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6/25사변 직후에 비한다면, 대략 2/ 300배 정도는 부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갈수록 과잉노동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열심히 일하는데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매 30분마다 한 명꼴로 자살하는 나라, 우리나라의 경제는 왜 국민의 행복을 배반하는 것일까? 열심히 공부했을 뿐인데도 졸업식이 실업식(?)으로 전락하는 청춘들의 눈물과 일을 열심히 하는데도 삶이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여 흘리는 우리들의 눈물 그것의 원인은 과연 무엇인가...
늦었지만,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우리 경제가 어떤 방식으로 왜 뒤틀리게 되었는지를.. 지금의 경제민주화는 왜 요란한 빈 깡통인지를 현존의 논점과는 각도를 달리하여 따져보고.. 소유와 경영+분배와 소비 그리고 주체라는 세가지 방향에서 새로운 대책을 모색해야만 하리라고 본다. 또한 현재 우리나라의 사회경제적 특권층이 누리는 ‘부와 권력의 원천’은 도대체 어디서 나와 어디를 지향하는가를 곰곰이 따져 보아야만 한다.
재벌과 대기업이 잘되어야만 중하층계급도 잘살게 된다는 ‘트리클 다운 효과(낙수 효과)’는 말장난에 불과한 거짓 논리, 허구이다. 윗물이 아래로 흘러넘치기는커녕, 작금의 현실은 아랫물(윗물의 부의 원천)이 세월이 지날수록 위로 뽑혀져 올라가는 상황이다. 일하는 시간이 짧을수록 생산성은 높아짐에도 불구하고 이를 외면한 채 일중독에 빠지게 만드는 ‘금융자본의 허구적 논리’를 파탄내고, 복지제도 문제에서는 가난을 떠나 생존의 문제가 아닌 품위있는 인간의 삶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꿈을 실현하며 사회적 봉사도 하면서 살 수 있는 방법이다.
금융자본가 그리고 신자유주의자들의 아버지라 불릴만한 인물로 《꿀벌의 우화》를 쓴 버나드 맨더빌이 있다. “신분사회에서 도덕이 갖는 가장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지배계층이 피지배계층에게 분수, 곧 신분 질서를 지키라고 가르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나라와 왕국이 행복하게 잘 살려면, 일하는 가난뱅이들의 지식은 그들이 하는 일 언저리에 한정되어야 하며, 그 직업에 관한 것을 넘어서도록 해서는 안 된다. 양치기나 밭가는 농사꾼이 제 노동이나 일자리와는 관계없는 다른 것들과 세상일에 대해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제 일의 피곤함과 어려움을 즐겁고 기쁘게 견대내기가 더 힘들어진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봉준호의 영화 ‘설국열차’에서 틸다 스위튼이 열차의 뒷칸 승객들에게 내지른 말 “Keep Your Place!"가 떠오른다. 그런 썩은 자들이 이 시대를 이끄는 리더들이라는 것은 부끄러움이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도 우리가 지금껏 살아온 삶의 방식에도 변화를 줘야만 한다. 스스로가 돈벌이 경제에 휘둘려 일중독에 빠지면서까지 “자본에 몸 바치는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닌가?”, “무엇을 위해 뛰며 살아왔는가?”, “나는 진정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 등의 ‘자기 질문’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거다. 부자와 권자들은 기득권 쾌락의 중독에 젖어있으며, 우리들은 부자와 권자들을 부러워하면서 자기환멸과 질투에 빠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 스스로와의 타협도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세계는 평평하다》라는 책을 쓴 토마스 프리드먼의 이야기는 음미할 만하다. 책에는 사자와 톰슨가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신자유주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이 책에서 톰슨가젤은 가장 빠른 사자보다 빨리 달리지 않으면 잡아먹힌다. 사자 또한 가장 느린 톰슨가젤보다 더 빨리 달리지 못하면 굶어 죽게 된다. 토마스 프리드먼의 메시지는 당신이 사자냐 톰슨가젤이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며, 우리는 해가 뜨면 무조건 뛰어야 한다는 거다. 이 단순한 우화속에는 살벌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계속해서 톰슨가젤의 동료들이 잡아먹히지만 그게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야말로 ‘1박2일’의 강호동이 즐겨 쓰던 말이다. “나만 아니면 돼!!!”
