒤를 쫒아 슬금슬금 따라 걷다가 일주문을 지나고 돌계단을 따라가다 옆을 바라보니 놀랍게도 문득 각황전 옆에 홍매화가 발그레하니 활짝 피었다. 활짝 핀 홍매화를 바라보며 손바닥을 치고 웃다가 웃음소리에 놀라 잠이 깨었다. 맞다, 지금쯤 구례 화엄사 각황전 그 옆에 홍매화가 피었을 것이다. 목구멍에 풀칠하기 바빠서 이나마도 풍신에 먹고 산다고 버둥거리다보니.. 중부지방엔 꽃이 없어서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는데, 구례에는 필경 피었을 것이다. 잠이 깨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화장실을 다녀와 다시 잠을 청했지만 잠은 다시 오지 않고 각황전 홍매화만 눈앞을 아롱거린다.

 

회사엘 출근하여 아침회의가 끝나고 장원엘 나와 섰다. 오늘은 정말 봄이 뻐근하다. 이대로 사무실에 쳐박혀 있기에는 날씨가 너무 아깝다. 장원을 한 바퀴 거닐며 온갖 잡생각으로 먼길 떠나지 못함을 달래본다. 매화는 온세상이 잠들어 있을 때라야 홀로 조용히 꽃을 피운다. 꽃말도 고결/ 인내/ 충실/ 맑은 마음이다. 난초/ 국화/ 대나무를 포함한 사군자 중 하나인 매화는 아직 세상이 잠에서 깨어나지 않을 2월 무렵에 그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가장 먼저 꽃을 피워 벚꽃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수수하면서도 절개 높은 위엄을 보여준다. 매화는, 개화가 시작되고 완연한 봄이 되어 다른 꽃들이 만발할 때 향기를 가득 안고 꽃이 진다.

 

不是一番寒徹骨(불시일번한철골) 한번 뼛속을 사무치는 추위를 겪지 않고서야

爭得梅花撲鼻香(쟁득매화박비향) 어찌 매화향기가 코끝 찌름을 얻을 수 있겠는가

                                                        ----- 당나라 고승 황벽선사

 

오랜 옛날 중국 산동지방의 어느 마을에 ‘용래’라는 젊은 청년이 살고 있었다. 청년은 어느 덧 결혼 할 나이가 되었으며 이웃 마을의 아릿따운 처녀와 결혼을 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청년과 그 처녀는 행복한 결혼을 하였다. 그런데 호사다마였던가. 3일 뒤 젊은이의 아내가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청년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날마다 죽은 아내의 무덤에서 울었다. 무심한 세월은 그렇게 흘러갔는데, 어느 날 젊은이는 아내의 무덤에서 매화 한 그루가 피었음을 발견하였다. 젊은이는 그 나무가 아내라고 생각하고 집으로 옮겨와 마당에 심었다. 그리고 ‘용래’는 남은 일생을 오로지 그 매화만을 바라보며 살았다. 그렇게 또 시간은 흘러 젊은 ‘용래’도 세상을 떠나고 만다. ‘용래’는 죽어서도 아내를 잊지 못하고 한 마리의 휘파람새가 되어 매화나무 가지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아름답고도 슬픈 전설인 거다.

 

前身應是明月(전신응시명월) 내 전생에는 밝은 달이었지

幾生修到梅花(개생수도매화) 몇 생이나 닦아야 매화가 될까

                                                      ----- 퇴계 이황

 

구례의 대찰 화엄사에는 세가지 보물이 있는데, 이름하여 각황전/ 홍매/ 동백숲이다. 화엄사 각황전은 무채색의 목조 건물로 300여년전 나무결이 그대로 살아있다. 각황전 홍매는 각황전의 옆에 있는데, 수령 350년을 넘겨 나무가 키도 크지만, 무채색의 소나무 목조건물 각황전이 탈색한 듯 이미 마음을 비운 듯 삶을 이미 초월한 듯 남성스럽게 우뚝 서 있는 그 곁에 가냘프면서도 우아하고 청초하며 화사하게 붙어 서있는 홍매의 여성스러운 모습을 볼작시면, 언제 어디서 무엇이 되어 이루지 못하고 윤회의 바다를 떠돌다가 그 맺힌 한을 풀기 위하여 여기 이 자리에서 이렇게 다시 만난 한 쌍의 남녀이련가 아니라면 바로 신선의 세계 화엄의 세계를 보여주시기 위한 부처의 뜻이련가 그 자태가 아름답고 황홀하기 그지없음이다.

