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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추(深秋)에 보낸다

Led Zepplin 2014. 11. 15. 23:49

 

 

 

  바람이 불고 그 부는 바람에 따라 포도에 뒹굴던 낙엽은 내 마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바람에 휩싸여 알듯 말듯한 소리를 외치며 어디론가 멀리 떠나간다. 누구라고 딱히 지목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그 누군가가 그리워지고 잊었던 어슴프레한 추억도 문득 떠올라 그리워지며 무엇인가 이름할 수 없는 막연한 그리움으로 가슴 가득 온통 먹먹해지는 이 가을엔 기약없이 먼 길을 떠나고만 싶다.

 

어느 새 벌써 눈이 내렸으며 추위마져 느낄 수 있지만, 창밖의 거리는 전형적인 심추(深秋)의 정취이다. 앙상하게 남은 나무 가지아래 수북히 쌓여있는 낙엽과 드센 바람에도 떨어지지 않고 마지막 잎새로 남으려는 빛바랜 나뭇잎의 애타는 모습에서 지난 시절의 아련한 추억이 떠오른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가을, 그 밝은 햇살과 햇살에 투영되어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단풍의 무리속에서 근원을 알 수없는 그리움과 슬픔이 묻어있기에 어느 땐 주체할 수 없도록 나도 모르게 왈칵 울음이 치솟는다. 멍한 시선으로 살아왔던 날들을 가만히 되돌아보면, 두 번 다시는 되돌아 갈 수 없는 잊혀진 세월 그 살아 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데 그 주마등속에는 예쁘고 아름다웠던 잊지못할 소녀가 있다.

 

기억속에서는 이미 희미해져 버린 그 소녀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본다. 눈을 감으면 빛바랜 사진 속에 잠재워 놓은 지난날들이 그리워, 마음을 적시며 가슴을 아리게 하는 아픔마져도 느껴지는 추억속의 소녀... 한 시절 사랑했던 소녀와의 영상이 물안개가 되어 피어오르며 이슬이 되어 젖어오는 그리움. 애틋한 추억으로 가슴에 남는 것은 어쩌면 되돌아 갈 수 없는 시간이기에 더욱 안타깝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소녀를 처음 만난 곳은 전주의 전동성당이었다. 작은 키에 얼굴이 갸름했던 소녀는 밝은 얼굴과 미소로 어느 장소에서든지 금방 눈에 띄었다. 각 지역에서 몰려든 뛰어난 인물들의 면면앞에서 대회를 주관하는 부회장으로서 그녀의 태도와 말씨는 조심스럽고 간결하면서도 맑고 밝은 목소리로 친절했으며 겸손하여 참석한 여러 지역 회장단들의 아낌없는 칭찬을 들었으며, 그 누구에게도 모두 친절했기에 소녀를 향한 나의 마음은 나만의 일방적인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일방적인 마음이 조금쯤은  안타까웠지만, 그 일방적인 마음이 쌍방적인 것으로 확인되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던 거다.

 

교구의 각 지역 회장단의 대회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소녀는 내가 학생회장으로 있는 성당으로 편지를 보내 우리 성당을 구경하고 싶다고 하였다. 누구의 요청이라고 거절하겠나. 즉시, 그러하자고 답장의 편지를 발송하였다. 지금처럼 전화도 발달하지 못하였으며 인터넷은 단어조차도 없던 시절이었다. 설레임으로 며칠 동안을 들뜬 채 시간이 흘러갔다. 그리고, 마침내 소녀가 왔다.

 

세일러 교복을 단정하게 입은 소녀는 적당한 길이의 단발머리였으며, 특유의 밝은 표정과 미소 때문에 더욱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슬픔과 고통스런 비밀을 간직하며 살아 온 나와는 다른 세상의 사람임이 한 눈에도 확연하였다. 나는 소녀를 안내하여 우리 성당의 여기저기를 안내하여 주었으나, 교구에서는 저명한 우리 성당의 신부님 조카딸인 소녀는 이미 우리 성당을 알고있었음에도 어설픈 나의 안내에 미소 가득한 얼굴로 다정하고 붙임성있게 따라주었다.

 

늦은 봄에 만난 우리는 그 여름과 가을동안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깊어가는 가을을 만끽하였다.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주옥같은 시간은, 새하얀 모시에 씨실과 날실로 꽃그림으로 수를 놓은 채 영롱하게 그리고 꿈결처럼 흘러갔다, 그 눈동자와 입술을 내 가슴에 남긴 채 말이다. 전동성당의 계단 그리고 가로등 그림자속에서 밤늦은 시간까지 속삭인 밀어들은 가슴속 깊은 곳에 침잠하여 내 인생의 보석이 되었다. 그리고 그 가을이 깊어지고 겨울이 되자, 우리는 우리 두 사람이 교구학생회의 회장단 이상의 그 무엇임을 알게 되었으며 우리 둘의 마음은 가을보다 더욱 애틋해졌으니 그것이 사랑임은 두 말 할 여지도 없음이다.

 

그러나, 그 만남은 안타깝게도 겨울과 함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문득 어처구니없는 종말을 고하였다.

 

   이슬로 맺히는 인연의 말

   뜨거운 가슴 속에 묻어 놓고

   여윈 햇살의 마음

   기도로 배를 채우며

   빛살은 빛살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아프게 가는 세월의 눈빛에

   인연의 흔적 곱게 실어 올리며

   허공에 찍힌 무상한 사랑의 발자국

   겨울나무의 수액으로 거르고 걸러

   신음 소리 한 쪽 들리지 않은 노랫말

   환생하는 꿈 하나 까치 소리 몰고 온다

                                                  ------   강문숙/ 이슬꽃 피는 아침

 

소녀의 꽃 같은 그 발길이 머물던 그 곳 그리고 그 곳, 그녀의 숨결이 느껴지던 그 모든 장소에서 식어진 나의 마음이 다시 뜨거움으로 머물 수 있기를 소원한다. 우리의 사랑이 그녀와 함께 지샌 긴 밤의 별들처럼 가을날 붉게 물든 단풍잎들처럼 그 영혼의 곁에 오랫토록 머물도록 기도한다. 그리하여, 내 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진실한 기쁨과 환희가 되어 우리 둘의 영원한 사랑의 보석이 되어 별이 되어 끝없이 밝게 빛나기를. 그 날 그 순간순간 스쳐가는 시간과 세월 또한 나의 곁에 함께하여 꿈이 꿈만으로 끝나지 않는 추억으로 영원히 남은 채 언제나 내 곁에서 함께하기를...