그들은 “일단 뛰어라. 먹히고 싶지 않다면, 무조건 뛰어라!!!”고 주장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경제의 성장과 자유무역만이 세계적인 빈곤을 퇴치하는 최선의 수단이라 주장하고, 이런 엉터리 믿음이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의 경제를 움직이는 동력인 거다. 그러나, 생존을 위하여 해만 뜨면 뛰어야만 하는 이런 삶이 과연 우리가 그토록 꿈꾸던 삶인가. 가장 느린 톰슨가젤이, ‘나만 아니면 돼, 누군가가 내 대신 잡아먹힌다면 나는 살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 이 세상의 삶이라면 이건 정말 무쟈게 잘못된 거다. 왜냐면, 누군가가 지속적으로 쓰러져야만 그리하여 그 쓰러진 사람 덕분에 내가 하루를 더 연명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하기 싫도록 비참하다.
루이스 캐롤의 《거울나라의 앨리스》에서, 붉은 여왕은 “만약 네가 앞으로 나가고 싶다면 지금보다 두 배는 더 빨리 뛰어야 할 걸~ .”이라고 말한다. 소위, ‘레드 퀸 효과(Red Queen Effect)’이다. 모든 게 거꾸로 인 거울나라에서는 가만히 서있으면 뒤로 가게 되기 때문에 제자리를 지키려면 앞으로 가야만 한다. 앞으로 가려면 당연히 뛰어야 하며 포식자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최소한 포식자의 진화와 같은 속도로는 진화해야만 한다.
우리가 즐겨먹는 쇠고기 1kg을 만들려면 14~15kg의 곡물이 소비되어야 한다고 한다. 세상의 한쪽에서는 굶어 죽는 사람들이 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육고기 생산을 위해 곡물을 대량으로 소비한다. 경제적 합리성과 사회적 합리성이 전도된 바보같은 현실이다. ‘바이오에탄올’이라는 연료의 문제도 그렇다. 곡물을 먹는 데 식용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를 움직이는 동력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경제적 합리성을 위해 사회적 합리성이 희생당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구조의 사회에서 과연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톰슨가젤은 해가 뜨면 뛰어야 한다. 사자가 바로 뒤에서 쫓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서 우리를 뛰게 만들고 뛰다가 지쳐 쓰러지게 만드는 건 사자가 아니라 지금과 같은 끝을 알 수 없는 무한경쟁 시스템이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하여 뛰는지, 일중독에 빠질 정도로 남보다 더 열심히 일하며 저축하며 재투자를 하는데도 왜 경제는 나의 행복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것일까?
사회의 발전에 따르는 경제의 질적 도약이란 결국 창의성을 필요로 하는데, 만든 사람들 스스로도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는 창조경제는 제쳐두고.. 노동시간이 길면 길수록 창의력을 발달시킬 여유는 없다. 허나, 노동시간이 줄고 여유가 많아지면 “삶을 이렇게 계속 살아도 될까?” “내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할까?” “사람들의 생활에선 무엇이 소중한가?” 따위의 생각도 많아지고, 독서도 많이 하며 영화도 보고.. 오페라도 즐기면서 사색적 시간을 통하여 사물과 현상을 보는 안목을 키울 수가 있다.
복지의 밑바탕엔 바로 이런 중요한 요소가 숨어 있다. 오늘날 스웨덴 성인의 절반 이상이 자발적 학습 모임을 갖는다고 하는 바 이런 역사는 100년도 넘었으며 100년 전 가난했던 스웨덴을 발전시키고 사회적 변혁을 이끈 원동력이다. 유달리 동아시아에서 숨가쁘게 돌아가는 힘의 동력과 안보의 구도를 보면서 멈출지 모르는 우리 정치인들의 정쟁을 보면 지도자와 정책의 중요성이 새삼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