 

梅花本瑩然(매화본영연) 매화는 본래부터 환히 밝은데

映月疑成水(영월의성수) 달빛이 비치니 물결 같구나

霜雪助素艶(상설조소염) 서리 눈에 흰 살결이 더욱 어여뻐

淸寒徹人髓(청한철인수) 맑고 찬 기운이 뼈에 스민다

對此洗靈臺(대차세령대) 매화꽃 마주 보며 마음 씻으니

今宵無點滓(금소무점재) 오늘밤엔 한 점의 찌꺼기 없네.

                                                        ----- 율곡 이이

 

 

이른 봄 눈속에서 가장 먼저 피는 매화를 설중매라고 하는데, 겨우내 몸속에 가둬 두었던 그리움을 장엄한 진홍빛 바람으로 토해 낸다. 만행(萬行)과 만덕(萬德)을 쌓아 장엄하게 맺은 결실을 가리켜 화엄(華嚴)이라 한다면, 각황전 처마에 드리워진 흑매(홍매지만, 너무 붉은 나머지 붙인 애칭)는 바로 화엄의 꽃가지 아닐는지... 석가모니께서 영취산 법상에서 꽃(花)을 들어 대중(衆)에게 흔들어(拈) 보일 적에(示), 누구도 그 뜻을 몰랐지만 오직 제자 가섭만이 그 뜻을 깨우쳐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는 거다. 그렇게 말과 글 대신 마음으로 뜻을 전하는 것을 염화시중(拈花示衆)의 미소라 한다고. 그렇다고 한다면, 붉다 못해 검붉은 화엄사 흑매는 메마른 이 땅 산하에 부처의 자비처럼 날아온 봄날을 마음과 마음으로 찬미하는 심심상인(心心相印) 염화의 꽃이련가...

 

뜨락을 거니니 달이 나를 따라 오네

매화 꽃 언저리를 몇 번이나 돌았던가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나길 잊었더니

옷깃에는 향기 가득 달그림자 몸에 닿네

 

퇴계 이황선생은 매화를 통해 인간과 자연이 천부의 질서 속에 조화되는 천인합일의 성리학적 테제를 몸으로 실천한 진정한 선비였다고 본다. 이 땅 조선의 선비들도 매화를 화중군자(花中君子)로 은유하며 고결한 품격을 높이 샀다. 조선의 선비 중 유난히 매화를 좋아했던 퇴계 선생은 매화의 청진함을 리(理)의 세계로 일체화 시키며 인간이 추구하고자 하는 도덕적 덕성의 표본으로 삼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매화는 퇴계에게 원동자로서의 리(理)이며, 깨끗하고 맑은 리(理)이고 우주의 몸체인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가 늘 주창해온 절대불변의 존재자로서의 표상인 셈이니 그 만큼 선생은 매화를 좋아했고 그래서 그는 매화 앞에서 늘 겸허했으리라.

 

매화(梅花)라면 역시 해묵어 오래된 우리의 토종 매화가 으뜸이다. 섬진강변 농원이거나 전라남도 어딘가의 무더기로 떼를 지어 일제히 피었다 지는 매화를 바라보노라면, 오글오글거리고 요란하게 모여있는 양계장의 닭무리를 보는 느낌과 흡사한데 그 나무들은 대부분 꽃이 덕지덕지 붙은 매실을 따기 위한 일본 개량종으로 매화라기보다는 매실나무라고 봐야 하리라. 농원의 매화들은 우리의 토종 매화와 같은 고고한 품격이라는 면에서는 한결 격이 떨어진다. 영화 ‘취화선’에서 ‘장승업’이 기생의 치마폭에 그려준 매화도도 기생의 치마폭이지만 그 고고하고 정갈한 품격은 떨어지지 않는다. 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 매화는 비록 평생을 추운 곳에 있어도 향을 팔지 않는다는 거다.

 

봄과 함께 매화가 왔다. 화엄사 각황전의 홍매/ 산청군 단속사지의 정당매(政堂梅)/ 남사마을의 분양매(汾陽梅)/ 산천재의 남명매(南冥梅)/ 금둔사의 홍매 납월매/ 선암사의 백매와 전통 참매화 군락지/ 전남대의 대명매/ 백양사의 고불매/ 강릉 오죽헌의 율곡매/ 창덕궁의 만첩홍매 등 이 모두 누백년동안 우리 선대들이 지키고 가꾸어온 고매이며 명매이고 일제도 꺽지못한 이 땅 우리의 매화정신인 거다. 

 

 

탐매여행(探梅旅行), 2월말로 부터 시작하여 4월의 중순까지 말라비틀어진 고목의 등걸에 보석처럼 매달린 매화를 쫒아 봄나들이를 떠나는 것과 같은 흥분은 참으로 경쾌하다. 그중 특히 ‘남명매’는 조선 중기의 학자 조식선생께서 후학을 가르치시던 산천재에 있다. 조식의 호 ‘남명’에서 이름을 딴 하얀 빛깔의 백매화가 바로 그것이다. 450여년 정도의 수령으로 추정을 하며, 빼어난 자태 덕분에 ‘명품 매화’ 반열에 올랐으며, 특히 매화 향이 유난히 그윽하다는 평가이다. 서울 창덕궁 만첩홍매는 창덕궁안 내의원 자시문 앞에 있는 것으로, 나이는 400년 정도이며 선조 때 명나라에서 받은 것으로 분홍색의 겹꽃이며 꽃잎이 크고 대단히 화려하며 아름답다.

 

牆角數枝梅(장각수지매) 담 귀퉁이 매화 두세 가지에

凌寒獨自開(능한독자개) 추위도 아랑곳 않고 홀로 피었네

遙知不是雪(요지불시설) 눈이 아닌 줄 멀리서도 아는 것은

爲有暗香來(위유암향래) 그윽한 향기 풍겨 오기 때문이네

 

매화향을 이토록 아름답고 그윽하게 읽은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은 중국 북송의 시인이자 문필가이다. 왕안석은 신법(新法)이라는 혁신정책을 단행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는 실용주의적인 경향이 강한 남부출신의 신법당(新法黨)에 속해 있었다. 이들은 북부출신의 대토지를 소유한 보수적인 구법당(舊法黨)과 대립하고 있으면서, 토지개혁/ 정치개혁/ 과거제 개혁 등 많은 개혁정치를 실시하였다. 그의 개혁정치는 많은 저항을 받았으나 그의 문장력은 동료와 적 모두에게 인정을 받았다. 그는 우아하고 깊이 있는 글로써 당송8대가(唐宋八大家) 중 한 사람으로 꼽혀 부끄러움이 없다.

 

찬서리 고운자태 사방을 비춰/ 뜰가 앞선 봄을 섣달에 차지했네

바쁜 가지 엷게 꾸며 반절이나 숙였는데/ 개인 눈발 처음 녹아 눈물어려 새로워라

그림자 추워서 금샘에 빠진 해 가리우고/ 찬향기 가벼워 먼지 낀 흰 창문 닫는구나

내 고향 개울가 둘러선 나무는/ 서쪽으로 먼 길 떠난 이 사람 기다릴까.

                                                    -----  납월매(순천의 금둔사에 있는 홍매의 애칭)/ 최광유(신라인)

 

겨울의 끝자락 어느 날이었다. 뉴욕의 한 공원에서 어느 남자가 앞을 보지 못하는 떠돌이 거지를 보았다. 입성도 누추한 그 맹인 거지는 ‘I am blind(나는 장님입니다)’라고 쓴 팻말을 목에 걸고 추위에 몸을 떨며 구걸을 하고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은 무심히 그를 지나쳤고 그의 앞에 놓인 통에는 몇 잎의 동전만이 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가 거지에게 다가가 그가 목에 걸고 있던 팻말을 벗겨 다른 글로 고쳐주고는 떠났다. 그러나, 곧 거지는 뭔가 달라진 분위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어렵쇼?, 통에 떨어지는 동전소리가 멈추지 않았으며 지나는 사람마다 따뜻한 위로의 말을 던지는 게 아닌가. 앞에 놓인 통에는 동전이 제법 쌓였으며 거지는 팻말을 바꿔 걸어주고 간 그 남자가 행운을 주고 간 천사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거지에게 행운을 준 남자는 바로 ‘초현실주의 선언’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시인이며 Sur-Realism의 대가였던 불초 소생이 젊은 날 무모하게도 문학도의 꿈을 불태우게 했던 스승인 앙드레 브르통이었고 그 바뀐 팻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Spring's coming soon. But I can't see it(곧 봄이 오겠지요. 하지만 나는 그 봄을 볼 수 없답니다).’ 이 봄에 활짝 피어나는 매화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모두는 대단한 행운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